[맛 기행] 전복, 귀어귀촌 할 청년을 부른다 게시기간 : 2021-10-2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0-18 14:4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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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무더위와 가을장마까지 악조건을 견디고 이겨낸 전복이 뭍으로 나오고 있다. 여름 복달임에 맞춰 팔아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지만 코로나로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가을장마와 폭우로 집단폐사까지 겹쳤다. 전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전남지역 양식어가들이 많이 힘들었다. 다행이 시련을 이겨내고 튼실하게 자란 남은 전복을 가을걷이 하는 중이다 전복(全鰒)은 세계적으로 100여 종에 이르는데, 토종으로 북방전복(참전복), 둥근전복(까막전복), 왕전복, 말전복 등이 있다. 전복은 미역, 다시마, 감태 등 해조류가 많은 갯바위에 붙어살며 바닷말을 먹는다. 스스로 수온변화를 감지하여 성숙과 산란을 조절하지만 겨울철에 산란하고 봄철부터 여름철까지 해초들을 먹고 살이 오르기 때문에 여름부터 가을철이 제철이다.
* 복어가 전복이다 전복을 복어(鰒魚)라 했다. 《자산어보》 《고려도경》 《성서부부고》 《성호사설》 《연려실기술》 《오주연문장전산고》 《임하필기》 《해동역사》 등 많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해이어보》에는 전복을 날것은 생복(生鰒), 찐 것은 숙복(塾鰒), 말린 것은 건복(乾鰒)으로 구분했다. 지금처럼 보관이나 운반시설 좋지 않았던 옛날에는 전복을 말려 사용했다. 말린 전복 중에서도 황갈색을 띤 큰 복을 명포(明鮑), 잿빛을 띤 작은 복을 회포(灰鮑)로 구분하기도 했다. 서유구는 《전어지》에서 ‘전복 따는 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매월 상현달이나 하현달이 뜨면서 바람이 온화하며 햇볕이 따스할 때, 여성들은 전복 채취를 생업으로 삼는다. 40-50명이 무리를 이루고 저고리와 치마를 벗고 잠방이(속곳, 물소중이 해녀복)만 입는다. 테왁과 망사리를 챙기고 송곳(호미)을 가지고 채취한다. 이때 전복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재빨리 송곳으로 후벼서 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돌에 단단히 들러붙어서 뗄 수가 없다.
왜 상현하고 하현일까. 물질을 하는 해녀들에게 물살의 세기는 생명과 직결된다. 그래서 조류가 세지 않는 물때가 좋다. 두 번째로는 탁도다. 조류가 거칠면 부유물이 함께 움직여 시야가 좋지 않다. 보름이나 그믐 물때는 조류 이동이 활발한 ‘사리’다. 그래서 상현과 하현의 ‘조금’ 물때가 전복을 따기 좋다. 《자사어보》에는 ‘복어’는 ‘살코기는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그 장(腸)은 익혀 먹어도 좋고 젓갈을 담가 먹어도 좋으며 종기 치료에 효과가 있다. 봄과 여름에는 독이 있는데 이 독에 접촉하면 살이 부르터 종기가 되고 환부가 터진다’고 기록했다. 《난호어목지》에 전복은 ‘동해 남해 서해 모두 있다. 관동 고성 등에서 나는 것은 껍질이 작고 살이 없고, 영남 울산·동래, 호남 강진·제주 등지에서 나는 것은 껍질이 크고 살이 많다’고 했다. 또 ‘껍데기채로 얼음에 채워 파는 것은 생복, 껍데기를 제거하고 햇볕에 말려 10미씩 대꼬챙이에 꿴 것을 건복, 얇게 다져서 종잇장처럼 펴낸 것은 추복 혹은 장복이며 안줏감으로 좋다’고 했다.
* 남자가 전복을 땄다 전복은 패총에서 발견된 패각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식용으로 즐겼던 것 같다. 조선시대 해산물을 채취하는 ‘포작인(浦作人)’과 ‘잠녀’가 있다. 전복을 따는 사람이 포작인이다. 이때도 전복은 귀한 식재료로 공물이요 진상품이었다. 그래서 토호들이나 관리들의 수탈 대상이었다. 《각사등록》에 보면 충청수영이나 통영과 좌수영에 ‘채복선’이 등장한다. 진상할 전복을 채취하는 배들이다. 제주 외에도 포작인이 배치된 섬들도 있다. 여수 횡간도도 그 중 하나다. 포작인은 진상할 해산물만 아니라 관아에서 쓰는 것도 부담했다. 제주의 경우 1년에 포작인은 20필, 잠년는 7,8필에 해당하는 전복과 해산물을 바쳐야 했다. 제주목사 기건은 《제주풍토기》에 그 실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재임하는 동안 밥상에 전복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탐라지(耽羅誌)》를 보면 전복은 말(馬), 감귤과 함께 임금께 진상되는 공물이었다. 제주에서는 포작인들이 수탈을 견디다 못해 출륙하자 조정에서는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얕은 바다에서 미역 등 해초를 채취하던 잠녀들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전복을 채취해 부족한 공물을 맡아야 했다. 제주도만 아니라 완도 청산도, 평일도, 생일도, 덕우도 등 완도지역, 가거도, 만재도, 태도, 홍도, 흑산도 등 신안 지역에도 전복을 채취하는 해녀가 있다. 전라남도만 아니라 부산 영도, 통영 사량도, 동해 울릉도, 보령 외연도 등 동해와 서해와 남해 여러 곳에 해녀들이 있다. 해녀들은 미역, 우뭇가사리, 전복 등을 채취한다. 특히 전복은 해삼과 함께 마을어업의 주요 소득원이다. 자연 서식하는 곳은 점점 줄어들고 이제 인공수정해서 키운 어린 전복을 뿌려 놓았다가 자라면 채취한다. 물고기처럼 이동하지 않아 가두리를 하지 않고 곧바로 마을어장에 살포한다. 이렇게 인공수정해서 뿌린 전복과 순수하게 바다에서 자란 전복과 맛에서 차이가 있을까, 구별하기 어렵다. 오히려 양식전복이 식감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다만 인공수정한 치패는 껍질에 뿌릴 당시 크기만큼 푸른 점이 남아 있다.
* 전복양식, 청년의 희망이 되려면 완도는 김, 미역, 다시마 등 해조류양식의 중심에서 전복양식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조류양식을 멈춘 것은 아니다. 김 양식은 해남과 진도, 군산, 서천 서해로 옮겨갔지만, 미역과 다시마는 여전히 완도에서 많이 양식을 한다. 다만 과거에 식용이었다면 지금은 전복 먹이를 위한 양식을 하고 있다. 그만큼 전복양식이 비중이 높였음을 의미한다. 2000년 초반에 전복양식을 했던 세대는 이제 고령으로 양식을 주도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주인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최근 하나 둘 자식들이 들어와 그 자리에 차지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청산도, 소안도, 보길도, 노화도가 대표적이다. 전복양식은 어린 전복을 가져다 3년을 키워야 상품이 된다. 그 사이에 크기를 봐서 개체수를 나누어 분산시켜야 하고, 사나흘에 한 번씩 먹이도 줘야 한다. 다시마와 미역 철에는 먹이생산을 위해 해조류 양식도 해야 한다. 가장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전복을 크기별로 나누고, 출하를 위해 전복따기를 할 때다. 이때는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도 한다. 필요할 때는 전복집을 만들고 양식장 틀을 만드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젊은 노동과 기술이 필요하다. 예전에 비해 소득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는 것보다 낫다면 실리를 찾아 들어오는 자식들이 늘고 있다. 아쉽다면 이렇게 섬으로 들어온 젊은이들이 전복양식 외에 다른 커뮤니티를 형성하지 못하고 기회도 없다는 점이다. 올여름은 전복양식 어민들에게 악몽 같은 여름이었다. 코로나 여파로 소비량이 크게 줄었다. 게다가 3년간 잘 키워 출하를 앞둔 전복이 집중 호우로 모두 폐사했다. 강하구나 연안에서 양식을 하는 어가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 그러잖아도 기후위기, 연안오염, 높은 폐사율로 전복양식 어가의 어려이 큰데 엎친 데 덮쳤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로 외국인노동자마저 구하기 어려워 인건비는 크게 올랐다. 이 상태로는 양식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어가들도 생겨나고 있다. 귀어귀촌한 젊은 어민들이 답답한 것은 앞으로 반복될 재난에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피해를 오로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 보양에는 전복죽이다 전복은 껍질이 두 개 인 이매패 조개와 달리 한 쪽만 있다. 서양인은 짝이 없어 먹으면 사랑에 실패한다고 먹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당뇨와 고혈압에 좋은 저지방 고단백 식품으로 식재료만 아니라 한방에서도 찾고 있다. 전복에는 원기회복과 피로회복을 도와주는 영양소가 풍부하다. 중국에서는 전복을 해삼, 상어지느러미 등과 함께 최고의 강장식품으로 꼽는다. 환자나 기력이 쇠한 사람에게 전복을 권한다. 전복으로 가장 쉽게 맛 볼 수 있는 것이 전복회다. 봄에서 초여름에 먹는 전복이 살이 단단해 식감이 좋다. 오돌오돌 씹히는 맛과 달콤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회로 먹으려면 고운 솔로 문질러 잘 씻은 다음 패각의 납작한 쪽에 숟가락이나 칼을 넣어 떼어 내 내장을 터지지 않게 제거한다. 청산도 해녀가 해준 이야기이다. 정말 맛있는 전복을 먹고 싶다면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전복살을 꺼낼 때 칼 대신 빗창을 사용했다. 전복 살을 회로 썰지 말고 통째로 베어 먹으라고 알려줬다. 칼을 대는 순간에 전복살을 딱딱해 진다는 것이었다. 전복 내장을 소금에 버무려 먹는 것이 게우젓이다. 버터를 바른 전복구이, 채소를 넣은 전복구이는 옛말이고 전복을 통째로 넣은 전복빵도 선을 보였다. 뭐니뭐니 해도 전복요리의 백미는 전복죽이다.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할 정도로 몸을 보해준다. 전복 창자는 전복죽을 끓일 때 넣어야 독특한 맛고 향을 낸다. 젓갈을 담그기도 했다. 껍질은 공예품 재료로 사용했다. 또 바위에 붙은 김이나 파래를 채취할 때도 요긴했다. 한때 껍질을 사가는 사람이 있어 엿장수가 엿을 주고 수집하기도 했다. 전복양식 어가가 여름철 복달임을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닭에 인삼을 넣고 여기에 전복까지 올린 보양식이다. 전복된장국, 전복찜 전복초(炒), 전복물김치 등도 있다.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섬발전연구지원센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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