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소쇄원에 그린 48폭의 그림_김인후의 원림시 게시기간 : 2021-10-28 1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0-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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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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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 원림시(園林詩) 이 시는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가 지은 「소쇄원사십팔영」 중의 제1영 작품으로, 시 제목을 ‘작은 정자 난간에 기대어’라고 하였다. 오언절구의 짧은 시로, 그 의미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쇄원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데, 고스란히 소쇄정을 이루었다. 그 소쇄정 난간에 기대어서 눈을 쳐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면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하다.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 있는 정원으로, 소쇄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하였다. 그 소쇄원에 김인후가 시를 지을 당시 ‘소쇄정’이라 이름 부른 작은 정자가 있었다. 김인후는 그 소쇄정 난간에 기대어서 눈을 쳐들어보면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면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이 느껴진다고 표현하였다. 곧, 소쇄정 난간에 기대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시로 나타냈으니, 시각ㆍ청각적 이미지를 아울러 표현한 작품인 것이다. 마지막 결구에서 말한 ‘구슬 소리’는 소쇄정 주변에 흐르는 물소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읽는 사람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소쇄원에 가 보면 소쇄정이라 이름 한 정자는 없고, 그 대신 ‘봉황새를 기다리는 누대’라는 의미의 ‘대봉대(待鳳臺)’만이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소쇄원도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양산보와 김인후의 아름다운 우정과 인연 양산보의 자는 언진(彦鎭)이요, 호는 소쇄옹(瀟灑翁) 또는 소쇄처사라 했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아버지는 양사원(梁泗源)인데,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의 할아버지 송복천(宋福川)이 장인이다. 따라서 송순이 양산보의 외종형이 되는 셈이다. 또한 양산보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과 6촌간이요, 김인후와 사돈 사이였다. 양산보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었고, 아버지 양사원은 그런 아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5세(1517, 중종12) 때 양산보를 서울에 있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 데리고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조광조는 양사원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양산보에게 『소학』 책을 주며 읽을 것을 권유한다. 『소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원리가 집약된 수신서(修身書)로, 조광조는 스승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2년 뒤인 1519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전남 능성(綾城, 현 전남 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 가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원대한 꿈을 지닌 채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으려 했던 양산보가 느꼈을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본다. 양산보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낙향하는데, 이때의 상황을 이민서(李敏敍)는 「소쇄원양공행장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심히 어렸다. 마침내 벼슬에 나갈 뜻을 끊고 서석산 아래 수석이 빼어난 원림에 집을 지어 두문불출 한가롭게 살면서 그 사는 곳을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소쇄옹’이라 불렀다. (『소쇄원사실』 권3, 「소쇄원양공행장」 중에서)
『소쇄원사실』 등의 기록에 따르면, 소쇄원 터는 양사원이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산보는 기묘사화를 겪은 뒤에 아버지가 마련한 터에 원림을 지어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자신을 가리켜 ‘소쇄옹’이라 했다. 한자 ‘소쇄(瀟灑)’란 ‘깨끗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니,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소쇄원은 호남사림들의 아픔과 서러움을 달래주고, 학문을 마음껏 토론하던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근에 살던 사림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여든 사림 중에 김인후는 양산보와 관련지어 볼 때 단연 돋보인다. 다음의 기록은 그 사실을 말해준다. 선생(양산보)은 하서와 더불어 뜻을 같이 하고 서로 좋아하여 아들딸로 시집 장가를 들게 하니 오가며 강설하되 늙어서도 그만 두지 않았다. 늘 서로 보면 기뻐하고, 의리를 토론하기를 매우 깊게 하며, 고금의 사실을 뚜렷이 하였다. 어떤 날은 술을 마시며 시부(詩賦)를 짓되 밤낮을 다해도 싫어하지 않았다. 하서가 소쇄원에 오면 여러 달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소쇄원사실』 권3, 「소쇄원양공행장」 중에서)
위 인용문 내용을 통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양산보와 김인후가 아들딸을 시집보내고 장가보내 사돈 사이가 되었고, 의리를 토론하기를 매우 깊이 하고 시부를 밤낮을 다해 지었으며, 셋째 김인후가 소쇄원에 가면 여러 달 동안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인후는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 동복으로 유배 갔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게 찾아가 학문을 연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김인후는 18세였고, 양산보는 25세였다. 양산보는 김인후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영특한 후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김인후는 양산보를 언제든지 소쇄원에 가면 서슴없이 받아주는 선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인후는 장성(長城) 집에서 출발해 동복에 계신 최산두 선생에게 찾아가는데, 중간에 있는 소쇄원에 늘 들러 작게는 안부를 묻고 크게는 학문을 토론했던 것이다. 양산보와 마음이 맞지 않고 또 양산보가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았다면, 김인후가 소쇄원에 들러 여러 달 동안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양산보와 김인후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요, 그 우정은 마침내 사돈의 인연을 맺는 데까지 나아갔다.
3. 김인후는 어찌 이렇게 소쇄원을 잘 그려냈을까? 소쇄원은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손길을 더한 곳이기에 건물과 경물의 배치가 어색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김인후는 소쇄원에 가서 여러 달 머무르는 동안 그곳에 있는 자연물과 인공물 모두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쇄원 관련 한시 작품 총 78수를 지었다. 물론 그 78수 중에 「소쇄원사십팔영」이 들어가 있는데, 소쇄원 주인이 김인후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작품을 지었다. 이러니 “소쇄원을 지은 사람은 양산보이고, 그 소쇄원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김인후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김인후가 왜 어떤 이유에서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었는지 그것을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소쇄원을 드나들다가 시심이 우연히 일어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은 것 같지는 않다. 우연이라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소쇄원사십팔영」 전체 작품을 놓고 보면, 큰 우주의 질서를 반영한 듯한 느낌을 주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인후는 「소쇄원사십팔영」을 짓기 시작하여 끝마칠 때까지 여기저기 배치를 하고, 작품의 순서도 바꿔가면서 완성해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소쇄원을 어떤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까도 고민했을 것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것만 알릴 것인가? 아니면 작고 보잘 것 없으나 소쇄원을 꾸며주는 풀, 나무, 바위, 물 등을 대상으로 시를 읊을 것인가? 김인후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소쇄원사십팔영」 속에 등장하는 인공과 자연물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작은 정자(소정〔小亭〕), 글방(문방(文房)〕, 물〔水〕, 거북바위〔오암(鼇巖)〕, 물고기〔魚〕, 물방아〔수대(水碓)〕, 아슬한 다리〔위교(危橋)〕, 바람소리〔풍향(風響)〕, 매대(梅臺), 달〔月〕, 석가산〔假山〕, 소나무와 바위〔송석(松石)〕, 푸른 이끼〔창선(蒼蘚)〕, 평상 바위〔탑암(榻巖)〕, 긴 섬돌〔수계(脩階)〕, 홰나무〔괴(槐)〕, 조담(槽潭), 끊긴 다리〔단교(斷橋)〕, 소나무와 국화〔송국(松菊)〕, 외로운 매화〔고매(孤梅)〕, 긴 대나무〔수황(脩篁)〕, 대나무 뿌리〔죽근(竹根)〕, 새〔금(禽)〕, 대밭〔총균(叢筠)〕, 오리〔압(鴨)〕, 창포〔창포(菖蒲)〕, 사계화〔사계(四季)〕, 복사꽃 언덕〔도오(桃塢)〕, 오동나무 대〔동대(桐臺)〕, 폭포수〔사폭(瀉瀑)〕, 버드나무 물가〔류정(柳汀)〕, 연〔부거(芙蕖)〕, 순채싹〔순아(蓴芽)〕, 배롱나무〔자미(紫薇)〕, 파초(芭蕉), 단풍(丹楓), 눈〔설(雪)〕, 붉은 치자〔홍치(紅梔)〕, 애양단〔양단(陽壇)〕
김인후는 소쇄원에서 만난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인공과 자연물을 시로 형상화하여 「소쇄원사십팔영」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에서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 때문에 김인후가 시를 통해 나타낸 풀과 물, 나무, 바위, 새집 등은 더 이상 일반적인 것들이 아니고, 특별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같은 물도 ‘폭포수’ 또는 ‘굽이도는 물’과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내었는데, 김인후가 사물을 자세히 보고 관찰하지 않았다면 「소쇄원사십팔영」과 같은 훌륭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김인후가 어찌 이렇게 소쇄원을 잘 그려냈는지 신비로울 뿐이다.
4. 후대까지 예찬된 「소쇄원사십팔영」 시냇물이 집의 동쪽으로부터 흘러왔는데, 담장을 뚫고 끌어들여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뜰 아래로 흘러간다. 그 위에는 작은 다리가 있고, 다리 아래로는 바위가 오목하게 생겨 ‘조담(槽潭)’이라고 하는데, 그 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쏟아 내리니 그 소리가 영롱하여 거문고를 울리는 듯하였다. 조담의 위에는 노송이 굽어서 쓰러지듯 덮어 연못을 걸쳐 비껴있다. 작은 폭포의 서쪽에는 아담한 서재가 있으니 완연히 화방(畵舫)과 비슷하였다. 그 남쪽에는 돌을 높게 쌓아 날개를 편 듯 작은 정자를 세웠는데, 형상이 일산(日傘)과 같았다. 처마 앞에는 벽오동이 서 있는데, 고목이 되어 가지가 반쯤 썩어 있었다. 정자 아래로는 작은 연못을 파고 나무 홈통으로 시냇물을 이끌어 댔다. 연못의 서쪽에 죽림이 있어 큰 대나무 백여 그루가 구슬과 같이 서있어 완상할 만하였다. 죽림 서쪽에 연지(蓮池)가 있는데, 둘레를 돌로 쌓고 시냇물을 이끌어 작은 연못을 이루었다. 죽림 아래를 거쳐 연지 북쪽을 지나니 또 물방아가 있어 보는 것마다 소쇄하지 않음이 없었다. 김하서의 48영에 그 아름다운 풍치가 모두 그려져 있다. (고경명, 『유서석록』 중에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은 그의 나이 42세(1574, 선조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을 유람한 뒤에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유산기를 남겼다. 고경명은 5일 동안 유람하였는데, 마지막 날 소쇄원을 들러 그곳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 위 글을 보면, 인상적인 말들이 몇 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김하서의 48영에 그 아름다운 풍치가 모두 그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소쇄원사십팔영」에 대한 큰 예찬이라 생각한다. 48수의 작품에서 소쇄원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소쇄원사실』
고경명, 『유서석록』 김인후, 『하서전집』 김덕진, 『소쇄원 사람들』, 다할미디어, 2007. 박준규ㆍ최한선, 『시와 그림으로 수놓은 소쇄원사십팔경』, 태학사, 2000. 천득염, 『은일과 사유의 공간 소쇄원』, 심미안, 2017.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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