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을 하였을까?(2) 게시기간 : 2021-11-10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1-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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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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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입당부인설(入唐否認說) 우리는 앞에서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의 풍수지리설을 배웠다고 주장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도선의 입당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선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중기 의종대 최응청(崔應淸)이 쓴 선각국사추봉교서(加封先覺國師敎書)와 최유청(崔惟淸)이 찬술한 도선비문(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이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C) 왕사 모는 나면서부터 큰 뜻이 있어 세상에서 法器라고 일컬었다. 묘한 근원을 性海에서 찾아 空門에 막히지 않았고 眞印을 禪林에서 얻어 스스로 묘한 뜻에 통달하였다. 깊고 묘한 것은 이미 佛祖에 지극하였고, 나머지 일로는 더욱 陰陽學에 정통하였다. 신비한 術法을 장차 전수받게 되었으니,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친견하게 되었고, 여섯 가지의 신통력이 막히지 않아 大地를 묘하게 보아 빠짐이 없었다.(崔應淸,「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 『東文選』27)
D) 국사의 휘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사람이다. 그 선대의 가계와 부조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상실되어 전하는 것이 없다. 혹은 그가 신라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고도 전한다. (중략) 월유산 화엄사에 가서 출가하고 불경을 배우게 되었는데, 한 해도 채 못 되어 불교의 대의를 통달하여 문수의 미묘한 지혜와 보현의 법문도 모두 깊이 깨달았으니 여러 학도들이 놀라고 귀신같은 총명이라고 친찬하였다. 문성왕 8년(846) 도선의 나이 20살이 되었다. 문득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고요히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 문자에만 열심히 종사할 것인가?”라고 했다. 때마침 혜철대사가 서당지장대사에게 심인을 저해 받고 동리산에서 법석을 여니 법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모였다. 대사가 선문에 나아가서 제자 되기를 청했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히 여기고 지성으로 가르쳤다. 무릇 소위 말해서 “설함이 없는 설법과 무법의 법”을 가르치니 확연히 깨달았다. (중략)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에 자리 잡지 아니하고, 지리산 구령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좌하(座下)에서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제자는 세상 밖(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 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技術)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다른 날 남해(南海)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 모아 산천에 대한 순역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돌아다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법(術法)을 연구하였다. 비록 金壇과 玉笈 등, 깊고 오묘한 비결들을 모두 胸中에 담았다. (崔惟淸 撰, 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 C)는 최응청(崔應淸)이 의종(毅宗)의 왕명(王命)으로 작성한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이며, D)는 최유청(崔惟淸)이 의종의 왕명(王命)을 받아 지은 옥룡사선각국사증성혜등탑비(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이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최응청과 최유청은 도선의 입당(入唐)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선이 국내에서 남종선(南宗禪)과 강서지법(江西之法)의 풍수지리설을 전한 동리산문의 개산조사인 혜철에게 선승으로 인가를 받았고, 국내 지리산의 신이한 사람(異人)에게 풍수지리설을 습득했다고 하였다.
도선비문을 지은 최유청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물이었으며, 유학자적 관로로서 평장사 등을 역임한 고위 관료였다. 그는 또한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유교적인 합리주의와 불교에 통달한 그였기에 승려인 도선비문을 짓기에 그 시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최응청과 최유청은 별개의 인물이다1) 다만 최응청이 국왕의 교서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그 역시 불교와 유교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인물들이 도선의 입당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되어 마땅하다.
1.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길(문화재청) 도선의 국사 추증 교서와 비문은 모두 국왕(의종)의 명에 따라 도선을 높이자는 의도 아래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가능한 도선에 관한 모든 자료를 이용했을 것이며, 특히 그를 높이는 기록을 빠뜨렸을 것 같지 않다. 그러한 기록에서 도선의 입당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도선의 입당에 관한 기왕의 견해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도선의 입당(入唐) 일행사사(一行師事)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도선이 입당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라말 여초에는 승려로서 입당하지 않고 국내에서 수학하여 전법을 사자상승한 승려도 적지 않다. 이들 승려를 표로 정리해 보면 <표2>와 같다. <표2> [나말려초 국내 수학 전법한 선종승려]
위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라말여초에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았으면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뛰어난 고승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도선 역시 입당하지 않았으면서도 고승으로 명성을 떨쳤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도선이 광양 백계산 옥룡사를 중심으로 전남의 동부지역 여러 곳에 사찰을 세우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도선을 궁궐로 초청하여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그가 72세(898년)로 입적하자, 당시 국왕 효공왕이 왕명으로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4. 맺음말 이제까지 도선(道詵)의 입당(入唐) 여부(與否)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도선의 입당은 도선(道詵, 827-898)과 일행(一行, 683-727)의 생몰연대 차이를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도선이 입당하여 일행(一行)에게 직접 사사(師事)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을 가능성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중국에 유학(遊學)한 선종승려들의 일반적인 수학행태(修學行態)나 사자관계(師資關係)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렇게 이해했다. 도선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며 확실한 기록인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와 옥룡사선각국사증성혜증탑비(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에 그의 입당(入唐) 사실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도 그의 입당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입증(立證)해 준다. 도선의 입당·일행사사설(入唐·一行師事說)은 고려중기 숙종대(肅宗代) 김위제(金謂磾)가, 의종대(毅宗代) 김관의(金寬毅)가 주장한 것이었다. 김위제는 숙종에게 남경천도를 건의하였다. 숙종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숙종은 문신들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한 방도로 김위제로 하여금 남경천도를 주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김위제는 이러한 숙종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이어 받았고, 도선은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일행에게 전수받았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김위제가 도선이 일행의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았다고 하는 도선을 높이어 남경천도를 합리화 시키고자 함이었다. 숙종이 도선을 높이기 위해 대선사에서 왕사로 추봉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한편, 의종대(毅宗代)의 김관의(金寬毅)도 도선입당(道詵 入唐)·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또『편년통록(編年通錄)』을 저술한 인물이기도 하다.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유교보다는 불교, 풍수지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편찬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은 의종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김관의(金寬毅)는 불교와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왕건의 가계를 윤색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관의(金寬毅) 역시 도선입당(道詵入唐)·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주장함으로써 도선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높이기 위해 입당(入唐)·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주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종도 도선을 높이어 왕건의 탄생과 고려로의 통일을 예언하고 고려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옥룡사선각국사증성혜등탑비(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를 최유청에게 짓도록 했던 것이다. 결국 도선의 입당설(入唐說)은 도선을 높이기 위해 고려중기 이후 후대인들이 조작한 것이었다. 도선을 높이는 것은 그와 연결된 고려왕실(高麗王室)을 높이는 것이기에 도선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그의 입당설(入唐說)을 유포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1) 『고려사』 98 열전 11 제신 최기우전, 『고려사』 122 열전 35 환자 정함전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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