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이야기] 옛 도읍의 가을 빛 게시기간 : 2021-11-1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1-09 10:0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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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폭짜리 병풍에 가을이 가득 담겨 있다. 소송 김정현의 <고도추색>이다. 옛 도읍의 가을 빛. 옛 도읍은 부여를 가리킨다. 백제의 마지막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김정현은 1954년 가을 부여에 와서 이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관지에 “고도추색 갑오추일부여낙화암소견 소송화(古都秋色 甲午秋日扶餘落花岩所見 小松畵)”라 썼다. 소송 김정현 이 그림을 그린 소송 김정현(小松 金正炫, 1915-1976)은 전남 영암출신의 한국화가이다. 16세에 광주로 가서 허백련 문하에 들어가 그림수업을 받았다. 1938년에 연진회가 창립될 때 회원으로 참여하며 전통화풍을 익혔다. 김정현은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석절장(石切場)>을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3년 <기영(機影)>과 1944년 <맥청(麥靑)>까지 세 번 연달아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때 그린 작품들은 현재 조선미술전람회도록이 전해지지 않아 양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사생이 주가 되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김정현은 광주와 목포를 오가며 남농 허건의 화실에 자주 출입하면서 허건, 허림 형제와 교유하였고, 화풍상으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허건의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18-1942)과 함께 도쿄의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1909-1945]에 입학하여 일본화의 채색화풍을 배웠다. 이 시기 김정현은 서양화적 사실미와 일본화의 안료에 채색을 가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가운데 <귀로-보리밭>은 화면 전체에 호분으로 바탕을 칠해 탁하면서도 부드러운 색감을 보여준다(그림 2). 특히 보리를 화면에 도드라진 점으로 표현한 것은 일반적인 동양화의 채색화와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마치 유화와 비슷한 마티에르 효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그림 2-1).1)
그림 2 김정현, <귀로-보리밭>,
그림 2-1 김정현, <귀로-보리밭>, 해방 후에 김정현은 1946년부터 목포여자중학교 미술교사를 하면서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기 전까지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꾸준히 허백련을 찾아가 전통화를 배웠으나 당시 광주전통화단의 동향과는 달리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산수화를 실제로 그리지는 않았다. 대신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실경을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그렸다. <고도추색>도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김정현은 활동기반을 서울로 옮겼으며 이후 백양회(白陽會)에 참여하는 등 근현대 한국화단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2) 1) 김소영, 「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호남문화연구』67(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원, 2020), pp. 216-217.
2) 백양회는 1957년 결성되어 1978년까지 활동한 현대 한국화 단체이다. 1950년대 미술계에서 한국화가들의 모임으로는 유일한 단체로,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동양화부의 심사위원 구성과 운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동안 문제를 제기했던 후소회 계열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백양회를 결성했다. 백양회 회원들은 국전과 달리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당시 서양화단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던 현대미술운동에도 호응하며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나가고자 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양회(白陽會). 꿈꾸는 백마강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울울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꿈꾸는 백마강’이라는 노래가 있다. 일제강점기, 1940년 가수 이인권(1919-1973)이 불렀던 노래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흥망을 서사적으로 읊은 이 곡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발매금지 조치를 내렸고, 작사가였던 조명암이 광복 후 월북하면서 또다시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1954년에 가수 허민(1929-1974)이 부른 ‘백마강’도 백마강 고요한 달밤 고란사 종소리를 그리워하며, 달빛 어린 낙화암과 삼천궁녀들, 계백장군과 황산벌 전투를 노래한다. 이들 노래는 이후 많은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려졌으며, 백마강과 흘러간 옛 왕조의 아린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 1 부소산 낙화암,
사진 2 부여 낙화암 전경, 『삼국유사』에는 백마강 낙화암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3) 3) 일연, 『삼국유사』권1, 太宗春秋公條,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어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낙화암은 나중에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해 붙인 이름으로 추정한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그 아래에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이곳 낙화암과 백마강의 부여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시대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이 남긴 <고란사도(皐蘭寺圖)>를 비롯해,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삼의당 및 나루터를 배경으로 그린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의 <임천고암(林川鼓岩)> 등이 전해져 온다. 근현대에도 청전 이상범, 고암 이응노를 비롯해 남농 허건 등 많은 화가들이 백마강 낙화암을 화폭에 남기고 있다. 김정현은 누구보다 이곳의 풍경을 즐겨 그렸는데 <고도추색>과 대를 이루는 봄의 정경을 그린 <고도춘색(古都春色)>이 부국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다 간략한 필치로 낙화암과 백마강을 그린 작품이 1950-60년대 많이 제작되었다. 전통화법 위에 이룩한 개성 <고도추색>은 두 폭으로 나누어진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도(古都) 부여의 백마강변과 부소산 고란사와 낙화암을 한 화면에 담아낸 그림이다(그림 1). 화면 중앙에 부소산을 우뚝 그리고 산 중턱에 고란사를, 산꼭대기에 백화정을 그렸다(그림 1-1, 1-2). 화면 오른편으로 나룻배 두 척이 백마강을 따라 유유히 유람한다(그림 1-3). 가을나무와 바위, 수풀에 둘러싸인 고란사와 백화정은 무르익은 가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
그림 1-2 낙화암 부분
그림 1-3 나룻배 부분 김정현은 이 작품에서 필치의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감각적인 느낌으로 표현했다. 점을 변형한 태점과 파필로 그은 선으로 바위와 산의 전체적인 괴량감을 표현하면서 형태적 특성을 따라 독특한 붓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나무의 표현도 굵고 거친 수묵의 선과 점으로 그려냈다. 나무줄기나 가지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터치가 절충되었다. 다채로운 붉은 색의 나뭇잎 표현은 수채화적인 붓놀림을 보여준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가 독학으로 유화와 수채화를 공부하고 거기에 전통화법과, 유학하면서 습득했던 다양한 회화방법들에 새로운 감성이 더해져 김정현만의 개성적인 면모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정현은 현실적 시각의 향토적 실경을 전통적 수묵과 채색으로 다양하게 다루었다. 한국의 구석구석을 사생하며 고적(古蹟)과 명승을 소재로 삼아 거기에 현대적인 풍물을 같이 담아내기도 했다. 특별히 전통적인 준법을 구사하지 않고 소재에 맞추어 자유롭게 표현한 김정현의 화풍은 굵은 필선과 색채의 사용, 소재의 폭넓음, 다양한 표현법 등으로 개성적이면서도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림 3 김정현, <녹음-추>, 1960년대 이후 김정현은 전통 남종화를 현대적으로 변화시키며 붓과 먹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면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시도해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그림 3). 먹의 번지는 효과나 담채와 농묵(濃墨)을 통해 추상화로의 변모를 꾀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입선을 하며 이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그는 상명여자 사범대학교와 성신여자사범대학교 등에서 후진을 지도하였다. 김정현의 작품들은 독특한 현대적 표현의 자연경을 추구하였다고 평가되며, 전통적인 화조화도 즐겨 그린 소재로,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김소영, 「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호남문화연구』67(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원, 2020), pp. 187-224.
한국미술협회 광주광역시지회․전라남도지회 편, 『광주․전남 근현대미술총서』Ⅰ, 광주미협․전남미협, 2007.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 의재 허백련』, 국립광주박물관, 2015.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13』, 금성출판사, 1990. http://www.heritage.go.kr/ http://www.mmca.go.kr/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교육혁신본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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