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옛글의 중요성을 알다 게시기간 : 2021-11-1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1-17 11:2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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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우리 선조가 쓴 한자의 작품은 중국어인가? 조선어인가? 필자가 공직 근무 중에 전라남도 국제업무만 10년을 담당하면서 1992년 한·중간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자, 지방차원에서 중국지방정부와의 교류 문호 개척을 타진하고자 1993년 7월경에 상해와 절강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공식 업무는 교류문호 타진인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금남 최부(崔溥)의 저서 『표해록(漂海錄)』 복사본을 지참하여 갔다. 그리고 절강성 외사판공실 부주임이 상해 복단대(復旦大) 사학과 출신이라기에 『표해록』을 건네주고 해석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부주임이 『표해록』을 일별해 보고,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 이유는 표해록은 비록 한자로 써져 있지만 중국어 문장이 아니고, 한국어 문장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문의 어순이 영어와 같다고 여겨 도치(倒置)해석을 하다가 엉터리 해석이 되는 사례가 많다. 왕실에서 사관은 임금이 하는 말을 곧바로 받아썼다. 이때 임금이 뱉어내는 소리글을 사관은 뜻글자 한자로 받아썼다. 고로 우리 선조가 쓴 한문 글은 소리글 어순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정몽주의 단심가를 보면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죽어/一百番 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의 우리말 소리글과 한문의 글의 어순이 거의 같다. 소리글을 모두 한자로 바꾸어 쓸 수 없는 경우도 있다. 1797년 4월에 정조 대왕이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서찰에 소리글을 한문으로 쓸 수 없어 한자로 쓰다가 중간에 ‘뒤쥭박쥭’이란 글을 썼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가 입에서 뱉은 말은 소리글인 우리말로 하지만 쓰기는 뜻글자인 한문으로 썼다는 점을 알아야 한문문리를 터득케 되고 한문고전 번역에 입문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례2> 사찬(私撰)의 작품은 관찬(官撰)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다. 옛 선조의 사찬은 대부분 유고(遺稿), 유집(遺集), 시고(詩稿), 사고(私稿)등의 이름으로 간행되거나 필사본으로 전해 왔다. 그 문집 내용을 살펴보면 시(詩), 서(書), 기(記), 문(文), 서(序), 명(銘), 발(跋)등의 형식으로 편차되어 있다. 첫 번째 시(詩)는 자신의 일상생활, 당시의 시국을 빗대어 시로 썼다. 그러므로 시각에 따라서는 영사시(詠史詩)가 되어, 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894년 나주목사 민종열은 동학농민군의 나주 침공에 따라 일곱 번 싸워 나주를 방어해 내고, 1895년 서성문에서 승전연회를 하였다, 이때 민(閔)목사가 기쁨의 시를 지으니 참석자들이 차운시를 지었다. 이병수의 『겸산유고(謙山遺稿)』, 나동륜의 『하촌유고(荷村遺稿)』, 양상형의 『백하유고(栢下遺稿)』, 나영집의 『소백유고(小栢遺稿)』 등에 차운 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곧 서성문 승전연회에 참석하여 지었기에 당시 나주 역사를 반증해 주었다. 두 번째, 서(書)는 곧 서찰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이지만 그중에 당시 역사를 짐작하는 내용이 기록 되었다면 일종에 사서(史書)라 할 수 있다. 그 사례를 한 가지만 들어 보자. 충무공 이순신은 1593년 7월 16일자로 사헌부 현(玄)지평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여기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이 나온다. 스쳐지나가는 개인 간 서찰 내용이지만 당시 전투상황을 짐작케 하고, 아울러 이 한마디로 호남인은 얼마나 긍지감을 가지고 있는가. 사찬의 글은 관찬의 부족을 보충해 주지만 타 사찬의 부족도 보완해 준다. 예를 들어, 이병수의 『금성정의록』에 보면, 함평으로 진출한 전봉준이 민종열 목사에게 서신을 보내자, 민목사는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법에 마땅히 죽이도록 되어 있고,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은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無名之兵在法當戮, 不道之言非所願聞〕”라고 16글자를 서찰 뒷면에 써서 전봉준의 요구 사항을 물리쳤다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전봉준의 서찰 원문은 수록해 놓지 않아서, 전봉준이 쓴 편지 원문이 매우 궁금하였다. 그런데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전봉준이 나주목사에게 보냈다는 서찰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고로 우리 지방사를 이해하려면 동시대 인물이 남긴 문집을 모두 섭렵해야 한다. 동학 농민운동 관련하여 『금성정의록』뿐만 아니라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文)』, 변만기의 『봉남일기(鳳南日記)』, 기우만의 『갑오토평비』, 박기현의 『일사(日史)』, 김훈의 『동해집(東海集)』, 김낙봉의 『김낙봉이력(金洛鳳履歷)』, 김낙철의 『김낙철역사(金洛喆歷史)』 등을 섭렵하고 크로스 체크해야 지방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례3>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문장가들이 왜 항일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필자는 사찬의 문집을 상당히 많이 번역해 보았다. 그중에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문장가들이 피식민지로 살았던 아픈 그 당시 실상을 전혀 글로 쓰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문장가 편무경(片茂景,1893∼1965)은 살아생전에 고종황제 장례 때에 대한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고문을 받았고, 독립자금도 모아 만주로 보내기도 하였지만 그의 저서 덕포유고(德圃遺稿)에는 그와 관련한 시문 등 문학작품이 전혀 없다. 문장가 위석규(魏錫奎,1883∼1913)는 사후에 독립운동 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는데, 막상 그의 저서 덕암유고(德菴遺稿)에는 항일이나 반일의 문학작품이 없다. 문장가 정희면(鄭熙冕,1867∼1944)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아픈 시대를 살았음에도 그의 저서 『국사유고(菊史遺稿)』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사연을 문집에 남기지 않았다. 이처럼 거의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문장가들이 왜 일본을 거부하는 문학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은 『경와사고(敬窩私稿)』의 저자 엄명섭(嚴命涉,1906∼2003)의 연보에서 찾아냈다. 엄선생의 연보에 보면 1942년 엄선생 38세 때 시습재(詩習齋)에서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경찰서에 호출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 짧은 기록 하나 때문에 『경와사고』 6권2책을 샅샅이 살펴 분석해보았다. 선생이 생산한 총 작품 1,309편중에 간지(干支) 표기가 된 840편을 보니 일제강점기 때 작품은 겨우 6편에 불과하였다. 작품의 거개가 1945년 해방이 되고나서 본격적인 문학작품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문장가들 모두 일경(日警)의 감시체제하에서 살았기에 1945년 이전의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의 작품을 쓰지 못하였던 것 같다. <사례4> 옛글은 과거의 흔적이지만 미래의 상품으로 가공할 만하다. 지방자치 시대 지역경제 활성화가 관건이지만 자체 인구 부족은 세수기반 부족과 소비기반 부족으로 더욱 경기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소비인구가 부족한 만큼 외래객이 찾아오도록 하는 방안으로 지역문화축제를 개최하지만 이것도 한시적이어서 실효성이 매우 낮다. 그래서 연중 찾아오는 문화 개발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 화순 출신 양재경(梁在慶)의 『희암유고(希庵遺稿)』에 보면 1909년(고종46) 4월에 “망일봉(望日峰) 석벽에 ‘永曆江山大明日月箕子古邦先王遺民’”라는 글을 크게 새기다“라 하였다. 이 글을 풀이해 보면 「이 땅은 영력(永曆/청나라 1648-1661대 연호)의 강과 산이요 대 명(明)나라의 해와 달이요,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나는 선왕의 유지를 받든 망해 없어지는 나라의 백성이로다.」란 뜻이다. 양재경은 이미 1909년 이미 나라가 망했음을 간파하고 한(恨)의 소리를 위와 같이 바위에 각자(刻字)하였다. 또한 1910년 9월에 “月山立巖에 ‘拜鵑巖望京臺’라고 여섯 글자를 새기다”라 하였다. 배견(拜鵑)은 두견새에게 절한다는 뜻으로, 흔히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는데, 곧 ‘서울의 임금을 바라보는 대(臺)에서 임금을 향해 절을 한다“라는 여섯 글자이다. 희암 양재경은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 월산 입암에서 임금이 계신 북쪽 서울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렸다. 그리고 구한말 시골 은둔의 백성이 나라 잃은 한(恨)의 소리를 화순군 이양면 망일봉과 월산의 바위벽에 글로 새겨 놓았다. 경술국치 즈음에 화순의 선각자가 나라가 없어지는 한(恨)의 소리로 석벽에 새겨놓은 글을 찾고, 길을 개설하면 화순을 파는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될 것 같다. 작게는 화순의 자존심이요 크게는 호남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옛글 속에서 미래 상품으로 개발해 낼 품목을 찾아내면 지역 경제에도 미치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한국학 호남진흥원과 시군 지방학회에서 이러한 일을 개척해야할 것으로 본다. <사례5> 옛글은 한문(漢文)뿐만 아니라 일본어 글도 있다. 필자는 나주지역 향토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인이 만든 일본어판 『南平時代』라는 창간호 복사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남평초등학고 제1회부터 제32회까지 졸업생이 공동으로 만든 기념 앨범으로 1975년도 당시에 아직 살아남은 일본인 졸업생 일본전국 37개 지역 339명의 명단과 졸업기념 사진 그리고 남평초교에 대한 추억을 글을 담았다. 남평초교는 일본인 학생을 위해 1906년도에 남평 관아 터를 허물고 그 자리에 남평초교 건립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韓日竝呑)되기 4년 전에 남평으로 일본에서 이주하여온 일본인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건립한 것이다. 당시 1회 졸업생이 쓴 회고의 글을 보면 ‘1909년(명치42) 일본 전 지역에서 조선이주의 붐이 불었다’고 하였다. 자신은 부모 따라서 일본 고베〔神戶〕에서 배를 타고 목포 부두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영산포까지 와서, 다시 남평으로 들어 왔다고 회상하였다. 그렇다면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반일운동을 하는 농민군을 적(敵)으로 간주하고 최신무기인 ‘개틀링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참하게 학살하고, 그리고 1895년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사실상 조선정부를 장악한 그때부터 일본인의 조선 이주정책을 폈던 것 같다. 일제치하를 겪은 우리는 친일파 인물 파악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과연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일제(日帝)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왜곡되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사하거나 연구한 적이 없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혼을 왜곡하려고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일인(日人) 주관의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를 설치하고 조선의 야사(野史) 59책을 수집하여 소위 일제판 『대동야승(大東野乘)』을 발간하고 조선의 민족혼에 다양한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이 왜곡되었는지, 지역학을 통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국학 호남진흥원의 역할이 중차대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첨부〕 사진 자료 : 총200여점이 있어 그중 발췌 소개
이상으로 옛글 중요성을 대략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였으나. 어찌 이뿐이겠는가? 옛글은 다만 옛날이야기이지만 미래로 나아나가는 암호가 숨겨져 있다. 마치 불경(佛經)이나 성서(聖書)라는 옛글 속에 미래로 가는 암호가 숨겨져 있듯 이 시대를 사는 호남인은 호남인이 써놓은 옛글 속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암호를 찾을 책무가 있다고 본다. 글쓴이 나천수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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