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보성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와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 천영(天英) 게시기간 : 2021-04-2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4-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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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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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와 아도화상(阿度和尙) 보성 대원사 들어가는 입구 가로수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벚꽃 피는 봄철, 벚나무 터널길에 꽃비가 내리는 둣한 환상적인 길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 길 끝나는 즈음에 티벳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가 자리잡고 있다. 천봉산 대원사는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원사를 품고 있는 천봉산(天鳳山)은 해발 609m 산으로 보성· 화순 · 순천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대원사는 503년(백제 무령왕 3)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6세기에 마한 땅이던지, 백제 영토이었을 보성 천봉산에 신라불교의 초전자(初傳者) 아도화상이 대원사를 초창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대원사 홈페이지에 실린 창건연기의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아도화상에게 하룻밤 꿈속에 봉황이 나타나 말하였다.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나거라, 아도! 아도!” 하는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 밖에 봉황이 날개짓 하는 것을 보았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는데 그곳에서 봉황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봉황의 인도로 목숨을 구한 아도화상은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을 헤매다가 마침내 하늘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내고 기뻐 춤 추며 산 이름을 천봉산이라 부르고 대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대원사 창건연기설화는 원래의 사실이 그대로 전해지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후대에 구전(口傳)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탈락되기도 하고, 추가되는 것이 설화의 일반적속성이기 때문이다. 아도창건설을 내세우며 사찰의 입지 선정에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럴듯하게 꾸며진 설화로 이해하여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찰창건 연기설화를 보다 단단하게 확인시켜주는 공간이 있어 주목된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개산조사(開山祖師)를 모시는 공간으로 아도영각(阿道影閣)이 극락전 우측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안에 아도대화상(阿度大和尙)의 진영(眞影; 초상화)이 봉안되어 있다. 사찰에서 방위의 기준은 주불전(主佛殿) 불상이 기준이기 때문에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의 우측에 아도화상을 모신 아도영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야 한다.
조선후기에 아르면 아도화상을 창건주로 내세우며 사찰의 창건연대를 위로 올리는 새로운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순천 조계산 선암사의 경우가 그러하다. 선암사 창건주를 18세기 초까지 선각도선(先覺道詵, 827-898)으로 기록해 오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아도화상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사찰의 창건연대가 신라하대 9세기에서 삼국시대 6세기로 올라가게 되고 새삼스럽게 아도를 중시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천봉산 대원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로 아도화상을 내세우는 경우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나만이 가지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2. 고려후기 수선사(修禪社) 제5세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 천영(天英) 개산조당(開山祖堂) 아도영각(阿道影閣) 앞에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 부도(승탑)가 있다. 문화재 명칭은 대원사자진국사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이다.
이중(二重)의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 위에 소판팔엽(素瓣八葉)의 복련(伏蓮)이 덮여 있으며, 그 밑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이룬 대석(臺石)에 두 줄의 선각(線刻)을 돌리고 그 속에 안상(眠象)이 아닌 사각형의 띠를 돌렸다. 그 위로는 탑의 전체적인 균형 때문인지 아니면 중간에 유실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중대석(中臺石)을 소실한 채 바로 앙련좌대석(仰蓮坐臺石)을 올렸다. 탑신 역시 팔각으로 전면에는 「慈眞圓悟國師淸照塔」이라 음각으로 명기되었으며 그 후면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통식(通式)의 탑신에 비해 높고 세장(細長)한 편으로 신라하대에 대두된 8각원당형 부도의 섬세함이나 특출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은 나타나지 않으며 또 석질이 달라 후보(後補)한 듯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은 좁고 두꺼운 팔각으로 처마 밑은 수평인데 그 안에 몇 줄의 원형음각의 띠를 돌렸다. 또한 옥상(屋上)은 기왓골이 있고 경사가 급하며 우동(隅棟)을 내려와 전각(轉角)에서 밋밋한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로 구형석재 두 개가 보주(寶珠)로 올려져 있는데 이것도 뒤에 후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자진원오국사야말로 대원사의 사격(寺格)를 짐작할 수 있는 고려후기 송광사의 큰스님이다. 그는 법휘(法諱; 불교 이름)가 천영(天英, 1215-1286, 고종 2- 충렬왕 12)으로 고려후기 조계산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5세로서 송광사는 물론 당시 고려사회를 이끌었던 최씨 무인정권 집정자(執政者)들과 연결된 영향력이 막강한 승려였다. 그는 속성(俗姓)이 양씨(梁氏), 호는 충경(冲鏡). 남원을 본관으로 한 택춘(宅椿)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자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1230년(고종 17) 수선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 1178-1234) 밑에서 득도하였다. 3년 뒤에는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임하여 좌원(座元)이 되었으며, 1236년 선선(禪選)의 중상상과(中上上科)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수선사(修禪社) 제3세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 ?-1252)의 교화를 받고, 나아가 제4세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混元, 1191-1271)을 스승으로 삼았다. 1246년 주국(柱國) 최우(崔瑀)가 선원사(禪源社)를 만들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하여 최우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뒤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단속사(斷俗寺)에 있을 때인 1249년 최우가 창건한 창복사(昌福寺)의 주맹(主盟)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선원사의 법주(法主)가 됨과 함께 보제사(普濟寺)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주맹이 되었다. 1256년 조계산 수선사의 제5세가 되어 입적 직전까지 이곳에서 보내며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조계산에 주석하는 동안 고려왕실에서는 고종·원종·충렬왕 등 세 임금이 교체되었으나, 왕실에서의 그에 대한 존경은 변함이 없었다. 충렬왕은 서울로 초빙하여 가까이 모시고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였다. 언제나 너그럽고 두터운 자애(慈愛)로써 도제들을 교육하였으므로, 종실(宗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문하에 모여 들었다. 1286년(충렬왕 12) 2월에는 청을 받아 그가 일찍이 중창하였던 불대사(佛臺寺)에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충렬왕은 자진원오(慈眞圓悟)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또 그 해 왕명으로 이익배(李益培)가 찬(撰)하고, 문인 굉묵(宏默)이 글씨를 쓴 비가 고흥 불대사(佛臺寺)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만 전할 뿐 비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제자에는 굉묵(宏默)·충지(冲止)·명우(明友)·굉소(宏紹)·신화(神化)·신정(神定)·만항(萬恒) 등 이름 높은 자들이 많았다. 충지는 그의 뒤를 이어 조계산의 제6세가 되었고, 또 만항은 제10세로 활동하였던 인물이며, 명우는 그의 행록을 찬하였다. 천영이 55세 때 대원사를 크게 중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참선수행과 정토신앙을 함께하는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근본도량으로 사세(寺勢)를 넓히었다. 이 시기에 산의 명칭이 중봉산에서 천봉산으로, 절의 이름도 죽원사에서 대원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때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대원사에서 판각하여 참선교재로 널리 사용했으나 여순항쟁의 여파로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전각과 함께 불타고 말았다. 대원사판 『禪門拈訟』의 판각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선문염송은 고려후기 수선사 제2세 진각혜심(眞覺惠諶)이 선종의 화두 1,125칙에 염과 찬송을 붙인 불교서로 공안집이다. 30권 목판본으로, 저자는 문인 진훈(眞訓)과 함께 선문공안 1,125칙(則)을 불경 또는 조사(祖師)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 염(拈)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내용은 제1권에는 석가모니불에 대한 30가지 화제를 수록하였고, 제2권에는 석가모니 직계제자들의 화제 41개를 수록하였다. 제3권에는 여러 불경에 실린 화제와 조사에 대한 화제 32개를 수록하였고, 제4권에는 제6조 혜능(慧能)부터 혜충국사(慧忠國師)까지의 화제 33개를 수록하였다. 제5권부터는 중국 선종의 오종칠가(五宗七家)의 고승들이 남긴 법문 가운데 화제가 될 만한 것들을 모으고, 그 화제 밑에 염·송·법어 등을 채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책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선문의 기본학습서로 채택되어 선종의 승려들은 반드시 이를 공부하였고, 선종선(禪宗選)에서도 이 책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점검하도록 되어 있었다. 초간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몽고의 전란으로 초판이 불탄 뒤 1244년(고종 31)에 대장도감(大藏都監)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 개판하였다. 그런데 이 때 새로이 347칙을 더하여 1,472칙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판되어 현재는 1568년(선조 1)의 법흥산 법흥사(法興寺) 간행본과 1634년(인조 12)의 수청산 용복사판(龍腹寺板), 1636년의 천봉산 대원사(大原寺) 개판본, 1682년의 대원사 간행본, 1707년(숙종 33)의 팔영산 능가사판(楞伽寺板) 등이 있다. 이 책에 대한 우리나라 고승의 주석서로는 각운(覺雲)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30권, 일연(一然)의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유일(有一)의 『선문염송간병(禪門拈頌看柄)』 1권, 의첨(義沾)의 『선문염송기(禪門拈頌記)』 1권, 긍선(亘璇)의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5권 등이 저술되었다. 고려후기에 자진원오국사 천영이 대원사에 주석하여 선정쌍수(禪定雙修)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삼으면서 사찰의 면모가 새롭게 되었다. 그는 진각혜심의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바탕을 둔 간화선(看話禪)을 고양(高揚)한 선승(禪僧)이었다. 고려후기의 불교 수행전통을 계승한 대원사는 조선후기 1636년에도 천봉산 대원사 개판본으로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대원사는 조선후기 1759년(영조 35)에 이르러 현정선사(玄淨(禪師)의 발원으로 불사를 일으켜 극락전, 지장전, 나한전, 천불전, 사천왕문, 봉서루, 토성각, 선원을 지었으며, 상원암, 불출암, 호적암 등 12개 암자를 지닌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1948-50년대에 여순항쟁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대원사는 극락전과 석조물 몇 점만 남기고 모두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990년 당시 주지 현장스님(현 대원사 주지로 재취임)을 중심으로 대원사 복원불사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후에 선원, 요사, 일주문 등을 중심으로 복원이 시작되어 사찰의 면모가 크게 일신되었다. 1993-1994년 이후 매년 2회씩 태아령을 천도 봉행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김지장전을 건립하는 등 전통불교가 아닌, 외래적 요소를 수용해 새로운 불교적 모색을 하며 활로를 찾고 있다. 박물관과 템플스테이관을 활용해 일반 대중들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러나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의 말사인 천봉산 대원사가 한국불교의 전통적 수행인 선정쌍수(禪定雙修에 바탕을 두면서 팬데믹 이후의 미래사회를 여는 대전환의 전진기지가 되기를 염원하는 수행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염원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최씨무인정권의 몰락과 원 간섭기 이어지는 격동기를 수행자로서 살아간 대원사 자진원오국사 천영 큰스님의 부도야말로 불교문화유산으로서만이 아닌 대안적(代案的) 문화컨텐츠로서 그 빛을 새롭게 발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은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 사진을 인용했음)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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