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기억] 삼벽(三僻)에 가로막힌 호남의 천재, 존재 위백규(魏伯珪) 게시기간 : 2021-05-1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5-10 15: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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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랜 얘기가 돼버렸지만, ‘서울제국과 지방식민지’, ‘지방은 식민지다‘, 수도권의 번영과 비수도권의 사막화’ 등의 표현들이 상징하듯이 지금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너무 커져서, 그 차이가 지방은 물론, 중앙조차도 지속적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서울과 지방의 간격은 언제부터 벌어지기 시작했을까? 그 연원을 찾아 가면 18세기로까지 올라간다. 어떤 계기로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지방 중에 호남은 또 어땠을까? 이를 조선후기 호남지식인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호남의 천재 실학자 조선후기의 실학은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호남실학은 반계 유형원으로부터 연원하였고, 18세기 중엽부터는 장흥의 위백규를 비롯하여 나주 출신의 나경적(羅景績, 1690∼1762)1),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1712∼1781),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 화순의 하백원((河百源, 1781∼1844) 등이 이를 이끌어 갔다. 그중에서 위백규는 신경준, 황윤석과 함께 ‘호남 삼천재’라고 일컬어지는 탁월한 실학자였다.2) 위백규의 자는 자화(子華)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어려서부터 천문(天文)·지리·율력(律曆)·복서(卜筮)·병법(兵法)·산학(算學)과 같은 부류를 널리 공부하였다. 온갖 장인(匠人)의 기예도 모두 눈으로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터득하였으며, 직접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했는데 도수(度數)가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를 스승으로 삼아 “학문적 성취가 높고 깊어졌으며 경륜을 갖춘 재능을 겸하여 범위가 성대하니, 진실로 세상에 필요한 재능과 유용한 학문을 지녔다”고 하였다.3) 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가 『존재집(存齋集)』 서문에서 “호남 산천은 기세가 빼어나고 경치가 아름다우니 어질고 특출한 인재들이 그곳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학술로 이름난 분들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ㆍ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손재(遜齋) 박광일(朴光日)ㆍ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이 으뜸이다. 네 분의 현철을 뒤이어 일어선 분은 존재(存齋) 위공(魏公)이다.”4)
라 하듯이 “그 명성이 호남을 경도[聲譽傾一路]” 시킨 인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같은 글에서 임헌회는 “크고 깊은 산속에 울퉁불퉁 우뚝 솟고 영험하게 생겨 귀신들이 수호하는 백 년 된 오랜 나무가 있어서, 궁현(宮懸)이나 천구(天球)의 받침대가 될 수 있는데 해곡(嶰谷)의 사신을 만나지 못하여 단지 절벽의 바람과 협곡의 비를 노래하듯 용트림하고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 아, 나무가 진정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대소가 있단 말인가.”5)
라 하였다. 이는 존재가 자신의 처지를 “해곡을 만나지 못한 채 버려진 백년 된 오랜 나무”에 빗대어 한탄한 말을6) 고산이 인용하여 쓴 글로, 끝내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만 존재의 처지를 위로하였다. 호남의 천재라 불리며 손꼽혔던 존재조차도 이렇듯 빛을 못 본 채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고질화된 서울과 지방의 차별 때문이었다. 그 차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정조 임금과의 늦은 만남 천재라 불리던 위백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가려서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이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조를 만나 잠시 드러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보자. 1794년(정조 18), 호남 연해 지역에 해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각신 서영보(徐榮輔)를 위유사(慰諭使)로 보냈다. 이때 서영보는 “위백규는 경전(經典)을 널리 통하고 종족(宗族)을 두루 잘 보살펴서 사람들에게 흠모하며 감탄하도록 하였으나 나이 70살이 되도록 숨겨지고 드러나도록 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유사(有司)의 과실”7)이라 하여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받아 동부승지 채홍원(蔡弘遠)이 다시 수용할 것을 청하여 윤허하였다.8) 그리고 1795년(정조 19) 11월, 우승지 임제원(林濟遠)이 성정각(誠正閣)에서 정조와 대화를 나누는 중, 정조가 “호남에 또한 가히 쓸만한 사람이 있는가?”라 묻자, 제원이 답하기를, “… 근래 인재가 텅 비어버림이 호남보다 심한 곳이 없습니다. 그 중 장흥의 위백규는 평소에 박식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으며 그가 지은 『환영지(環瀛志』와 백 권의 책들은 볼만한 것이 많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런 사람은 나라에서 도읍(道邑)의 천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뽑아서 관직을 내려야 하는데 과연 물망(物望)에 가히 부합하는가?” 하니 제원이 다시 답하기를 “백규의 해박함은 또한 소수중(蘇洙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경준·양주익(梁周翊) 모두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승선(承宣, 승정원에 두었던 정3품 관직)의 직을 내린다 해도 족히 감당할 것입니다” 라 하여 위백규를 극찬하며 적극 추천하였다.9) 이에 구전(口傳)으로 군직(軍職)을 내리도록 하였다. 또 『환영지』와 백 권의 책을 내각(內閣)에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부사용(副司勇)의 관직을 제수하였다.10) 그리고 그가 저술한 백 권에 가까운 책들 중 절반이 이렇듯 정조의 명에 따라 규장각으로 보내졌다.11) 그리고 마침내 1796년(정조 20) 그의 나이 70세 되던 해에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고,12) 사은숙배(謝恩肅拜)하기 위해 입대하여 정조 임금을 만날 수 있었다. 이는 “숨어 있는 자를 찾아 추천하여 초야에 빠뜨린 현인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조정에 바라는 바이다”라 하는 정조의 뜻이 반영되어 늦게나마 임금의 지우(知遇)를 만나 얻은 기회였다, 3월 6일 정조를 만나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정조가 말하기를 "지난번 『환영지』 한 책을 보았는데 역시 박식함을 증험할 수 있었다. 나이가 이미 노쇠하니 비록 객지에 와서 벼슬하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우나,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에 대해서 평소 마음에 강구한 바가 있으면 모름지기 연석에서 물러난 후 한 통의 문자로 써서 올리라."
하고, 인하여 호조에 명하여 필찰(筆札)을 주게 하였다.13) 이에 그 다음 날 만언봉사소(萬言封事疏)를 올렸고,14) 3월 8일자로 옥과현감을 제수하였다. 이렇듯 뒤늦게 정조의 눈에 띄어 고을 수령을 맡기도 하였지만, 위백규는 여전히 “세상물정에 어두운 선비[迂儒]”, ‘초야의 선비[草野之士]’였을 뿐이다. 정조와 대면해서도 위백규는 스스로를 우유(迂儒)라 하였고, 궁벽한 바닷가에 사는 비루한 선비[僻海陋儒]라 하여 스스로를 낮췄다. 임헌회가 “만년에 자신의 포부를 끝까지 펼치지 못하고, 대략의 행적이 관직을 잘 수행했던 관리로만 머물렀으니, 이 역시 천고에 남을 뜻있는 선비의 한이라고 하겠다.”15)
라 하듯 끝내 큰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 후 순조대에 들어서서 전라좌도 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이 별단에서 “근세 이래 삼반(三班)의 사적(仕籍)에 들어간 호남 선비가 매우 드물고, 호남 지역 선비의 추세(趨勢)가 점점 낮아졌다. 그리하여 뛰어난 재주와 학문을 지닌 이가 선발되지 못해 출사할 길이 없고, 명문가와 벌열가의 자제는 자포자기를 달게 여기고 있어 이를 답답하게 여긴 여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라 하여 호남 차별을 거론한 다음, “선조(先朝, 즉 정조) 때의 고(故) 익찬(翊贊) 신(臣) 황윤석(黃胤錫)은 학행이 매우 깊었고, 고 참봉 신 이복원(李馥遠)은 지조와 행실이 곧고 반듯했으며, 고 현감 신 위백규는 학식이 깊고 넓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경전을 연구하고 몸을 수양했던 선비였으며, 학업에 사승의 연원이 있고 온 고장의 모범이 되어 엄연히 당시 도내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先朝)께서 인재를 잘 알아보시는 명철한 지혜로 특별히 장려하고 발탁하여 지금까지 영광스럽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16)
라 하여 호남의 대표적 인재로 황윤석, 이복원과 함께 역시 위백규를 꼽았다. 위백규의 학문은 백과전서적 박학과 농촌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사회개혁론에서 정채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촌의 현실체험을 통해 독자적인 경세론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서울과 지방의 나눔, 구별짓기 이렇듯 추앙받던 위백규조차도 발탁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고,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인재가 등용되지 못한 것은 존재 개인 탓은 아니었다. 당시 지방에 대한 차별이 구조화되어 있던 결과였다. 17세기까지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 현격해졌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성장한 중앙집권적 지배력은 점차 패권주의로 흘렀다. 노론 일당전제정치, 경향분기(京鄕分岐)와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출현 등으로 중앙 지배층은 벌열화하였다.17) 이에 따라 지방세력이 출신지역을 근거지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통로는 사실상 막혔다. 이들은 지방의 향유(鄕儒)로 전락하였다. 19세기로 가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서울 및 경기지역에 거주하는 몇몇 유력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었고, 중앙과 지방, 양자의 소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중인 지식인이었던 최성환(崔瑆煥)은 『고문비략(顧問備略)』(1858년)에서 수치를 활용한 점층법으로 그 격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8) “오늘날 선비를 구하는 지역은 천 리도 되지 않는다. 팔도 안에서 애초 대관(大官)으로 등용되지 않는 서북 3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5도의 인사 중에서도 대관으로 등용되는 사람은 없다. 혹 한둘 두드러진 이들이 있다 해도 그 지역에 흘러가 사는 경화사족일 뿐이니 그 지방의 인사가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등용되는 이들은 오직 경기도 한 도의 인재이다. 하지만 경기도조차도 모두 등용되지 않는다. 오직 서울 5부 안에나 해당하니 천리의 땅을 통틀어 300분의 1이다. 그러나 300분의 1조차도 모두 등용되지 않으니 오직 대대로 벼슬한 사대부에나 해당할 뿐이다. 대대로 벼슬한 사대부 중에서도 오직 귀족 대성(大姓)들만 [등용이] 해당된다. 그렇다면 그 300분의 1 중에서도 겨우 100분의 1이나 1,000분의1에 해당될 따름이다. 천 리의 땅에서 인재를 구하는 지역은 1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표현을 빌자면 심지어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사는 땅이 다르고, 같은 땅에 살지만 사는 사람이 다르고, 사람이 같지만 시대가 다른 시대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을까?” 라 할 정도였다.19) 지역의 격차, 부와 기회의 격차, 지식의 격차 등이 가속화한 결과는 차별의 일상화였고, 그 결과는 기존 체제의 붕괴였음을 지금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호남은 더 어려워 흥덕(현 고창) 출신의 실학자로 호남실학의 기수로 불리던 황윤석도 지방에 대한 편견, 지방 출신 인사를 배제하는 세태에서 예외가 되기 어려웠다. ‘立賢無方[현인(賢人)을 세울 때는 출신에 구애받지 않는다]’은 낡은 책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구호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지방 선비들은 이제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단에서뿐만 아니라 초임직(初任職) 명단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경향분리 만큼이나 문제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배제되는 지방 선비들 가운데 호남 선비들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었다. 황윤석은 삼남 안에서조차 현저한 차이가 생기는 현상을 주목했다. 특히 삼남 출신 선비의 청현직 진출 사례를 놓고 보면, 충청이 가장 활발하고 영남은 쇠퇴했으며, 호남은 가장 쇠퇴했다는 것이다.20) 향암(鄕闇), 시골뜨기라니? 경향분기로 인해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향암(鄕闇, 鄕暗)’이란 말도 나온다. ‘향암’이란 우리 말로 ‘시골뜨기’ 정도에 해당한다. 반면에 겉치레만 잘하는 서울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경화인(京華人)’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21) ‘향(鄕)’이란 글자에 ‘어두움, 우매함’을 뜻하는 암(闇)·암(暗)이 결합하였는데, 이는 화려할 화(華)자를 붙인 경화에 대비되는 말로 그야말로 지방 차별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17세기 이전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 영조 대부터 자주 등장한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새로 생긴 옹주방(翁主房)이 민전(民田)을 침탈하는 행위에 대하여 시정하도록 고하였는데,22) 이에 대해 영조가 “진달한 대개(大槪)가 가상하다. 그러나 경(卿)이 일찍이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라고 하자, 권이진은 다시 “신이 시골뜨기[鄕闇]도 아니요, 또한 연석(筵席)의 체면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라 하여 직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이광좌가 나서서 말하기를 “권이진이 평생을 시골에 살았으니 시골뜨기가 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겉치레만 잘하는 서울 사람에 비교한다면 그 실질(實質)이 뛰어납니다”라 하였고,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그 겉만 화사(華奢)하기보다는 차라리 소박(素朴)한 것이 나으니, 시골뜨기 또한 취할 점이 있다. 내가 호판을 취하는 것은 질박(質朴)한 때문이다”라 하여 마무리하였다. 이런 대화 속에서 ‘시골뜨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었다. 한편, 정조는 향암을 언급할 때 ‘향암객(鄕闇客)’이라거나 ‘향암 중의 향암’23)이란 말도 하였다. 향암이란 표현이 일상화되었다. 이는 그만큼 지방에 대한 비하가 고착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향암은 향암이고 국강[나라의 기강]은 국강[鄕闇自鄕闇, 國綱自國綱]”이라거나 “오로지 향암의 지극한 무식으로 말미암아[專由於鄕闇無識之致]”라거나 “향암은 고루하다[鄕闇孤陋]”거나 하는 표현들이 나온다.24) 한편 존재는 「오황해(五荒解)」25)라는 글에서 어느 한 가지 일에 미혹되어 정신이 황폐(荒癈)해져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모두 황(荒)이라 하여 옛말의 색황(色荒, 여자에 빠짐), 금황(禽荒, 사냥에 빠짐)에 빗대어 장황(葬荒), 반황(班荒), 시황(時荒), 교황(交荒), 향황(鄕荒) 등의 다섯 가지 병폐에 대해 지적하였다. 특히 시황에서 “다만 경화(京華)의 저잣거리에서 천박하고 경솔하게 아침저녁으로 뜯어 고치는 것은 일시의 풍습이니, 시체(時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향촌에서 아첨하는 자들은 시속의 풍조를 추구하는 무리를 오로지 사모하여, 언어ㆍ관복(冠服)ㆍ용모ㆍ행동거지ㆍ걸음걸이를 번번이 아침저녁으로 고치는 행태를 본뜬다. 그리하여 아침에 한양의 객(客)을 보면 낮에 걸음걸이를 바꾸고, 오늘 한양에 들어가면 다음 날 읍(揖)하는 자세를 바꾸니, 1년 된 헌 옷이 없고, 3년 동안 묵은 말이 없다.”
라 하여 서울 따라 하기로 자신을 잃어버린 시골을 한탄하였다. 또 존재가 71세 때에 남긴 편지글26)이 있는데 그 내용은 왕에게 올린 상소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이를 삼벽(三僻) 때문이라 하였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저 백규는 해안가의 빈한한 백성으로 늘 삼벽(三僻)을 제 분수로 삼았으니, 초목이 황량한 산과 흐르는 물에서 죽고 시드는 것은 본디 자기 자리입니다. 헛된 이름으로 임금님의 은혜를 어지럽혀 수령의 임무를 맡으라는 분부를 잘못 받게 되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 ②성씨의 운수가 부족하여 400년 동안 3품의 현관(顯官)이 없었으니 스스로 운수가 기박한 것을 알고 관직에 나아가려는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고 독서하며 문을 닫고 스스로 폐해져서, 30년 동안 한양을 왕래했지만 한 번도 고관 집안에 명함을 들이밀거나 관장(官長)에게 얼굴을 익힌 적이 없었습니다. ... ③도내의 선비 중에도 오히려 소매를 잡거나 눈을 씻고 반갑게 어울린 사람이 없었으니, 화려한 소문과 칭찬이 어찌 사립문 밖으로 나갔겠습니까? ... 삼벽이란,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 성씨가 궁벽하고, 사람이 궁벽하다[地僻姓僻人僻]는 말입니다.”27)
①은 지벽(地僻)을, ②는 성벽(姓僻)을, ③은 인벽(人僻)을 각각 뜻한다. 소통- 장기지속의 바탕 지방은 다양성의 소재지이다. 따라서 지방을 살리는 것이 미래의 자산이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공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조선왕조가 그나마 500년 동안 장기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중앙과 지방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 견제와 비판을 통해 왕조사회가 끊임없이 자기 정화와 혁신의 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28) 하지만 조선왕조도 18∼19세기를 거치면서 중앙과 지방사회의 균형과 조화가 깨졌고, 그 결과 왕조가 위기에 빠져 끝내 이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중앙과 지방의 소통이 원활할 때, 중앙 지배층의 구성이 다양할 때, 중앙에 대한 비판세력이 존재할 때, 장기지속과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지방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국가의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국가 경쟁력을 극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다. 다(多)중심 국가를 지향하여, ‘지방의 차별’이 아니라 ‘지방의 차이’를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다양성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지역균형발전’이 지금 더욱 아쉽다.
1) 나경적에 대하여는 「호남학산책」 중 [풍경의 기억] 열세 번째 이야기 「조선시대 3대 시계 제작자, 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 1690~1762)」 참조.
2) 하우봉, 「호남실학의 전개양상과 성격」(『韓國實學硏究』36, 韓國實學學會, 2018), 437쪽. 3) 『存齋集』 제24권, 附錄, 墓誌銘 幷序[洪直弼] 4) 『存齋集』 序, 任憲晦 5) 같은 글. 궁현(宮懸)은 천자나 제후의 궁중에서 연주하던 악기의 일종이다. 천구(天球)는 옛날 옹주(雍州)에서 공물(貢物)로 바쳤던 것인데, 하늘과 같은 색깔을 지닌 구슬로 궁궐의 예식용으로 사용하였다. 해곡(嶰谷)은 곤륜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아름다운 대가 나는데, 황제(黃帝)의 신하 영륜(伶倫)이 일찍이 이곳의 대를 취하여 음률(音律)을 제정했다고 한다. 6) 『存齋集』 제22권, 鼓軸銘 竝序 7) 『국역비변사등록』 182책, 정조 18년(1794) 12월 25일, 慰諭使 徐榮輔의 書啓로 康津, 長興 來德島 宮結稅錢, 興陽 上納穀 등등을 열거하여 방도를 아뢰는 備邊司의 啓辭 8) 『승정원일기』 1739책(탈초본 92책) 정조 18년(1794) 12월 25일 14/21 기사; 『승정원일기』 1740책(탈초본 92책) 정조 19년(1795) 1월 3일 15/16 기사. 9) 『승정원일기』 1756책(탈초본 93책) 정조 19년(1795) 11월 27일 30/30 기사. 10) 『승정원일기』 1756책(탈초본 93책) 정조 19년(1795) 11월 27일 24/30 기사. 11) 규장각에는 현재, 『新編標題纂圖寰瀛誌』(1822), 『存齋集』(1875년 간행) 등이 소장되어 있다. 『禮說隨錄』, 『分賑節目』, 『學規』, 『陶蘇眞影』 등은 內閣에 입고된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古琴』(1875, 의산 古 3613-14)이 소장되어 있다. 1974년 경인문화사에서 저자의 宗家인 魏桂煥씨가 소장하고 있던 위백규의 저술 필사본 25권을 상하 2책의 『存齋全書』로 영인 출판하였다. 존재의 저술에 대한 상세한 사정은 金碩會, 『존재 위백규 문학 연구 –18세기 향촌사족층의 삶과 문학-』(以會文化社, 1995), 15쪽 참조. 12) 『승정원일기』 1758책(탈초본 93책), 정조 20년(1796) 1월 25일 39/49 기사. 13)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1796) 3월 6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1760책(탈초본 93책), 정조 20년(1796) 3월 6일 87/91 기사. 14)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1796) 3월 7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1760책(탈초본 93책), 정조 20년(1796) 3월 7일 17/20 기사. 15) 『存齋集』 序, 任憲晦 16) 『存齋集』 제24권, 附錄. 本道繡啓別單(1829년). 전라좌도 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의 별단 17) 유봉학, 「18·9세기 京·鄕學界의 分岐와 京華士族」(『國史館論叢』 第22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06) 참조. 18) 이경구,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 서울-지방 격차와 지식인의 인식」(『역사비평』, 2016.11), 107쪽에서 재인용. 19) 이경구, 같은 글, 113쪽. 20) 배우성, 「18세기 지방 지식인 황윤석과 지방 의식」(『한국사연구』 135, 한국사연구회, 2006.12), 44~47쪽. 21) 향암에 대한 서술은 이경구의 앞 글을 참조하였다. 22) 『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1728) 2월 25일 3번째 기사. 23) 『승정원일기』 1716책(탈초본 91책), 정조 17년(1793) 4월 23일 33/34 기사. 24) 『승정원일기』 1731책(탈초본 91책), 정조 18년(1794) 6월 20일 37/64 기사; 『승정원일기』 1847책(탈초본 98책), 순조 2년(1802) 2월 13일 22/29 기사; 『승정원일기』 1956책(탈초본 103책), 순조 8년(1808) 10월 27일 23/24 기사. 25) 『存齋集』 제17권, 雜著, 오황에 대한 풀이〔五荒解〕 26) 김문용, 「18세기 鄕村 知識人의 自我 構成 -存齋 魏伯珪의 경우-」(『민족문화연구』 61호, 2013.1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53∼154쪽. 27) ①, ②, ③은 필자가 붙인 것임. 『存齋集』 제4권, 書, 참봉 유맹환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與兪參奉 孟煥 別紙〕 28) 고석규, 「한국사에서 중앙-지방 관계의 변화 추이」(『歷史學硏究』 제69집, 2018.02), 65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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