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향토문화유산과 지정 문화재 게시기간 : 2021-05-26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1-05-25 15: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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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서원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21년 1월 25일. 구체적으로는 광주광역시 서구 향토문화유산 제2호이다. 지정권자는 광주 서구청장. 문화재 지정을 말한 것 같은데 조금 낯설다. 지정문화재는 흔히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 이렇게 알려져 있어서이다. 문화재청장이 지정하는 국가지정문화재, 광역자치단체장인 도지사나 광역시장이 지정하는 시·도지정문화재와 문화재자료. 이게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된 지정문화재의 정의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인 시장·군수나 구청장은 문화재 지정을 한 권한이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시·군·구에서 조례로 입법하여 문화재 지정을 하는데, 향토문화유산 또는 향토문화재라고 하여 지정하면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법률에 의해 위임되는 위임조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정문화재”이기는 한데 “문화재보호법” 적용은 받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30년이 다 되가는 시점인데도 이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원인이랄까. “지방”에 있다기 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사회사정이 더 문제라 하겠다. “지방분권”이 “시대정신”이라고 외치지만, 이 구석 저 구석 살펴보면 한낱 구호일 뿐인 경우가 많다. 한때 시·군·구 지정문화재 제도를 문화재보호법에 도입한다는 검토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추진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지혜를 모아갔으면 한다.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은 문신 학자이자 임진왜란의 공신 회재 박광옥(1526~1593)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1602년(선조 35) 벽진사로 창건하여 박광옥을 배향하였는데 1604년 벽진서원이라 하였다. 1678년(숙종 4) 김덕령(1567~1596)을 합향하면서 1681년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뒤에 오두인, 김덕보 등을 추배하였다. 조선후기에 서원훼철령에 따라 헐렸다가 1927년에 박광옥을 향사하면서 영정을 봉안해 운리영당(雲裏影堂)이라 하였다. 도시개발로 인해 1999년 이건 복설하여 운리사(雲裏祠)라 하였다. 2018년 벽진서원이라 하고 신실은 의열사라 하였다. 조선시대 1604년에 명명한 벽진서원은 서원 이름으로, 사액 사우 명칭인 의열사는 신실 이름으로, 복설 공간인 운리영당은 지금의 신실로 그 역사성과 전통성을 계승하고 있다. 벽진서원에 있는 자료 가운데 사제문(賜祭文) 현판이 주목된다. 강당인 숭본당(崇本堂)에 걸려 있다. 사제문은 임금이 하사한 제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서원과 사우는 국가 공인에 해당한다 할 사액을 받으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각종 부역을 면제하거나 줄여 준다. 정기 제사일 때에는 제관을 파견하고 제문과 제수를 하사한다. 벽진서원은 1681년 의열사로 사액을 받는데 이때 임금이 하사한 제문이 현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벽진서원-의열사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유산이다. 사제문은 1681년(숙종 7) 4월 24일에 숙종 임금이 내린 제문으로 당시 파견된 제관은 예조좌랑 이정린(1625~1682)이다. 이 제문은 서파 오도일(1645~1703)이 지었는데 문집인 『서파집(西坡集)』(권19)에 “증 도승지 박광옥 증 병조판서 김덕령 사우 사액 제문(贈都承旨朴光玉贈兵曹判書金德齡祠宇賜額祭文)”이 실려 있다. 임금이 제문을 내렸고, 제문 지은이의 문집에 전하며, 당시 파견된 제관의 이름이 기록된 사제문을 새긴 현판이 벽진서원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제문은 연호와 간지 연월일의 세차를 앞에 썼다. 국왕이 파견한 제관인 예조좌랑 이정린이 박광옥과 김덕령의 영위에 제문을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문은 박광옥과 김덕령의 행적과 공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부분에 "부지런한 경을 생각하니 남쪽지방 수재일세 문학을 연마하여 이른 명성 드날렸네.…늙음에 말고삐를 잡지 않고 집에 있는 군량을 보내었네 한을 안고 죽으니 지사가 눈물을 떨쿠네(亹亹惟卿 南國之秀 績文種學 譽聞夙騖 … 老不執靮 在家給饋 齎恨而歿 志士隕淚)라 하여 박광옥의 학문과 의병활동을 찬미하였다. 뒷부분에서는 "충의를 고무하니 용맹한 군사 구름처럼 모이네 높은 산보다 크게 무찌르니 적의 추장 간담이 서늘하네. … 참언은 매우 달콤하고 간악한 무리 침체되네. … 현종 때 원통함 밝혀 선혁을 애증하였네(鼓以忠義 勇士雲集 大膊于嶠 賦酋膽懾 … 盜言孔甘 蜮弩潛中 … 顯廟昭冤 哀贈燀爀)라 하여 김덕령의 의병활동과 참언에 의한 피해, 그리고 신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어서 사액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존경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끝에는 상지 정미 춘삼월 하완 게판(上之丁未春三月下浣揭板)이라 하여 이 현판을 새긴 때를 적었다. 1787년(정조 11) 정미년으로 보인다. 1785년(정조 9) 김덕령에게 충장의 시호를 내린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 현판은 조선시대 사우를 사액하면서 치제할 때 국왕인 내린 사제문을 새긴 기록유산으로 제향 세차 연월일과 파견 제관, 제문, 게판 연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제(賜祭), 국왕(國王), 현묘(顯廟, 현종) 등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는 대두(擡頭)를 하여 줄을 바꾸고 한 글자씩 올려 써 당시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제문 지은이의 문집에서도 확인되는 등 역사적 의의가 있다. 벽진서원-의열사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유산이다. 향토문화유산 지정사례를 더 살펴보자. 함평군은 2020년 월산사와 자산서원 2건을 지정했다. 자산서원은 조선 중기 호남사림을 이끌었던 성리학자 곤재 정개청(1529∼1590)을 모시기 위해 1616년(광해군 8) 건립하였다. 1657년(효종 8) 서인의 상소로 훼철된 이후 1678년(숙종 4) 사액을 받기도 하지만 다섯 차례의 철폐와 복설을 반복했다. 현재의 서원은 1957년에 복설된 뒤 1988년 중건하였다. 정개청은 나주 대곡동에서 태어났다. 박순 등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강구한 뒤 나주 훈도, 전생서 주부, 곡성 현감 등을 지냈다. 만년에 함평 엄다[당시 무안에 속함]에 윤암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여 제자가 400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89년 기축옥사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경원에 유배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저서로 《우득록》만 전하는데, 우득록 목판[48매]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이다. 해남군은 2020년 4건을 지정했다. 현산 고다산성, 화산 호미재, 광보사 지장보살본원경 등 향토유형유산과 해남 오구굿 향토문형유산이다. 현산 고다산성은 현산면 읍호리 성매산에 위치하여 ‘성매산성’으로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보인다.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450미터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내탁법에 따라 쌓았다. 성내의 북쪽 부분에는 여장과 같은 구조물이 보이며, 치 구조물과 문지도 확인된다. 석축성 밖으로 성을 돌아가면서 삭토하여 계단식 구조물을 축조한 흔적이 뚜렷하다. 해남반도의 해양방어를 위한 고대 관방시설로 축성연대는 삼국시대~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남쪽 일부를 제하고는 성벽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주민의 보호의지도 뚜렷하다. 영광군은 2020년 8건을 지정했다. 무령리 산신각은 산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1897년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본래 교육청 부지 부근에 있었으나 수십년 전 무령리 주민들의 발의로 영광의 주산인 관람산으로 옮겨졌다. 영광지역 유일한 산신각이며,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곳에서 산신제가 계승 되어 오고 있어 민속학적 가치가 크다. 수은공 강항비(睡隱公 姜沆碑)는 1820년 수은 강항 선생 무덤 앞에 세운 비석으로 당대 유명한 문장가인 성담 송환기가 비문을 짓고, 명필가인 기원 유한지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글자는 약 2,100여자이며, 강항선생의 출생, 선조, 학문 수학과 관직 활동,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기 활동, 일본에서의 생활 등이 기록돼 있다. 수은 강항선생의 생애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역사․학술적 가치가 크다. 강진군은 2020년 향토문화유산 15건을 새로 지정하였다. 모두 70건으로 전남 도내에서는 가장 많다. 강진 제주고씨 충효 정려와 비는 고수정(1408~1483)과 고수검(1415~1487) 형제와 고수검 증손 고명달(1587~1619) 심효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고수정의 아들 고몽룡(1519~1593), 고수검의 손자 고태항(1552~1597), 고수검의 증손 고홍달(1570~1625), 고수정의 종증손 고무전(1586~1597) 사충이다. 삼효사충비는 최익현과 기우만이 비문을 지어 1900년에 세웠다. 도암 청룡등 해남윤씨 사형제 종송명(種松銘) 표석은 윤강(尹綱), 윤약(尹約), 윤륜(尹綸), 윤신(尹紳) 사형제가 1584년(선조 17)에 새긴 것이다. “이곳은 청룡등으로 소나무와 나무를 많이 심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깎거나 베지 못하도록 하여, 후손들이 이 착한 일을 이어가는 일을 잊지 않도록 하라[爲此青龍種松種木 他人見此勿剪勿伐 浚昆見此善継勿失].”는 내용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금석문이고 향촌 활동을 알 수 있고, 이후 사형제는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절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점 등에서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김억추 신도비와 현무는 임진왜란기에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 김억추장군의 신도비와 사당이다. 신도비는 1881년에 송병선이 비문을 짓고 기우만이 글씨를 써서 1882년에 세웠다, 현무묘도 고격을 갖추고 있는 유교 사당이다. 절의인물의 행적과 추숭활동에 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화방사 사적비는 1917년 허원응 계정(許圓應 戒正, 1856∼1927)이 지은 근대기 사찰 사적비로서 건립 연대, 비문을 지은사람, 비문 글씨를 쓴 사람, 비문을 새긴 사람, 주지, 불사 참여자 등과 화방사의 중개수 내력에 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강진읍교회 종탑은 1914년 1월 강진읍교회에 설치되었던 종이다. 1919년 4월 4일 정오에 강진 4·4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일명 ‘독립만세종’으로 항일독립정신을 기리는 역사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군동 백금포 석빙고는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수산물을 보관하여 유통시키기 위해 축조한 근대기의 냉장보관 창고 시설이다. 수산자원의 보관 유통에 관련된 중요한 건조물로거 백금포항수축기념비와 함께 향토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칠량 윤한봉 생가는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농촌 가옥이다. 학생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핵심 지도층으로 활동한 합수 윤한봉(合水 尹漢琫, 1948~2007)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로서 현대사와 지역사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가래치기는 병영 중고리 일대에서 벼 수확이 다 끝나고 수리를 위해 물을 뺀 저수지에서 가래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가둬 잡는 전통어로 방식을 말한다. 가래는 대나무를 삶은 뒤 줄로 엮어 만든 길이 대략 50㎝ 정도 원뿔형의 통발인 바구니이다. 소규모의 저수지가 잘 발달 된 천혜의 환경에서 발생했으며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민들이 추수 후에 주변 여러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고 나누어 먹으면서 화합과 친목을 다지는 마을잔치 역할을 했던 면에서 향토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전남 도내 향토문화유산 지정 사례를 보면 서원이나 사우, 충효열유적, 산신각, 근대 사찰 사적비, 교회 종탑, 근대기 석빙고, 민주화운동가 생가, 가래치기 등 다양하다. 그리고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3건은 국가지정문화재나 전남도지정문화재가 되었다. 고성사 청동여래좌상은 보물, 백운동 계곡은 명승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여택정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향토문화유산 지정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재를 발굴했다가 승격한 것이다. 광주 벽진서원-의열사는 훼철과 이건, 복설 등 제자리를 떠나 중건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역사성이 이어지고 있고 1681년 사제문 현판 등 여러 기록자료가 고증이 되어 향토문화유산 지정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성, 학술성은 있으나 원형을 비켜서 있는 문화재에 대하여 향토문화유산 지정은 당연한 책무일 것이다. 나아가 문화재보호법에도 시·군·구 지정문화재가 포함되기를 기대 해 본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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