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죽음 앞에서 더한 존경심_박순이 이황에게 올린 애도시 게시기간 : 2021-06-0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5-31 16:1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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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순이 이황에게 올린 애도시 이 작품은 이황(李滉, 1501~1570)이 세상을 뜨자 박순(1523~1589)이 그 슬픔을 담아 올린 애도시(哀悼詩)이다. 시 제목 맨 마지막에 있는 한자 ‘만(挽)’은 ‘만(輓)’과 통용되는 것으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 내용을 다시 풀이해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재앙과 화복을 내리는 신령의 도는 원래부터 어둡고 아득한데, 이황 선생께서는 어찌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까. 선생의 죽음은 마치 하늘 한복판에서 주춧돌을 옮기고, 나라를 평안히 해주는 진산(鎭山) 터가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끊어진 유학의 맥을 그 누가 잇겠습니까. 그나마 선생이 남기신 책을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청량산에 남겨진 달빛의 자취 속에서 시간이 오래 지난 뒤까지 선생이 가슴이 품고 계시던 취지(趣旨)를 보겠습니다.
시에서 사용한 어휘 중에 인상적인 것은 ‘주석(柱石)’이다. 이는 곧, 박순이 이황을 가리킨 말로 구체적으로는 주석신(柱石臣) 또는 주석지신(柱石之臣)을 가리킨다. 주석신이란 기둥과 주춧돌처럼 나라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신하를 뜻하는데, 박순이 이황을 어떤 존재로 인식했는지를 말해주는 시어이다. 또한 ‘청량(淸涼)’은 보통어로 풀이하면 ‘시원하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에 소재한 청량산(淸涼山)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황은 도산서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다가 수시로 청량산에 들어가 수도했기에 ‘청량산인(淸涼山人)’이라는 호를 얻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량’이라는 시어를 보통어로 풀이하지 않았다. 한편, 박순은 또 다른 애도시 「퇴계 선생의 만시」(『사암집』 권3)와 묘지명 「퇴계선생묘지명(退溪先生墓誌銘)」(『사암집』 권4)을 지어 이황에 대한 존경심을 극진히 나타내었다. 또 다른 애도시 「퇴계 선생의 만시」는 총 48행으로 이루어진 오언 장편시인데, 특히, 이황을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에 대비시켜 언급한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박순은 「퇴계선생묘지명」에서 “잘난 사람은 그의 덕을 즐거워하였고, 못난 사람은 그의 부드러움을 사랑하여 다들 우러러보고 경의를 표했다.”라고 하여 모든 사람이 이황을 존경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박순은 이황이 죽은 이후 두 편의 애도시와 한 편의 묘지명을 지어 슬퍼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한편, 존경한다는 뜻을 여실히 드러내어 후배의 소임을 다하였다.
〈사진① 이황의 묘소_도산서원 제공〉
〈사진② 천원 권 지폐 앞면에 있는 이황 초상화〉 2. 박순, 이황에게 벼슬자리 양보해 존경심을 나타냈으니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이요, 호는 사암(思庵)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부친은 박우(朴祐)이고,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중부(仲父)이며, 나주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진사과에 합격한 뒤에 멀리 개성에 있던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하였고, 31세(1558, 명종8) 때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50세 때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며, 57세(1579, 선조12) 때 영의정에 올라 64세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어갔다. 다시 말해 14년 동안 정승 벼슬에 있었으니, 박순에 대한 왕의 신임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요, 호는 퇴계(退溪)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경상북도 예안〔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이식(李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34세(1534, 중종29) 때 문과에 합격한 뒤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렇지만 이황은 벼슬살이를 하던 중에도 늘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몰두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관직을 받더라도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기를 반복하였다. 급기야 60세가 되자 고향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기르고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68세(1568, 선조1) 때 선조(宣祖)에게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제출한다.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여섯 조항을 적은 것이고, 「성학십도」는 성왕(聖王) 및 성인이 되기 위한 유교철학 열 가지를 도설(圖說)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이와 같이 박순과 이황의 행적을 대략 적었다. 그러고 보면, 박순은 이황보다 22년 어린 후배이다. 박순은 이황이 어떤 덕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존경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순은 그의 나이 44세(1566, 명종21) 때 부제학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황에게 편지를 써서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한다. 박순은 대학자 이황이 조정에서 올바른 정치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황은 이때에도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근거해보면 박순의 소망은 잘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박순의 나이 45세 때 선조가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박순을 대제학, 이황을 제학에 임명한다. 이에 대해 박순이 사양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제학과 제학은 똑같이 관각의 직위이기는 하나 제학의 임무는 대제학의 그것만큼 무겁지 않습니다. 지금 신이 대제학이 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어 나이 많은 석유(碩儒)가 도리어 작은 임무를 맡았습니다. 후진 초학의 선비가 중책의 자리에 있으니, 그 소임을 갈라서 이황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사암집』 권7, 「조야기문(朝野記聞)」) 박순이 이황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에 두 사람이 같은 부서에 임명된 것이다. 그런데 후배 박순이 대학자 이황보다 더 높은 직책을 맡았으니, 박순의 입장에서 민망할 뿐이었다. 따라서 박순은 이러한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선조에게 서로의 자리를 바꿔줄 것을 요청하였다. 선조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어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령하였고, 대신들은 박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로써 이황이 대제학이 되고, 박순은 제학이 되었으나 이황이 곧바로 사양하여 박순이 결국 대제학이 되었다. 이렇듯 박순과 이황은 후배와 선배의 입장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심히 깊었다. 이황은 이듬해 3월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수많은 명사(名士)들이 이황을 전송하였는데, 그 속에 박순도 물론 있었다. 박순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 선생을 전송하며〔送退溪先生還鄕〕」라는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암집』 권1) 박순이 지은 시에 대해 이황도 시로 화답하기를 “물러감 허락함이 어찌 결환 내림과 같을까, 여러 어진이 환송 받으며 한양 출발한다. 스스로 은전 베풀었던 사성에 부끄러워, 공연히 구차스럽게 일곱 차례 왕복했었지.〔許退寧同賜玦環, 諸賢護送出京關. 自慙四聖垂恩眷, 空作區區七往還.〕”라고 한다. 이제 박순과 이황은 한양에 함께 머물러 있다가 이별을 한 것이다. 이황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간 뒤 이듬해 70세(1570, 선조3) 12월 8일에 생을 마감했으니, 박순과 더 이상 만날 수는 없었다. 박순은 한양에서 이황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한양에서 헤어졌던 이황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하니,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박순은 「퇴계 선생의 만시」의 처음 부분에서 “신명의 이치는 원래부터 어둡고 아득한데, 공은 어찌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황당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 내용이다.
3.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이 ‘사암능양(思庵能讓)’이라 극찬하다 이제 박순도 67세(1589, 선조22)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황과 박순 모두 세상을 떴으나 두 사람이 서로 벼슬자리를 양보한 훈훈한 일화는 후대인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어느 날 박순과 삼종 사이로 당시 습독관(習讀官)으로 있던 박수기(朴秀基)를 만나 박순과 이황이 남긴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 편의 연작시를 지었는데, 그중 세 번째 시 앞부분에서 읊기를 “퇴곡 선생이 나오기 어려웠을 때에, 사암 대원로가 홀로 그를 어질다 했다.〔退谷先生難進時, 思庵大人獨賢之.〕”라고 하였다. 바로 박순이 그의 나이 44세 부제학으로 있을 때 이황에게 편지를 써서 조정에 나오기를 권유한 일을 말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박순과 이황의 미담은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이익은 시가 아닌 문장으로 두 사람이 남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 제목은 「사암능양(思庵能讓)」이다. 풀이하면 ‘사암이 겸양에 능하다’인데, 뒷부분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그때 대제학 박순이 “신이 주문(主文)이 되어 있는데 이황이 제학이 되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도로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했으니,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 했다. 주상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서로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지금에는 이욕(利欲)만이 설쳐 이런 것을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프다. (이익, 『성호사설』 권12,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참조) 위 인용문 중에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말한 부분에 눈길이 간다. 이익은 박순이 이황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일을 특별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나이 고하를 불문하고 남보다 무조건 높은 지위에 오르기만을 바라는데, 박순은 이와 달랐다는 것이다. 때문에 존경하는 선배를 극진히 대할 줄 아는 박순이야말로 세속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언급하였다. 이황은 살아생전에 박순을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정신과 영혼이 아주 상쾌하다.”라는 말을 하였다. 얼음은 성질이 차기도 하지만 맑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황이 박순에 대해 “마치 한 덩이 얼음과도 같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박순이 맑고 깨끗한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한 사람은 대학자를 잘 알아보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맑은 심성을 지닌 어진이를 잘 알아보았던 것이다.
<참고 자료> 박 순, 『사암집』
이 익, 『성호사설』 이 황, 『퇴계집』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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