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강진 백련사, 고려후기 8국사와 조선후기 8대사의 도량(道場) 게시기간 : 2021-06-16 07:00부터 2030-12-17 16:16까지 등록일 : 2021-06-14 16:5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
||||||||
1. 강진 만덕산 백련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고려후기에는 백련사(白蓮社)였으며, 조선후기 19세기에는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지금은 백련사(白蓮寺)라고 칭한다. 백련사는 신라 하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못하다. 1211년(고려 희종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되었다. 요세는 이보다 앞서 월생산(月生山, 지금의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살았는데, 탐진현(耽津縣, 지금의 강진)의 토호이자 불교신자 최표(崔彪)·최홍(崔弘) 형제와 이인천(李仁闡) 등의 요청으로 백련사에 옮겨 살게 되었다. 요세는 그의 제자 원영(元營)·지담(之湛)·법안(法安) 등에게 건물 80여칸을 짓게 하였는데, 1216년(고려 고종3)에 이르러 낙성법회를 갖게 되었다. 그 뒤 그는 1221년(고종 8)에 대방(帶方, 지금의 남원) 태수(太守)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대방 관내에 제2의 백련사(白蓮社)를 개설하고 몇 년을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1223년(고종 10) 요세는 최표의 간청으로 강진 백련사(白蓮社)에 다시 돌아와 도량을 크게 일신하였다. 2. 고려후기 백련결사와 8국사
고려후기 지눌이 조계산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끌고 있을 때, 거의 같은 시기에 상호 일정한 관련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성격의 신앙결사로 원묘국사 요세가 만덕사 백련사(白蓮社)를 중심으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제창하게 되었다.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에 맞서면서도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과도 성격이 다른 법화신앙을 내세우는 불교개혁운동이었다.
그림 1.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백련사의 개창자인 요세는 지눌의 수선사에 참여하였다가 사상적 입장의 차이로 지눌의 곁을 떠나 1208년(희종 4)에 월출산 약사난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조계선(曹溪禪)에서 천태교관(天台敎觀)으로 되돌아갈 결정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그는 탐진현(강진)의 최표· 최홍 형제, 이인천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에 옮겨 살게 되었다.
그림 2. 백련사 대웅전 요세는 백련사를 중창하고 도량을 일신하여 이곳을 백련결사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이어서 그는 1232년( 고종 19) 4월 8일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어 법화삼매(法華三昧)와 정토왕생(淨土往生, 淨土求生)을 닦으며 천태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讖儀)에 의해 오랫동안에 걸친 법화참법을 실천하였다. 또한 요세는 1236년(고종 23)에 제자 진정천책(眞淨天頙)으로 하여금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짓게 하였는데, 이것은 보조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의 유포(1190)와 같은 불교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백련결사는 요세가 만덕사에 보현도량을 개설한 고종 19년(1232)을 출발로 하여 동왕 23년(1236)에 “백련결사문”이 작성, 공포됨으로써 정식 출범하게 된 셈이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에 못지않게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백련사의 보현도량에 대해 강화도의 최씨무인정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37년 여름에 고종이 요세에게 선사의 칭호와 함께 세찬을 내리기도 하였고, 1240년 8월에 최이가 계환해『묘법연화경』을 보현도량에서 조판하게 하면서 그 발문을 찬한 사실에서 백련사와 최이정권이 밀접한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련결사에 참여한 사회계층은 보현도량 개창 이전에는 강진의 지방토호 및 지방 수령이었는데, 보현도량 개창 이후에는 최씨무인정권 집정자와 이들과 밀착된 중앙관직자 및 새로운 지식인층으로 대별된다. 요세는 득도한 제자가 38인, 개창한 가람이 5개소, 제명입사(題名入社)한 4부대중이 300여명, 멀리 인연을 맺은 사람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요세의 백련사는 지눌의 수선사와 상당히 다른 사상적 입장을 취하였다. 요세가 참회와 정토를 강조했다면, 지눌은 지혜와 점오(漸悟)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양자의 사상적 입장의 차이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생의 근기에 대한 의식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요세는 교화의 대상으로 “죄의 업장이 깊고 두터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나약한 범부”를 의식하였던 것에 비해, 지눌은 “최소한 지혜력 정도를 가진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뛰어난 근기를 지닌 사람”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이다. 요세의 주법(主法)을 계승한 백련사 제2세는 천인이었다. 천인은 요세의 불교사상을 계승하였는데, 그는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정토관을 통해서 그의 불교관을 표방했다. 즉 그는 보현도량을 개칭하여 법화사상과 정토신앙의 융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림 3. 백련사적비 천인의 보현도량과 최씨무인정권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백련사는 보현도량의 개창에 최씨무인집권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최씨무인정권은 대몽항쟁의 차원에서 지식인과 서민대중을 규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천인(天因)의 뒤를 이은 제3세는 원완이었다. 원완에 대해서는 천인의 문하라는 것만 알뿐 자료가 없어 그 활동과 사상을 알 수 없어 유감스러울 뿐이다. 백련사 제4세는 진정국사(眞淨國師) 천책이었다. 그는 요세에게 출가하여 스승의 곁에서 백련결사에 적극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그는 고종 19년(1232)에 백련사에 보현도량이 개설되었을 때 <보현도량기시소>를 짓고 4년 뒤인 고종 23년(1236)에 스승의 명을 받들어 <백련결사문>을 짓기도 하였다. 천책은 요세, 천인 등과 마찬가지로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실천문으로서 보현도량에서 주창한 정토관과 참법을 계승하여 서민불교를 표방하였다. 또한 그가 불교의 입장에서 유, 불의 근원을 동일하게 이해하였던 점은 앞으로 주목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림 4. 백련사 원구형 부도 백련사 제4세 진정천책 이후 제5세부터는 법맥상에 혼돈이 보이고 있고, 또한 백련결사의 성격에 변질을 가져오게 되었다.『만적사지』는 백련사의 주법자를 1세 圓妙了世 - 제2세 靜明天因 - 제3세 圓완 - 제4세 眞淨天政 - 제5세 圓照力(而安) - 제6세 圓慧 - 제7세 眞鑑無畏(丁午) - 제8세 牧庵無畏
로 보고 8국사설(國師說)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6세 원혜와 7세 무외정오가 개경의 묘련사에 진출한 뒤에도 5세 원조이안이 생존해 있었고, 2인의 무외를 설정한 것도 잘못이다. 따라서 현존자료로 확인된 백련사 주법자는, 1세 원묘요세 - 2세 정명천인 - 3세 원완 - 4세 진정천책 - 원혜(대수미상) - 11세 무외정오 - 정조이안(대수미상)
으로 파악된다. 한편 백련사의 원혜와 무외정오가 충렬왕의 원찰 개경 묘련사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련사의 사세가 중앙에까지 확대되었지만, 중앙왕실과의 결합으로 묘련사계 천태종은 귀족불교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묘련사계 천태종이 부원세력인 귀족불교로 변질되어질 무렵 이것을 비판하면서 진정천책의 계승자인 무기운묵(無寄雲黙)이 백련사 초기의 열렬한 정토신앙에 바탕을 둔 서민불교적인 새로운 불교결사운동을 일으켰다. 운묵 이후 백련결사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여말선초에 백련사는 왜구의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3. 조선초기 행호 대선사와 효령대군의 백련사 중창 조선초기에 들어와서도 백련사는 왜구의 침략으로 사찰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그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백련사는 세종 8년 천태종 승려 행호(行乎)가 크게 중창하였다. 백련사가 황폐해진 것을 천태영수(天台領袖) 도대선사(都大禪師) 행호가 보고 탄식하며 옛 모양으로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임금의 수명과 나라의 복을 비는 수군복국(壽君福國)의 서원을 발원하여 종제(從弟) 신담(信湛) 등에게 부탁하여 여러 단월에게 시주를 권유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신담을 효령대군에게 보내 편지로 대공덕주가 되어줄 것을 청하였다. 효령대군은 흔연스럽게 재정을 시주하고 기력을 내주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게 하였다. 특히 장흥부인(長興府人) 전도관좌랑(前都官佐郞) 조수(曺隨)와 강진현(康津縣) 안일호장(安逸戶長) 강습(姜濕)이 가장 선두가 되었다. 이 중창불사는 1430년 시작하여 1436년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불전(佛殿)과 승사(僧舍)가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효령대군은 양위(讓位)하고 사찰을 유람할 때 백련사에 8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답토(畓土) 54두(斗) 2승락(升落)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4. 조선후기 백련사의 8대사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백련사 승려 단기가 본사의 실적(實跡)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宗箸)에게 돌에 새길 간석지문(刊石之文)을 청해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를 1781년에 건립하였다. 천계(天啓, 1621-1627, 광해군 13-인조 5)) 말년에 취여삼우(醉如三愚)가 법회를 개설하여 옛날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취여는 청허휴정의 제자인 소요태능의 적손(適孫)으로 백련사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조선후기에 백련사에서 8대사(大師)가 배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 백련사의 八大師
淸虛休靜-①逍遙太能- ②海運敬悅- ③翠如三愚- ④華岳文信- ⑤雪峰懷淨- ⑥松坡覺喧- ⑦晶岩卽圓- ⑧蓮坡惠藏 백련사의 8대사는 소요태능 계통의 전법제자로 이루어진 반면, 인근 해남의 대흥사의 13대사는 편양언기의 전법제자가 대다수였다. 백련사 8대사 가운데 취여삼우(翠如三愚), 화악문신(華岳文信), 설봉회정(雪峰懷淨), 연파혜장(蓮坡惠藏)은 대흥사의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에도 포함되고 있다. 이것은 양 사찰의 승려가 상호교류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①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은 담양 출신이며, 성은 오씨(吳氏), 호는 소요(逍遙), 법명은 태능(太能), 시호는 혜감선사(慧鑑禪師)이다. 서산대사의 전법제자(傳法弟子)이며, 소요파(逍遙派)의 개조(開祖)이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의 경치에 감화 받아,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그 후, 속리산과 해인사 등지에서 부휴(浮休)에게 경률(經律)을 익혔는데, 부휴의 수백 명의 제자들 중, 충휘(沖徽)·응상(應祥)과 더불어 법문(法門)의 삼걸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뒤에 묘향산으로 휴정을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화두를 묻고 서로 문답한 뒤, 휴정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았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서성(西城)을 보완하였으며,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다. 1649년 11월 21일 법문과 임종게를 말하고 세속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사리를 연곡사·금산사(金山寺)·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나누어 봉안하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그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경석에게 비명(碑銘)을 짓게 하고, 금산사에 비를 세우게 하였다. 태능은 선(禪)과 교종(敎)를 하나의 근원에서 파생한 두 가지 흐름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했다. 이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한다. 태능은 저서 《소요당집》(逍遙堂集)의 서문에서 서산대사의 뛰어난 제자들 중에 오직 자신만이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뛰어난 제자로 현변(懸辯), 계우(繼愚), 경열(敬悅), 학눌(學訥), 처우(處愚), 천해(天海), 극린(克璘), 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소요파(逍遙派)로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들을 두었다. ②해운경열(海運敬悅, 1580-1646)은 조선후기 소요태능으로부터 선법을 계승한 승려이다.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607년(선조 40) 청련 원철(靑蓮圓徹)이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대회(大會)를 열었을 때 소요태능(逍遙太能)이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28세로 태능으로부터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경열은 태능의 법맥을 이었고 호를 해운(海運)이라 하였다. 해운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간다는 의미이며, 이는 유유히 소요(逍遙)한다는 뜻으로 소요-해운의 전법 관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태능은 경열의 가슴 속에 있는 법해(法海)가 넓고 깊어서 예측하기 어렵고 글 속의 현묘한 뜻은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평을 하였다. 태능의 『소요당집(消遙堂集)』에는 제자 경열에 대해 읊은 시와 게송이 수록되어 있다.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전법제자는 취여삼우(醉如三愚)이다. ③취여삼우(翠如三愚, 1622-1634)는 조선후기 대흥사 13종사 가운데 1인으로 경열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이다. 성은 정씨(鄭氏). 강진(康津) 보암방(寶巖坊)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전국의 명산을 다니면서 불교를 비롯한 내외전(內外典)을 공부하였고, 해운 경열(海雲敬悅)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 청허휴정(淸虛休靜)의 제자 소요 태능(逍遙太能)에서 경열로 전해진 소요파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특히, 담론(談論)을 잘하여 듣는 이들을 모두 설복시켰다고 한다. 대흥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경』의 종지(宗旨)를 강설했을 때는 청중이 수백 명이 넘었다. 그때 한 농부가 누각 아래에서 쉬다가 법문을 엿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제자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농부는 과거의 업장(業障)을 참회하고 화엄(華嚴)의 묘지(妙旨)를 얻게 되었다. 삼우는 그를 전법제자(傳法弟子)로 삼고 의발(衣鉢)을 전하였는데, 그가 곧 화악문신(華岳文信)이다. 이것은 중국의 오조홍인(五祖弘忍)이 나무꾼이었던 육조혜능(六祖慧能)에게 자신의 의발을 전한 고사(故事)와 비견되기도 한다. 1684년 6월 5일 63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제자들은 그의 영정(影幀) 2본을 그려서, 백련사와 대흥사에 봉안하였고, 대제학 한치응(韓致應)이 쓴 비(碑)는 대흥사에 있다. ④화악문신(華岳文信, 1629-1707)은 조선후기 승려로 소요파 취여삼우(醉如三愚)의 제자이며 대둔사(大芚寺: 현재 대흥사) 13대 종사(宗師) 중 4대 종사이다. 성은 김씨(金氏), 호는 화악(華岳). 해남 화산(華山) 출신으로 어렸을 때 출가하여 대둔사 고권(顧權)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배운 것이 없어서 경전을 공부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대둔사 상원루(上院樓)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누각 위에서 취여(醉如)가 강론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종지(宗旨)를 듣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뒤 취여의 가르침을 따라 화엄을 배웠으며, 솔방울을 주워 불을 밝히고 온종일을 독경하며 3년을 공부한 뒤 취여로부터 소요파(逍遙派) 법맥을 전수받았다. 그때부터 전국 각지의 고명한 선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다가 다시 대둔사로 돌아와서 취여의 뒤를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설법이 있을 때면 언제나 승속(僧俗) 수백 명이 참여하였다. 그때 묘향산에 머물렀던 편양파(鞭羊派) 월저도안(月渚道安)이 대둔사로 찾아왔다. 그들은 함께 선지(禪旨)를 담론하고 『화엄경』의 묘의(妙義)를 겨루어 서로의 도력을 인정하였다. 그때 월저가 능히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간파한 문신은 제자와 학인들을 모두 월저에게 위탁하고 뒷방으로 물러나 두문불출하고 면벽(面壁) 참선하였다. 그 뒤 월저는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문도들에게, “나는 남방에서 육신보살(肉身菩薩)을 보았다.”고 하며 화악문신의 도력을 널리 알렸다. 나이 79세로 죽었으며, 다비(茶毘)한 뒤 사리(舍利) 2과(顆)를 얻어 대둔사에 탑과 비를 세웠다. 문인으로는 설봉 회정(雪峰懷淨)·벽하 대우(碧霞大愚) 등 20여 명이 있다. ⑤雪峰懷淨(1678-1738)은 영암 출신으로 문신(文信)의 법을 이은 후 경전의 연구와 논리적 분석과 증명에 능했던 승려이다. 성은 조씨(曺氏). 자는 윤중(允中), 호는 설봉(雪峰). 영암 출신으로 어머니 김씨는 살생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나 자기나 차별을 두지 않는 인자한 성품이었다. 신인(神人)이 나타나 명주(明珠) 한 개를 주는 태몽이 있었다. 9세 때 달마산(達磨山) 희명장로(熙明長老)의 권유로 입산하였고, 16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 뒤 문신(文信)에게 경론(經論)을 배우고 그 법(法)을 이었다.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이 능하여 남방의 모든 승려들은 그를 선림종주(禪林宗主)라고 불렀다. 평소의 생활 가운데서도 허례허식을 배제하여 입고 있는 장삼이 남루하게 떨어져도 깁지 않았으며, 머리를 깎지 않아 더벅머리가 되기도 하였다. 검소하고 청빈하기 이를 데 없어 누더기 옷과 밥그릇이 소지물의 전부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해도(海島)에 들어가 야은(野隱)이라는 초암(草庵)을 짓고 홀로 살았다. “뜬 구름 오는 곳 없고 가는 곳 또한 자취가 없네. 고요히 바라보니 구름만 오고가고, 이제는 다만 한 허공뿐일세.”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6월 8일 입적하였다. 법을 이은 제자로 각훤(覺喧) 등 16명이 있다. 다비하여 사리 1과와 영주(靈珠) 1매를 얻어 미황사(美黃寺)에 탑을 세웠다. 김진상(金鎭商)이 찬(撰)한 비가 있다. ⑥松坡覺喧(?-?)은 화악문신의 법손(法孫)이자 설봉회정의 제자인데, 정암즉원에게 사집과 사교를 가르쳤다고 한다.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⑦정암즉원晶岩卽圓( 1738-1794)은 영암 출신으로 미황사 등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 자는 이우(離隅), 호는 정암(晶巖). 영암출신으로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미황사(美黃寺)의 재심(再心)에 의탁하여 자랐다. 16세에 출가하여 각훤(覺暄)으로부터 사집(四集)과 사교(四敎), 유일(有一)로부터는 교리를 배웠으며, 30세에 송파(松坡)의 법을 이어받았다. 회정(懷淨)의 문하에서 참선하였고, 1794년 궁복도(弓福島)의 한 암자에서 나이 5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대중을 거느리고 경을 설하는 한편,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항상 보시에 힘썼다. 어느 날 거지가 왔는데, 이가 많은 것을 싫어하여 사람들이 문밖으로 쫓아내었으나, 그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같은 이불 속에서 잠을 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⑧蓮坡惠藏(1772- 1811)은 성은 김씨(金氏). 자는 무진(無盡),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속명은 팔득(八得). 혜장(惠藏)은 법명이다. 해남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해남대둔사(大芚寺)의 월송화상(月松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춘계(春溪)와 천묵(天默)으로부터 내전과 외전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불경은 물론 세속의 학문까지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명성은 승도들 사이에 자자하였다. 그 뒤 당대의 대강사인 유일(有一)과 정일(鼎馹)로부터 불교공부를 계속하였다. 27세 때 정암(晶巖)의 밑에서 선리를 터득하여 문신(文信)의 적손(嫡孫)이 되었다. 30세 때 두륜대회(頭輪大會 : 두륜산내의 승려대회)를 주도하였음을 보면, 그 나이에 선(禪)·교(敎) 양종의 거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순조 1)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丁若鏞)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다. 정약용은 그의 비명(碑銘)에서, “『논어』 또는 율려(律呂)·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특히 『수능엄경(首楞嚴經)』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가장 잘하였다. 35세 때부터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1811년 가을, 병을 얻어 두륜산(頭輪山) 북암(北庵)에서 입적하였다. 제자에 색성(賾性)·자굉(慈宏)·응언(應彦)·법훈(法訓) 등이 있었으며, 모두 불교계의 거장이었다. 저서에는 『아암집』 3권이 있다. 5. 조선후기 백련사의 불교문화유산 조선후기에도 백련사는 몇 차례 중수되었다. 효종대(1650-1659)에는 현오(玄悟)가 서원(西院)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또한 영조 37년(1761)에 승당에서 불이 일어나 불전, 요사채 수 백칸이 불타 버렸는데, 그다음 해에 원담, 윤철 등이 별좌(別座)가 되어 사찰을 중건했다. 이때 공이 있는 승려로 가선대부 지정(智正), 주지 혜철, 붕관(鵬寬)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지방관으로 도운 사람은 강진현감 허휘, 병마절도사 홍약수, 수군절도사 신사엄·신광익이었고, 서울에서 도운 사람은 홍문관 교리 신사운 등 여러 사람이었다. 백련사 대웅전에 모서진 목조 삼존불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웅전 본존불 후벽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숙종 31년(1705)에 제작된 것이고,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삼장보살도는 영조 49년(4773)에 조성되었다. 응진전 앞 부도나 명부전 앞 춘파당 부도는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백련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승려의 부도로 보인다. 경내 동백숲 속에 부도가 4기 있는데, 이 가운데 월인당(月印堂) 부도는 대사 총신(聰信)의 묘탑(墓塔)으로 순조 4년(1804)에 건립되었다. 월인총신은 건륭대(乾隆代, 1736-1795)의 승려로 본래 미황사의 승려였다. 백련사에 머물렀을 때 글씨를 잘 쓴다는 선서(善書)의 이름을 얻었다. 융희(隆熙) 2년(1908) 서울에 거주하는 효령대군의 자손 이정재(李貞宰)가 효령대군이 절에 기부했던 답토 54두 2승락을 되돌려 가져가 버렸다. 이리하여 백련사는 사찰의 유지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만덕사지(萬德寺志)』는 6권 2책으로 된 백련사 사적기이다. 그 편집은 다산 정약용의 지도을 받아 아암혜장의 제자와 다산의 제자가 편찬한 것으로 편찬연대는 1817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 보인다. 만덕사지의 편찬에 다산은 모든 감정을 맡았고 학림(鶴林) 이청(李晴)이 권1·3의 자료 편집을 맡았다. 기어자굉(騎魚慈宏)이 권1·2·3과 권6을 자료에 따라 엮었으며 권4의 자료를 모았다. 제경응언은 권4·6을 교정하였고, 권5는 백하근학(白下謹學)이 엮었고, 별악승찬(鼈岳勝粲)이 교정하였다. 『만덕사지』의 내용은, 권1과 권2는 고려시대 백련사에 주석한 8국사의 열전이며, 권3은 주로 고려시대 백련사와 인연이 맺어졌던 인물들의 글이 실려 있으며, 권5는 사원규모 및 중수에 대한 기록이고, 권6은 백련사 승려 무외의 천태종 관계 논소(論疏)를 모은 것이다. 『만덕사지』는 조선후기 실학의 실증적인 방법의 영향을 받아 편찬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적기에 흔히 보이는 설화적인 사찰연기설화가 빠져 있으며, 또한 사원경제에 관한 자료 역시 그러하다. 『만덕사지』는 조선후기 유불상교(儒佛相交)의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덕사와 대흥사에서 배출된 학승들이 상호 교류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다산이 만덕사(백련사)와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불교사상이 상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