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합격의 꿀맛, 떠도는 쓴맛 게시기간 : 2021-06-2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6-21 14: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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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집에 못 가는 합격 후 생활 - 1765년 윤 2월 1일 한낮. 생원시 회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다음 날 2일, 영조는 경덕궁 경현당에서 합격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물어보았다. 합격자들은 자기 답안지 내용도 읊었다. 서울에서 과거에 응시했던 위백규는 합격자 발표했던 그날 저녁 7시 즈음에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그가 본 시험은 경의(經義)였다. 『주역』·『시경』·『서경』·『예기』·『춘추』 등 오경(五經)의 구절 중 한 부분을 뽑아 제시하고 그 포괄적인 의미를 서술하라는 것이 문제이다. 위백규가 치른 시험 종목은 경의 중에서 예의(禮義)였다. 『예기』에 있는 ‘고자무실기위고(故者毋失其爲故)’가 질문이었다. ‘친구가 된 이는 그 친구와의 우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기』「단궁 하」에 나온다. 공자는 친구 원양의 어머니가 죽자 곽을 수리하는 일을 도왔다. 그때 원양이 목곽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는 못 본 체, 못 들은 체했다. 친구를 책망하지 않았으므로 그와의 오랜 정의(情誼)을 지켰다는 내용이다.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노래를 부른 일, 심지어 어머니 시신을 모실 곽에 올라간 일 등은 정상적인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친구를 책망하지 않음으로써 우정을 깨 절교하는 데에 이르지 않았다. 위백규는 ‘공자가 원양의 행동을 못 본 체하며 꾸짖지 않고 예의가 아닌 행동을 덮어줌으로써 우의(友誼)을 잃지 않는 것은 성인다운 행동’이라는 답안을 썼다. 그리고 ‘생원삼등제오십구인(生員三等第五十九人)’이라는 성적으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생원시에서 일등 5인, 이등 25인, 삼등 70인으로 한정하여 모두 100명을 선발했는데 3등 59인이면 아주 높은 점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생원시 합격자 100명 안에 들었다는 사실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고향은 장흥이다. 서울과 장흥의 거리는 886리, 곧 360여 킬로미터이다. 지금도 서울에서 장흥까지 자동차로 적어도 4시간 이상 걸린다. 장흥도호부였지만 한양에 비하면 시골이었다. 위백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이때까지 거의 3년 간 서울 생활을 했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에서 수험생 생활을 했다. 아버지 위문덕은 아들의 수험 생활 뒷바라지에 헌신적이었고 아들의 과거 합격을 간절히 바랐다. 위백규(魏伯珪, 1727년~1798년)는 영조, 정조 때 사람이다. 자(字)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이다. 아버지는 위문덕(魏文德), 어머니는 오일삼(吳日三)의 딸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아버지는 백룡이 뜰로 내려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 이 꿈으로 인해 위백규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일찍부터 컸을 것이다. 서울에서 과거 시험 준비를 하는 위백규에게 시험을 포기하지 말고, 시험장에서 공손하게 처신하기를 경계했고 고향으로 내려오기보다는 서울에서 공부하며 성공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수십 년을 그렇게 하더라도 이뤄내는 것이 있다면 걱정할 게 없다고 토닥여 주기도 했다. 위백규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과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1765년 위백규가 생원시 3등제59인으로 입격하였음을 증명하는 백패. 윤2월 8일에 창방했다고 편지에 쓴 날짜와 백패 발급 날짜가 같다.
합격의 감격을 편지에 녹여 합격 발표 즉시 위백규는 세광이를 시켜 고향 장흥에 계신 아버지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였다. 자신의 수험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하며 아들의 합격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답답함을 빨리 풀어드리려고 했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 기쁨과 급한 마음이 녹아 있다. “세광이는 며칠에 도착하여 기쁜 소식이 담긴 편지를 전했느냐? 봄날이 점점 따뜻해지는데 부모님 건강은 어떠하시냐? 너희 동생들도 부모님 모시면서 공부하는 생활은 어떠한지. 초 8일에 창방(唱榜)했고, 11일에야 길을 떠났다. 13일에 소사(素沙)에 이르러 병계(屛溪)로 향해 가고 있다.”
편지의 첫 머리에서부터 자신의 합격 소식을 세광이가 언제 전했는지 묻고 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인 부모님의 건강과 동생, 가족들의 안부보다 희소식을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전달했는지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서야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소상하게 전한다. 윤2월 8일에 창방이 있었기 때문에 11일에야 서울에서 떠났다고 했다. 창방은 방방(放榜)이라고도 하는데 합격자에게 합격증서를 교부하는 일이다. 위백규는 합격증서를 받아 챙긴 후에 서울을 떠났다. 소사(지금의 평택, 천안 부근)를 거쳐 병계(예산의 덕산 부근)로 간다고 했다. 병계에 있는 스승 윤봉구(尹鳳九, 1681년∼1767년)에게 인사 올리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15일에 병계에 도착하여 윤봉구에게 인사 올렸고,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스승의 재촉으로 곧바로 병계를 떠나 17일에 역참에서 잤다고 하였다. 서둘러 장흥으로 가 아버지를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1765년 윤2월 합격 후 위백규가 동생에게 쓴 편지. 寄舍弟 世光 以何日到傳喜書耶/ 春日漸暄/ 父母主氣體候若何 諸君侍/ 學亦如何 兄 初八日唱榜 十/ 一日發程十三日到素沙 向/ 屛溪而去 直卿適値順下馬/ 直歸耳 才人則幷世光四人/ 山太味必以理喩之 使不得更濟/ 好矣 宴日必無用妓樂 須招本/ 官三絃手亦好 其日婦女皆髻/爲可 十八日間 似自德山出礪/ 山站 當自金山寺 經笠巖/若可迤觀 南平雲興諸寺亦/ 爲之 仍向雙溪 礪山以下/日子須逕度 而完到門日/ 也 馬鞍迓來雙溪 則似好矣/ 館主人亦下來耳 餘忙草/ 합격 잔치에 대한 기대, 설렘과 걱정.
시험은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시험 결과는 더 긴장하게 만든다. 시험 결과가 삶의 진로를 결정하고,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나 명성과 연계되면 그 긴장감은 더 강하다. 생원시 합격자 명단에 들어갔으므로 대과 곧 문과로 나아가는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문과를 가장 중시했다. 생원시는 소과(小科)이다. 대과-문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이었으므로 문과에 대한 예비시험 성격이 있었다. 문과에 비해 사회적 인정이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대과인 문과 시험을 통과했을 때 ‘급제’라고 했는데 소과 합격을 의미하는 단어는 ‘입격(入格)’이었다.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들었다.’라는 의미인 듯하다. 하지만 생원시 합격만으로도 양반 체면과 위상을 지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어서 자축하거나 축하 받기에 충분했다. 잔치는 집안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백규는 합격 소식이 잘 전해졌는지 물은 다음 잔치에 대해 언급한다.
김홍도 <무동>속 삼현육각수. “직경이는 마침 내려가는 편이 있어서 곧바로 돌아갔다. 재인(才人)은 세광이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다. 잔치날에 기악(妓樂)을 쓸 필요는 없고 고을의 삼현수(三絃手)를 부르는 건 좋겠지. 그날 부녀자들은 모두 비녀로 머리를 장식해도 될 것이야.”
세광이를 포함하여 재인이 네 명이라 언급한 것을 보면 잔치에 재인 네 명을 동원하여 축하 공연을 하려는 듯하다. 공연에 음악이 없을 수 없다. 기생들이 동원되는 기악을 쓸 수도 있고 삼현수를 부를 수도 있다. 위백규는 기생 없는 삼현수들로 충분하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 잔치는 합격자가 고향집에 도착하는 날에 베푼다. 그래서 잔치 이름을 ‘도문(到門)’ ‘도문연(到門宴)’이라 한다. 잔치 주인공이 집 대문에 도착했음을 축하하는 잔치라는 말이다. 도문연에는 가족, 친척뿐 아니라 지방 수령을 포함하여 인근의 사람들까지 모여든다. 가족과 친척, 지방 수령은 잔치에 초대되었고 잔치 소문을 들은 이들은 구경하러 온다.
잔치의 규모는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숙종 때 사람이었던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묘사한 도문연은 노래하고 춤추며(歌舞) 마당에서는 광대들의 재주가 펼쳐지는 등 밤새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김유(金楺, 1653년~1719년)는 ‘도문연을 구경하러 온 마을 백성들이 마당 가득 빽빽이 서서 서로 잘 보려고 다투었다.’고 묘사했다. 정조는 도문연 때문에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는 일도 허락해주었다. 이처럼 도문연은 기생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춤, 무동들의 춤, 악사들의 음악, 광대들의 재주놀이 공연 등이 포함되었다. 볼거리나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어느 한 집안의 도문연은 마을 또는 인근 사람들에게 ‘가서 구경할 가치가 충분한 스펙타클한 행사 내지 공연’이었다. 위백규는 자신의 도문연에 적어도 삼현수 출연과 광대의 공연 정도는 포함할 생각이었다. 여기에 드는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말기 지규식(池圭植)이 쓴 『하재일기』에 ‘석촌 김 교관이 도문연에 쓸 돈 1,500냥의 빚을 얻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위백규의 아버지도 ‘도문연에 쓸 도구들이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빚으로 빚은 빛나는 잔치’이기도 했던 듯하다.
중간부분에 과거급제자 뒤를 따르며 풍악을 울리는 악대가 보인다. 잔치 주인공, ‘행복한 떠돌이 되다’ 도문연은 개인이나 가문에 큰 의미가 있는 잔치여서 신중하게 날짜를 정했다. 잔치 이름이 도문연-집에 도착하는 날 열리는 잔치였으므로 잔치 주인공인 합격자도 마음대로 집에 도착해서도 안 되었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위백규는 덕산-여산-금산사-입암 등을 거쳐 고향으로 갈 노정을 언급하면서 ‘여산 아래쪽부터는 (내가 가는)날짜를 잘 헤아려서 집에 도착할 날을 정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의 아버지도 잔치 날짜와 관련하여 아들에게 타일렀다. “서울에서 떠난 이래로 한결같이 잘 있겠지? 네가 집에 도착할 날은 3월 19일로 정했다. 일 있는 날을 제외하니 마침 이 날이 쓸만하더구나. 그 날짜가 좀 멀기는 하다마는 어쩔 수 없이 이 날로 했다. 장흥 경내로 들어오면 우선 유치에 있는 친구를 만나고 지사(智寺)에서 지내거라. 그리고 날짜를 잘 헤아려가며 장서(長西), 부평(富平) 등으로 돌고 용계(龍溪)와 부산(夫山)으로 돌아서 오너라. 집에 도착하기 며칠 전 즈음에 성으로 들어와 성주를 뵙고 인사드리고 그 다음 날 알성(謁聖)한 후에 날짜를 맞춰 가며 집으로 향하면 될 것이다.”
위문덕은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고 윤2월 19일에 편지를 썼다. 도문연 날짜를 3월 19일로 정했다고 알렸다. 또 아들이 장흥 경내로 들어온 다음에 돌아다닐 지역도 명시하였다. 유치로 가서 친구를 만나고 가지사에서 지내고, 장서, 부평, 용계, 부산 등으로 돌아다니라고 일렀다. 성 안으로 들어오면 성주를 뵙고 알성하라고 했다. 알성이란 공자를 뵙는 일인데 향교의 대성전에서 하기도 했다. 도문연 날짜에 집에 도착하도록 하기 위해 장흥의 여러 지역을 빙 돌아보라고 했다. 위백규는 11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15일에 예산 덕산에 들러 21일에 나주에 도착했다. 그는 이 편지를 21일 나주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10여 일 만에 서울에서 예산을 들러 나주에 도착했다. 그 속도라면 나주에서 장흥까지는 금방 갈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도문일을 3월 19일로 잡았으므로 윤2월 21일부터 3월 18일까지는 집에 가지 못했다. 3월 19일에 맞춰 집에 도착해야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빨리 왔건만 졸지에 떠돌아다닐 신세가 된 것이다. 난처하기는 아버지 위문덕도 마찬가지였다. 윤2월 22일에 쓴 편지에서는 아들의 여정 속도가 빠른 데 대해 놀랐다. “애초에 당연히 네가 그믐쯤에야 장흥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해서 종놈을 보내 그저께 여산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빨리 도착했다니 의외로구나. 도문잔치에 쓸 것들은 마치 다 쓸어 없애버린 듯하기가 매우 심해서 도문할 날짜를 오는 3월 19일로 정했다.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보니 마땅하고 좋은 날이 없어 부득이 이렇게 했다. 동산이가 갖고 간 편지에 모두 말했으니 도문하기 전 이리저리 다니는 방도는 네가 마땅히 알아서 해라.”
위문덕은 윤2월 말쯤에야 아들이 장흥 경계에 들어오리라 예상했고 종을 시켜 20일에 여산에서 기다리게 조처해 놓았다. 그런데 아들이 일찍 여산에 도착했다. 그때 위백규는 집에서 보낸 종이 도착하지 않아 내심 걱정했다. 아버지 예상과 아들의 여정 속도가 어긋났던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일 없는 날도 제외해야 하고 도문잔치에 쓸 것들이 거의 없어 새로 장만해야했다. 그에 맞춘 날짜가 3월 19일이다.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아들에게 ‘알아서 다니다가 집에 오라.’고 통보했다. 위백규는 그날까지 집에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여기저기 빙빙 돌아다녀야 할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행복한 떠돌이’가 아니었을까. 도문 잔치는 좋은 날을 가려 정한다. 합격자가 도착하는 그날이 잔칫날이 아니다. 합격자는 오히려 잔칫 날에 맞춰 여정을 별도로 조정해야했다. 소과 생원시든 대과 문과이든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합격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다. 시험 응시자는 많았고 합격자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합격은 양반으로서의 체면과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고 면역(免役)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수험생들에게 합격의 감격은 서울 수험생보다 몇 배나 더했을 터이다. 수험생활이라는 고생 끝에 찾아온 합격은 달디단 꿀보다 더 달았을 터이다. 고향 근처에서 한 달 정도 집 주위를 배회하는 ‘떠도는 생활’의 쓴맛쯤이야 이 꿀맛으로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1765년 윤2월 과거 합격 후 위백규가 아버지 위문덕에게 올린 편지. 아버지의 요청에 부응하여 유치, 가지사 등을 들르고 성주와 친지들을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卄一日午後 於羅州遇同奴 伏承/ 下書 伏審花辰/ 父母主氣體候萬安 伏喜萬萬 卽未審 一晝夜間 仍/ 膺蔓福否乎 伏慕區區 無任下誠 子 榜後諸節/ 及發程大槪 直卿想已細達矣 盖以月之十五/ 日 拜屛溪丈席 極加獎慰 亦以離庭日久 盤/ 纏艱嗇 聽其勿淹 故其夕出宿旅幕 遂以趕/ 程 十七日宿站 到礪山則家奴尙未到 故心雖知/ 其勢之似然 而亦不能無疑慮 等待之意 遂從/ 大路直下 過金溝站 馬有蹇勢 日益不瘳/ 故又不得徑歷山路 而纔到長城 馬病遂劇 四/ 蹄俱澁 遂換跨泮主所乘 幸得無事到稅/ 于妹家 而雨亦有知不困人於中途 斯可謂相/ 之者存耳 到門日 若進定則好矣 而亦當/ 隨宜 不必拘於近遠也 鬣者四蹄 俱有殢/ 血 急招獸醫 趂此暇針療 方可用於遊衘/ 時 須以他馬着鞍子 下送於行到處 則/ 事皆便順矣 擬以雨止後 徃留迦寺 以待馬/ 至 若使牽馬者 歷詗于有耻場邊旅幕 則必不/ 迷所向矣 京債則七十兩 而衣服別無新着 還/ 可自笑也 馬至後 當先謁城主 然後周訪親知/ 伏計 餘萬 謹當隨下敎依行 不備伏惟/ 下鑑 上書/ 乙酉閏月二十三日 子 伯珪 上書/ <도움 받은 글>
권수용 편(2020), 『장흥 장흥위씨 존재고택』(호남한국학 기초자료해제집2),한국학호남진흥원.
『방촌유물전시관 기증.기탁품 도록』 권수용 편역(2020), 『(장흥 존재고택 가전 간찰로 보는)향촌 유학자의 교유』, 부크크. 규장각한국학연구원(2009), 『조선 양반의 일생』, 글항아리. 한국학중앙연구원(2015), 『試券시권-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김덕수(2016), 「조선시대 放榜과 유가에 관한 일고」, 『고문서연구』49. 윤선영(2020), 「조선시대 과거 생원시의 한 과목인 오경의 시제 소고」, 『남명학연구』67.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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