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기억] 세계를 담은 존재 위백규의 『환영지(寰瀛誌)』 게시기간 : 2021-06-30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6-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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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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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도」(天下圖)」를 접하고서 지금 우리들의 손안에는 세계가 있다. 아니 우주가 있다. 지구촌시대를 넘어 우주촌시대에 다가가고 있다. 그런 우리들에게 세계지도는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만 알고 있던 옛날 조선의 선비들에게, 갑작스레 접하게 된 서양의 세계지도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호남의 천재 실학자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천하도」를 접하고서 “끝내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라 하여 어이없어 했다. 그럼에도 이를 의심할 수 없어 마침내 책에 베끼고, 이를 계기로 『환영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1) 다만 그때 보았던 「천하도」를 「이마두천하도(利瑪竇天下圖)」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이 「천하도」를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로 잘못 이해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환영지』는 여러 판본이 있다. 정서본에는 「이마두천하도」가 실려 있지만, 목판본에는 지도가 없다. 경성전위도(經星躔位圖) 다음에 지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차간의결구구주도(此間疑缺九九州圖)”라고 하여 “이 사이에 구구주도가 빠진 것으로 의심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대신 「구구주도(九九州圖, 81州를 그린 지도)」에 대한 지지(地誌)가 길게 붙어 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목판본에는 황명십삼성총도(皇明十三省總圖)에 이어서 서양제국도(西洋諸國圖) 및 관련 지지내용이 추가되어 있다.2)
『환영지』가 맺어준 정조 임금과의 인연 위백규는 1796년(정조 20) 나이 70이 되어서야 정조 임금을 만나 늦게나마 사적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그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책이 바로 『환영지』였다. 1795년(정조 19) 11월, “호남에 또한 가히 쓸 만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정조 임금의 물음에 우승지 임제원(林濟遠)이 답하기를, “근래 인재가 텅 비어버림이 호남보다 심한 곳이 없습니다만, 그 중 장흥의 위백규는 평소에 박식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으며 그가 지은 『환영지』와 백 권의 책들은 볼만한 것이 많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환영지』와 백 권의 책을 내각(內閣)에 올리도록 하고 관직도 제수하였다.3) 그리고 나이 70세 되던 해에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하였다.4) 이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기 위해 입대하여 정조 임금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만남의 자리에서 정조 임금은 "지난번 『환영지』 한 책을 보았는데 역시 박식함을 증험할 수 있었다.”5)
고 하여 『환영지』를 거론하였다. 『환영지』는 어떤 책이기에 이렇듯 관심을 불러일으켰을까? 『환영지』는 위백규가 32세 때인 1758년 제작을 시작하여 44세 때인 1770년에 필사본(정서본)으로 완성하였고, 이후 이를 보완하여 61세 때인 1787년(정조 1)에 간행하려고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이루지 못하였다. 더구나 정서본을 내각에 올리고 나니 집안에는 미완의 초고만 남아 있었다. 그후 7·8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족손 위영복(魏榮馥, 1832∼1884)이 신앙여(申仰汝)에게서 정본을 모사(摹寫)해 놓은 책을 발견하고 민멸할까 우려하여 1882년 목판으로 간행하게 되었다.6) 『환영지』는 어떤 책인가? 먼저 ‘환영(寰瀛)’이란 무슨 뜻일까? 환영의 한자말 뜻은 천하 즉 전세계(全世界)를 가리킨다. 이때 환은 땅을, 영은 바다를 각각 뜻한다. 위백규는 『환영지』 서문에서 “위로는 하늘부터 아래로는 땅까지 광대한 공간이 극치를 이루고, 지금부터 아주 먼 옛날까지 유원한 시간이 극치를 이룬다. 광대한 공간과 유원한 시간을 합한 곳에 인간 세상이 있다.”
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만물 중에 가장 영험하다는 인간조차 천지의 광대함과 시간의 유원함을 결코 다 알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천지의 동쪽 끝, 명해(溟海)의 구석진 모퉁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천지의 광대함에 비하면 장구벌레나 게딱지 같을 뿐이며, 고금의 유원함에 비하면 쓰르라미 신세 같을 뿐”이라 하여 궁벽한 시골에 살고 있던 위백규가 시공을 알기는 더욱 어렵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던 터에 “내가 시골에 살며 한가한 날이 많아 우연히 「구구주도」를 열람하게 되었다.7) 끝내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것이 가공의 것인지 알 수는 없더라도 만약 작은 귀와 좁은 눈을 가진 사람이 억지로 그 사실 여부를 의심한다면 혹 (넓은 세상을 다녀보았을) 바다 자라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라고 생각하고는 … 중주(中州, 즉 중국) 13성(省)과 우리나라 8도(道)의 지도를 이어 붙여 놓았다. 또 천지와 고금 사이에 차고 쌓여서 얽힌 실타래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모아서 정렬하여 그 아래에 붙이고 이를 합하여 책 이름을 『환영지』라고 지었다.”
고 하였다. 목판본 『환영지』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보면, 상편에는 구천팔지도(九天八之圖)·천경성화도(天經成化圖)·경성전위도 등의 우주도와 중국 13성도(省圖), 서양제국도(西洋諸國圖), 요동도(遼東圖)·북막도(北漠圖)·영고탑도(寧古塔圖), 조선 8도도, 한양도,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탐라도(耽羅圖), 일본국·유구국(琉球國)의 지도 등 18개의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편에는 일원소장지수도(一元消長之數圖)·삼십육궁도(三十六宮圖)·이십사절도(二十四節圖) 등 시간, 각종 제도, 문물, 역사와 관련된 46개의 그림들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천문, 지리 등 공간에 해당하는 그림과 해설들로 상편을 만들었고, 하편의 경우는 “뒤에 덧붙여 놓은 여러 그림들은 비록 지도 종류는 아니지만,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주가 허투(虛套)가 될 것이며, 지도 또한 그 쓰임에 맞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라 하여 각종 문물, 제도 등을 도표로 만들었다. 특히 고금이나 역대 등 시간을 담은 도표들이 눈에 띈다. 이렇듯 천지의 광대함을 담은 상편에 이어서 시간의 유원함을 펼친 하편이 짝을 이루게 하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시간과 공간의 이중주를 담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상편이 우(宇)라면 하편은 주(宙)이니, 곧 천지와 고금을 통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8) 그래서 발문에서도 공간과 시간, 즉 우주를 포괄하고 사리를 통달했다는 의미를 담아 “‘환영’이라 일컬어 통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림 6】 목판본 『환영지』 표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비록 시골에 살아 세상 물정에 어두운 우유(迂儒)였지만 세계를, 그것도 시공을 담아내려는 담대한 시도를 하였던 것이고, 그런 뜻을 『환영지』라는 제목에 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를 담은 담대한 책, 『환영지』 『환영지』는 대표적인 세계지리지로 꼽힌다. 어떻게 세계를 담으려는 담대한 책을 기획할 수 있었을까? 우선 서양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지리지식이 전래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비롯한 서구식 세계지도와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의 『직방외기(職方外紀)』,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의 『곤여도설(坤輿圖說)』 등의 세계지리서도 조선사회에 전래되면서 세계인식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직방세계를 넘어서는 이역(異域)에 대한 기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세계지리 저술의 선구적 저작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볼 수 있다. 위백규가 목판본 도면과 지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지봉유설』을 읽고 많이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 『지봉유설』에는 없는 ‘도면’ 즉 그림을 그려 덧붙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위백규의 『환영지』에는 원형의 「천하도」에 수록된 나라들과 알레니의 『직방외기』에 수록된 이역(異域)의 지명, 서구식 세계지도에서 볼 수 있는 나라들에 대한 기술이 수록되어 있다. 『환영지』의 세계지리 내용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서명응(徐命膺)의 『위사(緯史)』에 실린 세계지리 내용보다 수록 내용의 정확성이나 방대함에서는 떨어지지만 다양한 지도를 같이 수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9) 그렇다면 서양을 통해 들어온 세계지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위백규는 「구구주도」에 대한 설명에서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음양가(陰陽家)의 대표적인 인물인 추연(騶衍, 기원전 305?∼240?)의 대구주설을 따왔다. “추연이 말하기를 ‘중국의 사방바다를 비해(稗海)라고 한다. 그 밖에 대륙이 둘러싸고, 대륙의 바깥에는 또 대영해(大瀛海, 큰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 바야흐로 이곳이 땅의 끝이다’라고 하였다”라 하고 이어서 “서양인은 중국의 서남해를 지중해라고 부른다. 그들은 말하기를 “국토가 바다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지중해이다. 그 바깥에서 바다가 국토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바야흐로 환해(寰海)이다”라고 하니, 추연의 설과 대략 같다.”10)
라 하였다. 말하자면 비해가 지중해에, 그리고 대영해가 환해에 대칭한다. 위백규는 9개의 대륙과 81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추연의 대구주설을 비해(裨海)- 대영해(大瀛海)(地中海-寰海)라는 동심원적 구조에 초점을 맞춰 해석한 것으로 보고 있다.11)
【그림 7】 추연의 대구주설을 표현한 모식도이다. 아홉 개의 대륙을 각각 감싸는 비해(裨海)가 있고, 그 밖에서 둘러싸는 것이 대영해(大瀛海)이다. 오상학, <추연의 대구주설>(우리역사넷)에서 인용. 백과전서파의 영향 『환영지』와 같은 유형의 책을 유서(類書)로 분류한다. 즉 백과전서이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의 학계에서는 실증과 고증을 중시하는 백과전서적 학풍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선구적 저작으로는 1609년 중국에서 간행된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들 수 있고, 그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이 완성되어 조선후기 유서의 선구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10년 정도 후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3)가 간행되었다.12) 이런 흐름 속에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 중에는 백과전서파라고 불릴 만한 학자들이 다수 나타났고 그들에 의해 백과사전적인 책들이 발간되었다. 호남에서도 천문, 지리, 역대제도와 문물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연구하고 독자적인 경지에 오른 백과전서파 인물들이 많았다. 존재 위백규도 그러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환영지』를 보면, 존재 역시 『지봉유설』을 읽어 그런 유서류에 익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설(圖說) 백과사전의 한 유형 『환영지』는 백과전서식이면서도 특히 ‘도설(圖說)’ 백과전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떻게 그림을 활용하려 했을까? 여기에는 『삼재도회』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삼재도회』는 명말에 출간된 도설백과사전으로 특별한 존재이다. 그림을 앞에 두고 설명을 뒤에 두어, 그림과 문자가 서로 조응하도록 하였다. 청대의 도설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범례에서는 “옛 사람들은 왼쪽에 지도를 두고 오른쪽에 역사서를 두었으니, 국가의 영토나 산천을 공부하는 데에는 지도가 필수적이다”라 하였는데, 바로 이런 경향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13) 『삼재도회』가 당시로서는 새로운 지식인 서양과 세계의 지리에 관련된 지식을 얻는데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조선에서 『삼재도회』를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고 『환영지』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환영지』에서 그림과 설명이 짝을 이루게 구성하였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다만, 상편은 도에 이어 설이 붙었는데 하편은 도만 있고 설은 없다. 이를 보면 설보다 도를 더 중시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나아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환영지』가 지니는 독특한 의미는 크다. 호남 실학의 맥 『환영지』의 목판본은 범례를 둠으로써 훨씬 체계화하였고, 인문지리서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14) 그리고 이를 목판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하였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존재의 스승인 윤병구의 세계지도에 대한 관심, 황윤석의 유서학적 지식 등이 『환영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런 경향은 훗날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의 『만국전도』, 신경준의 『여지고(輿地考)』 등을 통해 호남실학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런 맥락이 호남 실학의 전통을 이루었다. 『환영지』는 무엇보다도 궁벽한 시골 선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심을 갖고 세계를 담는 신경향의 책을 엮어낼 수 있었다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천관산의 영험한 정기가 있어 담대한 『환영지』를 펴낼 수 있지 않았을까? 1) 『환영지』의 서(序). 『환영지』의 원제는 『신편표제찬도환영지(新編標題纂圖寰瀛誌)』이다.
2) 『환영지』의 판본과 그 차이에 대해서는 배우성, 『조선과 중화-조선이 꿈꾸고 상상한 세계와 문명』(돌베개, 2014) 중 4장 「『환영지』가 구성한 세계」에 상세하다. 여기서는 이 글을 많이 참조하였다. 3) 실제로 그의 저술이 모두 얼마인지, 그중 몇 권이 내각으로 올려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4) 『승정원일기』 1758책(탈초본 93책), 정조 20년(1796) 1월 25일 39/49 기사. 5)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1796) 3월 6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1760책(탈초본 93책), 정조 20년(1796) 3월 6일 87/91 기사. 6) 위영복이 쓴 『환영지』의 발문에는 그 쓴 시기를 ‘숭정후 사임오(崇禎後四壬午)’라 하고 있다. 이는 통상적으로는 1822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위영복의 활동기간과는 차이가 크기 때문에 1882년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해석하려면 ‘숭정후’를 ‘숭정갑신후’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숭정후’라는 표현은 ‘숭정기원후’ 또는 ‘숭정갑신후’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후자의 의미로 보면 1882년이 된다. 7) 존재의 스승인 윤봉구(尹鳳九)는 「답학산성공(答鶴山成公)」(『屛溪集』 권32, 書)에서 “대명 초에 마테오 리치라는 사람이 서양국으로부터 왔는데,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해의 바깥을 두루 유람하였으며, 해외제국지도(海外諸國地圖)를 만들었는데, 그 인쇄본이 세상에 돌아다닌다”라고 하였다. 윤봉구가 어떤 지도를 보고 이렇게 말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마테오 리치의 지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고, 이는 그 제자인 존재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배우성, 앞 책, 471쪽 참조. 8) 배우성, 앞 책, 492∽94, 498쪽 참조. 9) 오상학, 「조선후기 세계 지리지에 대한 시론적 고찰」(『규장각』 43, 2013.12), 246, 254쪽. 10) 『寰瀛誌』의 「九九州圖」에 대한 해설 중 「附四海」 鄒衍曰 中國四方之海 是號稗海 其外有大陸環之大陸之外又有大瀛海環之 方是地涯云 西洋人以中國西南海 號爲地中海 其言曰 國土抱海 故爲地中海 其外海抱國土者 方爲寰海 與鄒衍說略同 11) 김봉곤, 「『寰瀛誌(환영지)』를 통해 본 存齋 魏伯珪의 역사지리인식」(『역사와 실학』61, 역사실학회, 2016.11), 54∼55쪽. 12) 하우봉, 「동아시아의 백과전서파 실학과 황윤석」(『韓國實學硏究』 40, 韓國實學學會, 2020), 349쪽. 13) 이 점에 대하여는 高仁德, 「조선시대에 있어서 도설백과사전 『三才圖會』의 수용」(『중국어문학논집』 77, 중국어문학연구회, 2012.12), 620쪽 참조. 그림과 문자의 결합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고인덕, 「명말 도설백과사전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의의 –그림과 문자의 결합」(『아시아문화연구』 28,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2.12) 참조. 14) 김봉곤, 앞 글, 52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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