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다시 읽어 보는 나주 금성토평비 게시기간 : 2020-12-2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12-18 15:5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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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관군이 동학농민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 1893.11.25~1895.9.21 재임)이 여러 장령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농민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짓고 글씨는 송재회(宋在會)가 쓰고 제액 전서는 송재면(宋益勉)이 써서 1895년(고종 32)에 세웠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90년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된 나주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지금은 나주목 금성관 한 켠에 잘 정비되어 있는 비석군에 있다. 문집인 『송사집』에는 ‘평적비(平賊碑)’라 제하였다. 나주목사의 행적을 기리는 점도 있고 유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동학농민군과 대척점에 있기는 하다. 그래서 ‘토평’이고 ‘평적’이라 한 것. 동학농민군은 ‘주어’가 아니었던 셈. 그런데도 동학 연구에 중요하고 문화재가 된 것은, 동학농민군측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그만큼 한정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비문의 내용 한 구절을 보자. “성을 지키려는 장졸의 사기가 날로 더해져 한사람이 백 명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여서 모두들 한번 싸우기를 원하였다. 처음으로 적과 무안에서 싸워 여춘(汝春, 汝衆)이 머리를 바치고, 두 번째 싸움으로 나주 서문에서는 최경선(崔敬善, 慶善, 景善, 敬先)이 밤중에 도망가고, 세 번째는 사창(社倉)에서 이겨 그 근거지를 불태우고 네 번째 싸움으로 용진산(聳珍山)에서 오권선(吳權善)이 몸만 겨우 빼내었고, 다섯 번째 고막(古幕) 싸움에서는 패해 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고, 여섯 번째 나주 남산 싸움에서는 기세만 보고도 스스로 무너졌다. 관군이 출동할 때는 항상 많이 죽이는 것을 경계하여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지 아니하고, 겁을 주어 귀순시키고 무기와 장비를 빼앗으니 적 또한 사기가 떨어져 재기할 힘이 없었다.” 나주 지역 여러 곳에서 접전을 벌린 내용이다. 그런데 정황만 나열되었지 실제로 전투의 결과는 기록이 안되어 있다. 심지어 “관군이 출동할 때는 항상 많이 죽이는 것을 경계하여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지 아니하고”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나주지역의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접전 때는 인명의 희생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다루는 글도 나오게 되었다. 그래도 ‘전쟁인데 그랬을까.’ 궁금증은 있었다. 더욱이 저 비문에도 ‘고막 싸움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는 표현도 있으니, 그 내용은 알 수 없을까. 그런데 새로 찾은 기록을 통해서 중요한 내용들이 드러났다. 호남초토영의 동학농민군 포착[포살] 관련 문서를 통해서이다. 나주목사가 겸임하던 호남초토사가 중앙부서에 전황보고 문서이다. 기존에 2종이 알려져 있었는데 호남초토영 관할의 전라도 각 군현과 기관에서 동학농민군을 현지에서 포살[총살]하거나 압송 구금 처형하는 애용이다. 1894년 12월과 1895년 1월에 보고한 문서이다. 최근에 1894년 11월 보고한 문서를 확인하였다. 이 문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1년께 구입한 것이라 하는데 20여년이 지나도록 ‘보관’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서의 제목은 『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 630)이다. 크기는 세로 37.2cm, 가로 21.5cm이다. 『나주 동학농민혁명 재조명과 세계시민적 공공성구축』-자료구축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과 나주시가 주최하는 한일 국제학술대회를 앞 두고 소장품 열람허가(국립중앙박물과 유물관리부-4028, 2020,10.19)를 받아 열람(2020.10.23) 하였다. 10월 28일 「동학농민혁명군의 나주로의 압송과 처형」의 주제로 발표하였다. 내용은 1894년 4월 6일부터 11월 26일까지의 동학농민군 포살과 노획한 즙물, 전투에 참여한 출전 장령 성명질 등을 정리한 문서이다. 지금까지 나주 지역 내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의 접전에 대한 기록은 있었으나 포살 수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문서를 통해서 765명의 동학농민군의 희생되었음을 처음 확인한 것이다. 고막포전투에서는 어찌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지 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문서임에도 수백명이라 하였다. 이 ‘수백명’을 최소 단위인 100명으로 상정하여 합친 수치가 765명이다. 어쩌면 1천명이 넘을 수도 있겠다. 4월 26일에는 나주 서쪽 30리 무안 경계에 나아가 토벌할 때 적당 생금 30명 내에 3명은 [전라]우진영에서 효경(梟警)하고 27명은 자읍결과(自邑結果) 하도록 했다. 같은 날에 노획한 것은 염주 5건, 발우(鉢盂) 7개, 통문축 상자 1, 책자 5권 등이다. 7월 5일 서문(西門)에서는 포살 109명, 10월 21일 광주 침산(砧山), 사창(社倉)에서는 포살 23명, 11월 11일 적량(赤良) 용진산(聳珍山)에서는 포살 21명, 11월 17일 수다면(水多面) 호장촌(虎藏村)에서는 포살 86명, 천답사(踐踏死) 43명, 고막포교변(古幕浦橋邊) 낙수사(落水死) 수백명, 11월 24일 금안면(金安面) 남산촌(南山村) 이로면(伊老面) 하촌(下村) 포살 353명 등이다. 353명 포살로 희생 당한 금안면 남산촌, 이로면 하촌 전투의 경우 기존 알려진 기록에는 다음 내용처럼 포살 현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765명의 희생자는 일본토벌대가 나주에 오기 전의 일이다. 즉 나주목사가 겸임하던 호남초토사의 지휘아래 호남초토영과 나주목의 관군들이 포살 장령이다. 끝에 전투지 별로 장령들의 성명까지의 정리되어 있다. ‘금성토평비’가 관군의 입장이 반영된 유학자가 지은 기록이라 하지만 거기에도 ‘고막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고 할만큼 처절한 현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이 문서를 접전 장소와 일자별로 정리해 본 것이 다음의 <표1>이다. <표1> 1894년 4월~11월 나주 지역 동학접전지 일자별 장소와 포살자 현황
이 문서는 호남초토사[민종렬]가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호남초토영에서 마지막 단계에 농민군 토벌전을 벌인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보고자는 초토사[招討使 署押]이지만 관인은 ‘나주목사지인(羅州牧使之印)’이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미 10월 28일에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초토사로 차하하여 호남 우도(右道) 연안의 각 고을을 지휘해서 비적을 소탕하는 데 전심하게 하자고 하니 윤허를 내린다.(『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10월 28일 신미.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의정부에서 초토영에 내리는 관(關)문서도 나주목사에게 보내고 있다. 호남초토사가 관할 경역은 전라우영의 관할권인 전라우도 지역이지만 나주목사가 호남초토사를 겸임하고 있어서이다. 당시 의정부에서는 이해 12월 말경 순무영을 해체하고 군무아문에서 마지막 농민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이 관문은 이 사실을 나주 초토영에 거듭 알리고 조치를 지시한 내용이다.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11』) 이 문서에는 출전 장령 성명질이 일자별로 기록되고 있다. 나주목의 수성군과 호남토포영군, 호장 등 이서집단, 면 의거소 영수 등 직임과 함께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표2>은 출전장령의 직임을 전투지별로 정리한 것이다. <표2>1894년 4월~11월 나주 지역 동학접전지 출전장령 성명질 현황
나주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지역이라 중요성이 좀 떨어지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나주는 일본군토벌대의 본부가 전라우영에 주둔하면서이 전라도 각지에서 압송되어 온 동학농민혁명군이 처형을 당한 곳이다. 전봉준장군도 순창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다. 주요 지도자도 일단은 나주로 압송했다가 다시 보내져 구금 처형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주에서의 동학농민혁명군의 희생은 일본토벌군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이 ‘정설화’되다 싶이했다. 그런데 이번에 호남초토영 공문서가 확인됨으로써 일본토벌군이 나주로 들어오기 전에 초토영군과 수성군, 경군 등에 의해서도 8백명 가까이 살육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부터라도 ‘금성토평비’ 등 기존에 알려지고 조사 연구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이나 자료도 다시 읽어야겠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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