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완도 가리포진의 첨사들 게시기간 : 2021-02-17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2-15 13:5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
||||||||
최고, 최악의 첨사는 누구? 『가리포첨사선생안(加里浦鎭僉使先生案)』, 현존하는 유일한 수군진장 명부
【그림1】조선시대 수군진 역대 첨사의 명부로 유일한 『가리포진첨사선생안』 표지. 완도향교 소장. [완도문화원 제공] 지금 완도향교에는 조선시대 수군진 역대 첨사의 명부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리포진첨사선생안』이 있다. 이 선생안에는 1723년(경종 3) 7월 하순에 쓴 조빈(趙儐)의 발문이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즉 한 해 전인 1722년(동 3)에 조빈이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왔다. 그런데 그의 조부인 통어공(統禦公) 조유(趙猷)가 가리포첨사를 역임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그 사위 김중원(金重元)이 또 그 자리를 이었다. 이런 인연이 있어 가리포가 백 리 길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이라 직접 찾아가 옛 자취를 보고 싶었으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선생안을 보내주길 청하였다. 이에 선생안을 받아 손을 씻고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니 감격에 겨워 가슴 벅참을 이기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책이 너무 오래되어 낡아 이에 새로 책을 만들어 옮겨 적은 다음 돌려주면서 잘 보관하게 하였다. 이렇게 새로 만든 책이 바로 현전하는 선생안이다. 그리고 이 책에 그 후 부임해 온 첨사들의 명단을 추기하였다. 이 『가리포진첨사선생안』에는 1522년(중종 17) 초대 첨사인 이반(李班)부터 226대 명선욱(明瑄煜) 첨사까지 372년간의 가리포진첨사들의 명부가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첨사인 227대 이범규(李範珪)는 가리포진이 폐영되었기 때문에 선생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700명 금군(禁軍)의 일생 소망은 변장(邊將) 한 자리 첨사를 비롯하여 수군진의 만호‧별장을 통틀어 변장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즉 인사를 행하면서 말하기를, “700명 금군(국왕의 친위대)의 일생 소망은 오직 변장 한자리에 있을 정도로 변장 인사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서울과 지방의 영교(營校) 중에서 구근(久勤, 한 직책에 오래 근무함)한 자를 변장의 자리에 천전(遷轉, 임명)할 때에는 의당 얼마나 수고로이 사역(使役)했는지를 살펴서 배의(排擬, 추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고 하면서 “수고한 자와 편안한 자에 대한 대우를 균등하게 할 수 있도록[均勞逸之地事] 함께 규식을 정하라”고 각영에 분부하였다.1) “일생 소망이 변장 한자리”라고 할 만큼 금군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었던 자리였기에 그만큼 공정한 인사가 이루어지도록 강조하였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고른다고 골랐겠지만, 막상 변장에 대한 포폄은 갈라졌다. 가리포첨사도 물론 그 변장 자리였다. 어떤 첨사들이 있었나? 227명의 가리포첨사. 어떤 사람들이 가리포첨사를 맡았을까? 또 그들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최고와 최악의 첨사는 누구일까? 모든 첨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 알 수는 없다. 연대기 기록을 중심으로 확인 가능한 첨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손에 꼽는 첨사는 이순신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1591년(선조 24) 2월 1일자에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에서 진도군수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2)
고 되어 있다.3) 이순신은 첨사에 임명되긴 했지만 얼마 안 되어 좌수사로 발탁되어 갔다. 『가리포첨사선생안』에 유감스럽게도 그 이름은 없다.4) 때문에 가리포첨사로서 남긴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대신 아래의 기록이 자주 인용된다. 즉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선조 29) 윤8월 24일 『난중일기』의 기록과 이를 인용한 연대기의 다음 기록들이다. 진의 주봉(主峰)에 망왜대(望倭臺)가 있는데, 대에 오르면 원근의 여러 섬들을 역력하게 살필 수 있어 충무공 이순신이 참으로 호남 제일의 요충지라고 말하였다.5)
이런 기록들 덕분에 가리포진이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이란 별칭을 얻었다.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싸운 관계로 25대 정걸(丁傑), 47대 이억기(李億祺) 등도 자주 거론된다. 정걸은 36대 첨사도 지냈다. 그밖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가리포첨사들은 49대 이필(李䟆)처럼 싸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퇴각하는 일도 있었고,6) 56대 이영남(李英男)처럼 노량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 등과 함께 탄환을 맞고 죽기도 하였다. 이처럼 때로는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5대 김인우(金仁佑)처럼 “그 관장하는 섬에 왜선이 두 번 몰래 나와 사람을 살해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잡지 못하였으므로 …”7)라는 직무태만을 이유로 파출(罷黜)시키거나 문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가 더 많았다. 55대 이응표(李應彪)는 훗날 전라우수사까지 오르지만, 가리포첨사였을 때 당시 전라우수사였던 이억기와 함께 칠천량해전에서 큰 싸움을 치렀는데, 그때 이응표는 그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는 먼저 도망쳐 버려 주장(主將)인 이억기가 패하여 죽게 하였다고 비난받았다.8) 가리포첨사는 126대 장석처럼 재목작벌 차사원(材木斫伐差使員)이 되기도 했고,9) 154대 임세재(林世載)처럼 가포 차사원(價布差使員)이 되어 농사 형편을 조사, 1필가의 값을 판단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10) 최고의 첨사는? 공을 세웠다고 기록된 첨사들 중에서 찾아보자. 59대 최강(崔堈)은 병선(兵船)과 전기(戰機, 전투기계)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주사(舟師) 즉 수군의 모범이 되었다고 상을 받았고,11) 126대 허전(許㙉)은 인명을 구하고 잘 요량해 재산을 불리거나 사나운 호랑이를 붙잡는 등의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12) 허빈(許賓)은 군기를 별도로 비축하였거나 인명을 살린 공으로,13) 129대 이만백(李晩白)도 인명을 구제하였다고14) 하여 모두 절충장군을 가자(加資) 받았다. 215대 홍병덕(洪秉悳)은 가리포 민란을 수습했다고 포장(褒獎)하는 은전을 받기도 했다.15)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백성들이 계속하여 그 직에 있기를[仍任] 청하였던 첨사도 있었다. 114대 김정명(金鼎鳴)의 경우 선생안에 ‘치적표저(治積表著)’ 즉 치적이 현저하여 잉임을 청한 첨사로 기록되어 있어 주목할만하나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203대 박정희(朴鼎憙)는 전라감사 서상정(徐相鼎)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3년 동안 진(鎭)에 있으면서 일념으로 다스리기를 꾀하여 전함(戰艦)·군계(軍械)를 참마음으로 수리하고 무너진 성첩(城堞)과 기운 공해(公廨)를 차례로 보완하되, 비용은 번번이 박봉에서 덜어 내고 나르는 일에는 조금도 백성을 쓰지 않았습니다. 또 온 섬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힘써 편안하게 하고 따르게 하여 군사와 백성이 이에 힘입어 살았으니, 이처럼 뛰어난 성적에는 포장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고, 이제 임기가 끝나게 된 뒤로 뭇 백성이 다 잉임(仍任)을 소원하니, 특별히 잉임시키도록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게 하소서.
라 하였다. 고종이 윤허하였지만, 실제로 잉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첨사인 227대 이범규(李範珪)도 잉임시키도록 했지만, 곧 폐진되었기 때문에 잉임의 의미는 없었다. 수많은 첨사 중에서 누가 최고인지를 꼽으라면, 162대 진덕리(陳德履)가 그래도 가장 나아 보인다. 그는 금오산성 별장이었을 때, 녹봉을 떼내서 진휼에 보탰다 하여 특별히 통정대부로 품계를 올려 가리포첨사로 삼았다. 금오산성의 별장은 잔폐한 진영의 하찮은 관직에 불과하지만, “인재는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는 경우로 그를 특별히 구전정사(口傳政事, 왕의 구두 명령을 받아 벼슬아치를 임명하던 일)로 뽑아 즉시 부임케 하였다.16) 그는 첨사로 있으면서도 잔약한 읍과 척박한 진의 형편으로 다 무너진 성가퀴를 수리하기도 하고 형체가 없어진 성을 쌓기도 하였으며, 수문(水門)과 성루(城樓)도 모두 다 새롭게 하였으니, 이들이 수리한 것이 과연 실효를 거두었습니다. … 체성(體城), 옹성(甕城), 곡성(曲城), 여첩(女堞)을 신축하였으며 수문과 층루를 새로 짓거나 단청을 입히기도 하고 중수하거나 기와를 갈기도 하였으며, 해안의 돌길을 수축하고 교졸(校卒)의 삭료(朔料)를 지급하는 등 모두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17)
라고 하여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은전을 받았다. 또 그는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이 되어 제주목에 특별히 내려 준 곡식 1만 섬을 배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제주에 들여보낼 영광의 피모(皮牟) 1000섬 중에서 499섬 9말을 실은 배 1척은 전에 이미 들여보냈고, 선가(船價)까지 합친 500섬 6말을 실은 배 1척과 남평에서 이전(移轉)한 피모 1000섬 중에서 원래 납부한 200섬을 실은 배 1척이 소안도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곡물도 정실(精實)하고 배도 튼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윤2월 24일에 제주로 들여보냈습니다.18)
고 하듯이 이를 원만히 수행하여 가자하는 상전을 또 받았다. 다만 그가 공무로 인해 진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진이 빈 상태일 때 유진장이 표류인에 대한 문정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돌려보냈는데 이를 감독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또 한때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즉 1795년(정조 19)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이 보고하기를 진휼 정사에서는 두드러진 잘못이 없지만 작년 봄에 성을 수리할 때 창고의 쌀을 지급하여 양식을 도와주고는 가을에 가서 환곡으로 거두어들였으며 역가(役價)를 2전으로 약속해 놓고서 뒤에 가서 반으로 줄였다고 하여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으니 성이 있은들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의금부로 잡아다 처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진덕리의 원정(原情, 변론에 해당함)에 따르면 본진(本鎭)의 성가퀴가 모두 퇴락한 채 방치되어 터만 남아있을 뿐이었기에 제가 이곳에 부임한 뒤 여러 방면으로 경영해서 성가퀴와 동서의 문루를 작년 2월에 착공해서 5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공사에 동원된 토졸(土卒)들에게 매일 품삯 1전 5푼을 지급했을 뿐이지 애초 양미(糧米)를 보조로 지급한 적은 없습니다. 토졸 중에 처음부터 투입된 1,378호 외에 추가로 투입된 나머지 민호들 가운데 환곡을 받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부류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역에 합당한 품삯 외에 환곡을 받는 대상에 포함시켜 식량을 받게 하고 추수할 때가 되었을 때 규례대로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런데 어사가 이것을 지적하면서 양식을 보조하였다가 도로 거두어들였다고 말하였습니다. 품삯을 2전으로 약속하였다가 나중에 도로 반으로 깎았다는 일은, 순영(巡營)에서 비장(裨將)을 보내 적간할 때 제가 스스로 2,530여 냥을 마련해 두고 건기(件記)를 구별해서 작성해 두어 1전 5푼의 품삯이 그 안에 분명하게 있고 애초 반으로 깎은 실상이 없습니다. 한번 살펴보기만 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라 하여 꼼꼼히 변론하였다.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어사가 지적하여 밝힌 것이 설혹 말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첨사가 이룬 치적이 그의 죄를 덮어 주기에 충분하니 특별히 용서하고 풀어 주라” 하였다.19) 이처럼 정조가 “이룬 치적이 그의 죄를 덮어 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만큼 진덕리를 신뢰하고 있었다. 가히 최고의 첨사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최악의 첨사는? 그렇다면 최악의 첨사는 누구일까? 물론 간단한 기록만으로 단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최종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고 확인되는 사실(史實)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각종 물의를 빚어 파직 또는 교체되거나, 처벌된 첨사들이 여럿이다. 61대 정희현(鄭希玄)은 “군졸을 침학한 것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고, 장사치들과 교통하여 배를 만들어 물건을 실어다가 공공연히 주고 있으니 그의 범람하고 방자한 형상이 매우 놀랍”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20) 73대 이권(李綣)은 비변사의 공사와 관련하여, 남평의 격군(格軍)이 기한에 맞추지 못하였다는 죄로 나국(拿鞫)되었으며,21) 166대 김상흥(金尙興)은 “서리와 군교의 말만 편파적으로 들었”다고,22) 168대 우덕원(禹德遠)은 “전함을 개조하면서 상선(商船)들이 오갈 때에 청렴을 해쳤다”고,23) 170대 이운호(李雲祜)는 허위보고로,24) 202대 유형로(柳衡魯)는 3년 동안 있으면서 전혀 직임을 살피지 않아 서리배들이 멋대로 하고 패려한 무리들이 무단하였다고,25) 선파(璿派, 왕족의 후예)의 후예인 204대 이위소(李暐沼)도 “탐오한 것이 이미 1만여 냥이 넘어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다고26) 각각 처벌받았다. 낚시질을 일삼아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전라좌도 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이 209대 어상우(魚相愚)에 대하여 “관문(官門)에 아무 일이 없어 가끔 낚시질로 소일하기도 하니, 이는 모두 진무(鎭務)하고도 여가가 많이 남기 때문”이라 보고하였다. 이에 고종이 “만약 낚시질을 일삼는다면 정무(政務)는 대부분 내팽개치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심동신은 오히려 “바다 건너 작은 섬은 본래 번다한 정무가 없으니 내팽개친다고 논할 만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정사하는 데는 실로 과실을 저지른 일이 없었습니다”27)라 하여 옹호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의문이기도 하다. 가리포 민란을 야기한 최악의 첨사 1883년(고종 20) 11월 가리포에 민란이 일어났다.28)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의 장계를 통해 이를 재구성해 보면, 원인은 “탄환처럼 작은 섬은 더구나 흉년을 당하여 이미 안정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점점 이런 변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하여 “정상을 캐면 불쌍하지만 법으로 논하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29) 이 말을 들어보면, 많은 묵은 문제들이 쌓였다가 일거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까? 우선 충첩된 부담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리포가 있는 완도는 전선·병선·조선(漕船) 등의 재목인 황장목이 나는 곳으로 늘 금송(禁松) 때문에 시달렸다. 이처럼 가리포는 봉산으로 금송을 하고 있었는데, 1804년(순조 4) 전 전라감사 한용귀(韓用龜)의 장계에서 가리포의 지계(地界)는 강진에 속하는데, 영암과 해남에 분속(分屬)되어 있고 병영과 수영에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섬이 세 고을과 두 군영에 역을 지는 것은 실로 팔도에 드뭅니다.
라 하였다. 이처럼 중첩된 부담이 “실로 팔도에 드물다”고 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섬사람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간혹 뿔뿔이 흩어져 버리기도 하였다.30) 게다가 가시목(加時木)과 잡다한 물산을 생산하는 곳으로 경사(京司)와 각 영읍에 책임지고 물건을 대어 주는 수가 호당 10여 냥이 훨씬 넘었다. 세 고을(강진·영암·해남)과 두 군영(병영과 수영) 사이에 끼어 5백 호의 남아 있는 백성이 1년에 부담해야 하는 수가 6천 냥에 이르니 참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고폐(痼弊)였다. 그 해결책으로 한용귀는 토지는 강진 한 고을에 전속(專屬)시키고, 황장목 봉진(封進)은 금오도(金鰲島)와 절이도(折爾島)의 예를 따라 영암, 해남 두 고을과 함께 힘을 합해 (세 읍에서) 똑같이 담당하게 하며, 송전(松田)을 금양(禁養)하는 일은 고례(古例)대로 감영에 소속시키고, 가리포진 첨사는 구근인(久勤人)을 보내지 말고 성망(聲望)이 있고 이력(履歷)이 있는 무변(武弁)으로 가려 뽑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분부하게 해 주소서.
라 하였다.31) 그가 말했듯이 가리포진의 폐단을 없앨 방도는 오로지 적임자가 진장(鎭將)을 맡는 데 있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분명치는 않으나 선생안에는 그 해 7월에 가리포첨사가 이력과로 복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해결책이 제시되었으나 이 문제들이 그렇게 해결되지는 못하였다. 민란을 야기한 214대 첨사 이상돈(李相惇) 또한 적임자가 되지 못하였다. 민란의 주도자로는 다섯 명이 지목되었다. 첫째로는 허사겸(許士兼)이 앞장섰다. 그는 “빙자하고 호소하여 많은 백성을 모아 감히 공동(恐動, 위험한 말을 하여 두려워하게 하다)할 계책을 부린 자” 즉 수창(首倡)자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첫째도 허사겸이고 둘째도 허사겸입니다”라 하였다. 대중에게 경고하는 뜻에서 병영에 압송하고, 군사와 백성을 크게 모아서 효수하였다. 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은 허사겸의 말을 달갑게 듣고 함께 석장(石場)의 모임에 따라가는 등 안팎으로 화응(和應)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하였다. 최여집(崔汝集)은 당초에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 가기를 바랐고 뒤미처 또 정장(呈狀)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박희일(朴希一)은 소란을 일으킨 마당에는 참여하지 않은 듯이 거짓으로 꾸며 댔고 쫓겨간 관원에 대해서는 의논하여 보냈다고 무함하였다. 채운집(蔡云集)은 간여하지 않은 일이 없고 일으키지 않은 폐단이 없을 정도로 첫손에 꼽혔다. 원인 제공자는 무엇보다 이상돈 첨사였다. 직무가 중한 것을 전혀 모르고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정사를 자행하여 뇌물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추잡한 행위들이 드러났다. 이에 고종이 전교하기를, 가리포는 작은 땅이나 첨사는 또한 관장인데, 그 첨사가 불법을 자행하고 호되게 거두어들이기만을 일삼은 나머지 이처럼 진민(鎭民)들을 소요하게 만들었으니, 백성도 본디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슬픈 우리 백성이 원망과 고통을 외치며 스스로 기강을 범하고 분수를 범하는 죄를 기꺼이 저지르게 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아주 통탄스러우니, 전 첨사 이상돈은 금오 당상이 큰 거리에서 개좌하고 백관이 벌여 선 자리에서 한 차례 엄하게 형추한 뒤에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되 물간사전(勿揀赦前)하고 범한 장전(贓錢)은 형조를 시켜 낱낱이 거두어들이라.32)
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돈이 범한 장전(贓錢, 뇌물로 받은 돈) 7,153냥 4전 8푼은 가동(家童)을 잡아 가두고 기일을 정하여 독촉해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 백관들이 차례로 서 있는 가운데 각각 엄히 한 차례 형신을 하고 신장(訊杖) 30대를 친 뒤에, 흥양현 녹도에 유배 보내 안치하게 하였다.33) 새로 홍병덕(洪秉悳)을 215대 첨사로 보내 민란을 수습하게 했다. 그는 “녹봉을 출연하여 폐단을 개혁해서 유민(流民)들이 다시 모여들고, 무너진 성첩을 다시 완전하게 하여 파수하는 병졸들이 또한 정돈되었으니 …”34)라 하여 비교적 원만히 수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포장하는 은전을 받고, 방어(防禦)의 이력(履歷)이 허용되었다. 최악의 첨사? 아무래도 민란까지 일으키게 한 이상돈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1) 『일성록』 정조 14년(1790) 7월 4일[05] 기사.
2)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1591) 2월 1일 5번째 기사. 3) 『大東野乘』 「再造藩邦志」에도 “기축년(1589, 선조 22)에 정읍현감이 되고, 그해 봄에 진도군수가 되었다가 이윽고 승진하여 가리포첨사가 되니, 이때 와서야 좌의정 유성룡이 추천한 것이다.”라 하여 유성룡 추천으로 가리포첨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4) 54대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부임하지 않아서 그런지 선생안에 이름이 없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1635년(인조 13)의 장후완(蔣後琬)과 1799년(정조 23)의 성봉문(成鳳文)이 있다. 장후완은 임명되자마자 파직되었고, 성봉문은 가리포첨사로 제수 받았지만 산산 첨사(蒜山僉使) 한경린(韓慶麟)과 자리를 바꿔 가리포첨사로는 한경린이 내려왔다. 이런 까닭에 장후완과 성봉문도 선생안에는 이름이 없다. 첨사의 대수는 선생안에 올라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5) 『李忠武公全書』卷之七, 「亂中日記」三 [丙申] 閏八月 戊子[양력 10월 15일]; 『국역 비변사등록』 241책, 철종 5년(1854) 10월 11일 기사. 6)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2월 27일 1번째 기사. 7) 『중종실록』 65권, 중종 24년(1529) 4월 15일 2번째 기사. 8) 『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1602) 7월 15일 2번째 기사. 9) 『승정원일기』 영조 2년(1726) 1월 17일[16] 기사. 10) 『일성록』 정조 3년(1779) 10월 25일[17] 기사. 11)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1605) 9월 24일 4번째 기사. 12)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5월 17일[08] 기사. 13) 『승정원일기』 영조 7년(1731) 3월 17일[11] 기사. 14) 『승정원일기』 영조 8년(1732) 3월 17일[16] 기사. 15)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7월 7일[30] 기사. 16) 『일성록』 정조 17년(1793) 6월 14일[09] 기사. 17) 『일성록』 정조 19년(1795) 2월 13일[10] 기사. 18) 『일성록』 정조 19년(1795) 3월 8일[15] 기사. 19) 『일성록』 정조 19년(1795) 5월 22일[12] 기사. 20) 『선조실록』 213권, 선조 40년(1607) 윤6월 11일 2번째 기사. 21) 『승정원일기』 인조 8년(1630) 6월 17일[03] 기사. 22) 『일성록』 정조 23년(1799) 8월 20일[11] 기사. 23) 『일성록』 순조 2년(1802) 5월 29일[06] 기사. 24) 『일성록』 순조 5년(1805) 4월 7일[02] 기사. 25)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6월 7일[08] 기사. 26)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6월 10일[08] 기사. 27) 『승정원일기』 고종 15년(1878) 4월 4일[11] 기사. 28) 가리포 민란의 발생에 대하여는 김경옥, 「제4장 조선시대의 완도」(『莞島郡誌』, 莞島郡誌編纂委員會, 2010), 290〜292쪽 참조. 29) 『승정원일기』 고종 21년(1884) 3월 14일[10] 기사; 3월 24일[30] 기사. 30) 『일성록』 순조 4년(1804) 10월 28일[06] 기사. 31) 『국역 비변사등록』 195책, 순조 4년(1804) 10월 28일 기사. 32) 『승정원일기』 고종 21년(1884) 3월 24일[30] 기사. 33) 『승정원일기』 고종 21년(1884) 4월 10일[30] 기사. 34)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7월 7일[30] 기사.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