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시 속에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속에 애환이 담겨있나니 게시기간 : 2021-03-0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2-26 16: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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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가의 원망 소리를 듣고 지은 사회시 이 작품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이 지은 것으로, 일종의 사회시라 할 수 있다. 사회시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 삶의 진솔한 모습을 시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송순이 지은 「농가의 원망」은 총 24구로 이루어진 장편 고체시인데, 그중 앞 부분 8구를 소개하였다. 소개하지 않은 16구까지 총 24구의 내용을 시적 화자(話者, 내레이션)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양식은 다 떨어졌는데, 새로 핀 이삭은 언제 여물지 기약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날마다 나물을 뜯어먹어도 주린 배 채우기는 역부족이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 우는데, 그래도 이것은 참을 수 있다. 문제는 연로하신 부모님이다. 이러한 가족들을 위해 조금의 양식이나마 구해볼 생각으로 사립문을 여러 번 들락날락 해보지만 특별한 방법은 없다. 이때 아전들이 들이닥쳐 세금을 바치라 닦달한다. 아전들은 세금을 걷어가기 위해 쌀독을 들여다보지만 쌀은 다 떨어졌고, 베틀을 들여다보지만 베틀도 역시 마찬가지로 다 끊어졌다. 이렇듯 아전들은 세금을 걷을 도리가 없게 되자 소리 치고 화를 내면서 아이들을 묶어 원님 앞에 바친다. 원님도 인정사정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큰 칼을 목에 씌워 골병들도록 치고 때리고……. 울음소리 자자하고, 매를 맞은 가족들 하늘 향해 제발 죽여주십시오.라고 외쳐보지만 이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하곡(夏穀)인 보리가 채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 춘궁기(春窮期)를 맞이한 것을 가리킨다. 가을에 곡식을 걷자마자 그동안 내지 못한 세금 등을 내야만 했으니, 이제 수확한 곡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얼마 남지 않은 곡식으로 겨울을 버텨내고, 이제 새로운 계절 봄을 맞이했으나 먹을 양식이 없으니 절망만이 남아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송순은 이런 보릿고개를 맞이한 어느 농가의 실상을 「농가의 원망」 작품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렸다. 양식이 바닥난 상황에서 굶주림을 참아내야 하는 농가 사람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금을 닦달하는 아전과 원님. 얼마나 그 세월을 버텨내기 힘들었으면 하늘을 향해 “제발 죽여주십시오.”라는 말을 외쳤겠는가. 그 절절함이 마치 전해지는 듯하다.
2.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 그리고 그 반전 근고문학(近古文學)에 있어 농암(聾巖)과 면앙정(俛仰亭)은 가(可)히 참된 자연미의 발견자(發見者)요 또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창도(唱導)한 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양옹(兩翁)에 의(依)하여 창도(唱導)된 강호가도(江湖歌道)는 곧 문단(文壇)에 반향(反響)을 주어 적지 않은 영향(影響)을 문학상(文學上)에 미쳤다.
이 글은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가 1968년에 출간한 책 『한국문학사』 168쪽에 있는 내용이다. 원래 글은 한자를 노출시켰는데, 가독성을 위해 필자가 일부러 한글(한자) 형태로 수정해 적어보았다. 조윤제는 해방 이후 국문학을 연구한 초기 학자로 그가 말한 한마디 한마디는 후배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윤제는 인용한 글에서 ‘농암’과 ‘면앙정’을 거론하였다. 농암은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이고, 면앙정은 송순의 호이다. 조윤제는 이들을 가리켜 “참된 자연미의 발견자요 또 강호가도를 창도한 이”라고 하였다. ‘강호가도’란 무슨 말인가? ‘강호’란 자연의 다른 말이니까, 곧 작품을 통해 자연을 예찬한 것을 뜻한다. 조윤제는 이현보와 송순은 작품을 통해 자연을 예찬할 뿐만 아니라 거의 선구자적인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강호가도를 창도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윤제는 왜, 송순이 강호가도를 창도했다고 말한 것인가? 송순이 태어난 곳은 전라도 담양부(潭陽府) 기곡면(錡谷面) 두모곡(頭毛谷, 현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 송순은 숙부인 송흠(宋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박상(朴祥), 박우(朴祐), 송세림(宋世琳) 등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송흠, 박상, 박우, 송세림 등은 당시 잘 알려진 사림(士林)들로 이들을 스승으로 모신 것을 통해 송순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송순은 27세(1519, 중종14)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다. 송순이 문과에 합격한 해인 1519년 11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송순은 사림으로서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 막 관직에 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화(士禍)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젊은 사림 송순이 느낀 자괴감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처럼 27세 때부터 시작한 관직 생활은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77세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 53세(1545, 중종40)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는데, 이전 해인 52세 1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관직에 있지 않아 사화를 다시 모면하였다. 이때 사림으로서 느낀 자괴감은 기묘사화 때와 마찬가지로 컸을 것이다. 이렇듯 사화를 직접 당하지 않았으나 사림으로서 불의한 사람과 늘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는 사화기이기 때문에 사림을 죽이려는 불의한 사람들은 여러 곳에 있었다. 송순은 당시 한 때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크게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적이 있었다. 이때 송순의 나이 41세. 김안로는 누구인가? 허항(許沆)ㆍ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불린 사람이 아닌가. ‘삼흉’ 중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았으니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윤원형(尹元衡)이 실권을 쥐면서 견제를 당하였고, 58세(1550, 명종5) 때에는 진복창(陳復昌)ㆍ이기(李芑) 등에게 논박을 당해 유배를 갔다.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고, 견제를 당하며, 논박을 당해 유배를 간 것은 죽음에까지 이른 사림에 비하면 약한 고통이라 할 수 있으나 송순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한편, 송순은 일찍이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한 작은 터를 사두었다. 그리고 41세 때 김안로가 득세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그 미리 사두었던 터에 누정을 짓는다. 그 누정 이름은 면앙정(俛仰亭). ‘면앙’이란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정을 축조하고 나서 이와 관련한 가사 작품 「면앙정가」와 시조 「면앙정단가」 및 「면앙정잡가」 등을 지었으니, 송순이 면앙정에 쏟은 노력이 얼마인지 알 수가 있다. 이중 특히, 「면앙정가」는 면앙정 주변의 자연을 노래한 가사로, 실로 강호가도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윤제가 송순을 가리켜 ‘강호가도를 창도한 사람’이라 지목했던 것은 면앙정이라는 누정을 짓고, 아울러 그곳에 어울리는 가사 및 시조 작품 등을 지어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면앙정 전경)
면앙정과 가사 작품 「면앙정가」, 그리고 「농가의 원망」……. 이렇듯 세 가지를 나열해놓고 보면, 분명히 송순은 ‘강호가도를 창도한 사람’ 뿐만이 아닌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농가의 원망」은 사회와 가까운 것으로 강호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송순은 이와 같이 자연에 대한 관심도 컸으나 사회의 부조리한 면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3. 또 다른 사회시들, 삶의 애환을 담았나니 송순은 「농가의 원망」 뿐만이 아닌 「이웃집의 곡성을 듣고서〔聞隣家哭〕」, 「거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聞丐歌〕」, 「딱다구리의 탄식〔啄木歎〕」, 「병든 학〔病鶴〕」 등의 또 다른 사회시를 남겼다. 이중에서 특히, 「이웃집의 곡성을 듣고서」, 「거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는 대화체 등의 수사법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지은 것으로 문학적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또한 송순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단정 지을 정도로 현실감이 충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거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 중간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거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는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거지가 부른 노래 소리로부터 작품은 시작하고 있다. 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꼭두새벽에 거지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그 사연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사연을 듣고자 하니, 거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감 없이 고하였다. 인용한 시 내용을 보면, 거지는 본래는 부잣집 자식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고, 이러한 가업이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후략’의 한 구절 “갑자년 간에 미친 왕을 만났으니〔甲子年間遇狂王〕”라는 내용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갑자년’은 1504년(연산군10)을 가리키며, 그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갑자사화로 인해 사림들이 화를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왕의 실정(失政)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러니 부잣집조차도 그러한 실정을 견디지 못해 결국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유랑민(流浪民)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거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인한 실정 때문에 부잣집 아들이 거지로 전락해 유랑민이 된 사연을 적은 작품으로 송순 사회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송순은 27세 때 과거시험에 급제한 뒤에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사실 내직에 있을 때는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즉, 외직에 나가봐야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48세(1540) 때 경상도 관찰사, 50세 때 전라도 관찰사, 51세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56세 때 개성부 유수, 61세 때 선산 도호부사 등을 역임했던 송순. 송순은 이러한 일련의 외직을 거치면서 백성들이 어떤 애환을 지니고 사는지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그것을 시로 나타내었다. 그러니까 송순을 ‘강호가도를 창도한 사람’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맞지 않고, 이면(裏面)까지 다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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