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지눌의 정혜쌍수와 나옹의 동방제일도량 송광사 게시기간 : 2021-03-10 14: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3-10 10: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
||||||||
1. 불교는 삼보요, 삼학이다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이다. 부처는 붇다(Buddha)에서 온 말로 깨달은 자란 뜻이다.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 불교인 것이다. 불교에는 세 가지의 보배가 있다. 삼보라고 하는데, 불·법·승이 그것이다.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과 승가이다. 승가는 상가(Sangha)의 음역인데, 걸사(乞士: 빌어먹는 사람들)의 뜻이다. 부처와 그의 제자들이 새벽에 마을을 돌며 탁발을 해서 식사를 해결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다.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태국·미얀마·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사찰에는 공양간이 없다. 승려들이 가사를 입고 맨발로 열을 지어 마을로 가서 탁발을 하여 공양물을 얻어온다. 이것으로 승려들이 공양도 하고, 불우시설에 음식을 보내기도 한다고 한다. 불교의 삼보는 불자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 요체가 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삼보와 더불어 삼학이 중요시 되고 있다.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깨닫기 위해서 세 가지 분야의 공부를 해야 한다. 계율·선정·지혜가 그것이다. 계율은 5계·10계 등 불자가 지녀야 할 규칙으로 권선적인 것과 금지적인 내용으로 되어있다. 삼학 중의 으뜸이 계율이라고 할 정도로 계율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선정은 참구선정(參究禪定)과 관련시켜 이해했으면 한다. 참선 등 불교수행의 실천적인 면을 말한다. 지혜는 불교의 지혜로 불교의 이론적인 교리공부, 즉 경전공부 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의 삼학은 계율을 바탕으로 하면서 불교의 실천적인 면과 이론적인 면을 공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불법승의 삼보를 신앙하면서 계·정·혜의 삼학을 공부하여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고자(離苦得樂) 하는 종교이다. 2. 송광사의 보조지눌은 정혜쌍수를 제시하면서 정혜결사를 이끌었다 불교수행의 요체인 계·정·혜의 삼학의 실천에 앞장 선 승려는 고려후기 정혜쌍수를 제시하면서 정혜결사를 이끈 조계산 송광사의 보조지눌(1158-1210)이었다. 보조지눌의 정혜결사의 사회적 배경이 되는 고려중기 무신의 난(1170) 이후 불교계는 이전의 불교에 대해 반성하면서 자체적으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신의 난 이후 불교계의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지방에서의 불교개혁적인 신앙결사의 유행이었다. 이것은 개경중심의 귀족적인 체제유지적인 타락한 불교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후기의 대표적인 불교개혁적인 신앙결사운동은 조계종의 수선사(修禪社)와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가 대표적인 존재였다. 수선사는 조계산 송광사를 중심도량으로 한 정혜결사였으며, 백련사는 강진 만덕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법화결사였다. 수선사와 백련사는 한반도의 남부지방인 순천·강진에서 당시의 세속적인 불교를 질타하면서 불자의 본래적인 면목을 되찾으려는 불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개혁운동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성격의 신앙결사를 조직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수선사의 개창자는 지눌이었다. 그는 경전 읽기 등 이론불교에 치우친 교종승려들을 건혜자(乾慧者)라 비판하는가 하면, 참선에 치우친 선종승려들을 치선자(痴禪者))라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 공부의 핵심적인 두 요소인 선정(禪定: 參禪)과 지혜(智慧: 看經)을 함께 닦자는 의미의 정혜쌍수를 깃발을 들고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게 하자는 습정균혜(習定均慧)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종파 사이의 대립·명예와 이익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일대 혁신적 불교개혁운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정혜결사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인데, 돈오는 인간의 본래 면목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며, 비록 돈오하여도 묵은 습관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를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고 하고 있으며, 지눌은 다시 화엄사상을 도입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워서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지눌은 이러한 기초 위에 지혜(智慧)의 장애를 완전히 떨쳐 버리기 위해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세워 선문(禪門)의 활구(活句)를 참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눌의 사상은 교선의 절충적 단계를 뛰어넘은 교선일치의 독특한 철학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지눌의 뒤를 이은 수선사의 제2세 혜심(慧諶)은 화순 출신으로 지눌의 선사상을 계승하여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고양하여 선우위의 새로운 불교로 이끌었다. 또한 혜심은 간화선의 선양과 함께 유·불일치설을 내세워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사상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는 유·불의 조화를 추구하되, 어디까지나 불교가 주체가 된 불교 위주의 해석을 모색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불교계의 유불일치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한편 수선사의 제6세인 충지(沖止, 1226-1293))는 장흥 출신인데 그의 불교는 고려 중기의 선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순천 정혜사(定慧寺)의 창건자인 혜소국사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선풍이 제3세 몽여(夢如)·제4세 혼원(混元)을 거쳐 자신에게 전승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었다. 예종대의 혜소국사의 선은 고답적이며 귀족적인 경향으로 개인적인 수업형태를 중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의 전통을 강조한 충지의 불교는 지눌의 불교와 비교할 때 확실히 변질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의 고려 내정 간섭기인 충지 이후의 수선사의 전개과정은 자료의 결핍으로 구체적으로 살피기 어려우나 당시 불교계 상황과 관련시켜 검토해야 될 필요가 있다. 고려후기 불교에서도 교선일치사상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것은 선종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도 그러한 경향은 지속되었다. 우선 임제종(臨濟宗)을 연 나옹혜근(懶翁惠勤)의 사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옹은 성(性: 본체 중시)과 상(相, 현상 중시)은 물론 교(敎)와 선(禪)을 융합하려 했는데, 그 주체로서 선종의 입장을 뚜렷이 하였다. 선종의 입장에서 성종(性宗)과 상종(相宗) 사상을 모두 아우르려는 나옹혜근의 사상은 법안종(法眼宗) 사상과 비슷한 면을 지녔지만, 그것과 맥이 닿는 것은 아니다. 고려후기 불교사상도 교와 선의 융합 내지 일치를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선종의 입장이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선종이 등장하여 계속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의 난 이후 무인중심으로 고려사회가 재편되어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한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은 서로 모순되면서 대치된 것은 아니다. 유학자들도 불교사상에 대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성리학이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수용되는 단계에 있어서도, 불교와 전면적으로 대결하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고려시대를 통해 불교교단의 폐단을 지적하기는 하지는, 그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리학이 수입되는 고려후기 사회에 유학자는 물론 승려들까지도 불교와 유학을 아울러 이해하려고 하였다. 교선융합의 새로운 불교사상을 전개시킨 조계종은 보조지눌에 의해 개창되지만, 사실 그 사상의 윤리적 체계를 수립한 승려는 그의 제자인 화순 출신의 진각국사 혜심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은 유교는 물론 심지어 도가사상까지도 불교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3. 고려 말 동방제일도량 송광사 고려중기 이래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한 승려는 조계산 송광사의 수선사(修禪社)계 승려였다. 송광사는 이른바 16국사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나옹혜근과 그의 문도들이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는 등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특히 나옹혜근은 송광사와 인연이 깊다. 나옹혜근의 탑비에 따르면, 고려 말 공민왕이 1371년 8월 26일 왕사로 책봉된 나옹혜근을 송광사에 주석하도록 명하고 있다. 송광사가 동방의 제일 도량이므로 왕사인 나옹혜근의 주석처로 삼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1). 당시 나옹혜근은 은사인 지공(指空)과 더불어 생불(生佛)이나 석가의 화신(化身)으로 추앙받고 있었다2). 그가 당시 불교계를 이끄는 큰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위상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 되어졌다. 불교계 통폐합을 시도하면서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 태종도 지공과 나옹혜근을 대표적인 고승으로 지목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공민왕이 나옹혜근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그의 주석처를 송광사로 정한 것은 당시 불교계에서의 송광사의 위상과 사격(寺格)을 높이는 것이었다. 송광사를 동방제일도량으로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4. 나옹혜근의 송광사 주석 나옹혜근은 1371년 8월 28일 시자 설악을 데리고 한 달 걸려 9월 27일 송광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송광사에 머문지 1년여가 지난 1372년 가을 회암사로 옮겨가 은사 지공의 탑을 세우는 불사를 도모하였다. 1373년 8월 다시 송광사로 내려왔다. 공민왕의 요청으로 다시 회암사로 올라와 소재도량을 건설하고 이듬해에 회암사 중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로는 무학자초(無學自超)·정지지천(正智智泉3)) 등 수백 인이 있었다. 나옹혜근의 대표적인 계승자는 누구였을까? 그의 문도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4), 그의 입적 당시 불교를 믿는 자가 나라 안에 반이나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5). 나옹혜근을 추종한 승려들은 종파를 떠나 매우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나옹을 계승한 문도는 선종 사굴산파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나옹의 대표적인 문도가 누구였는지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마침 나옹이 입적하였을 때 대중 가운데서 법사가 되었으며 무학초공(無學超公)과 아울러 일컬어졌다. 초공(超公, 무학자초)은 묘리에 통달하였고 대사(본적달공, 本寂達空)는 독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다6).
위의 기록에서 무학자초는 묘리에 통달한 승려로서, 달공은 독실하게 실천하는 승려로서 나옹혜근의 대표적인 문도였음을 알 수 있다. 무학자초는 조선초기 불교계를 이끈 왕사로서 그의 문도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초의 문도 가운데 상수제자(上首弟子로 알려진 승려는 함허기화(涵虛己和)였다7). 이와 같이 송광사는 고려후기에는 보조지눌의 정혜쌍수의 근본도량이었으며, 고려말 조선초기에는 나옹혜근의 동방제일도량으로서 불교계를 주도하는 사격(寺格)이 높은 사찰이었다. 1) 1371년(공민왕 20) 8월 26일에 공부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친서, 인장, 법복, 발우를 내렸으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修本智) 중흥조풍(重興조풍)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로 책봉하고, 송광사가 동벙 제일의 도량이라고 하여 이에 주석하도록 명하였다(조명제 외,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 인물부』(혜안, 2007년, 173쪽
2) 전 왕조 말경에 나옹(懶翁)이란 승려가 적멸(寂滅)의 교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생불(生佛)로 추대받아, 천승(千乘)의 존엄을 굳혀 천한 필부(匹夫)에 대하여 부질없이 절을 한 일까지 있었으니, 이리하여 국세는 기울고 유도(儒道)는 쇠퇴되었습니다.(無名氏, 「闢佛疏」 『東文選』 56) 3) 權近, 「용문사 정지국사비」, 『조선금석총람』 下 4) 나옹혜근의 문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權近, 「우야운 상인에게 주는 후서」, 『陽村集』 15 5) 이색, 「향산 윤필암기」, 『목은문고』 2 6) 權近, 「達空首座 問答法語 序」, 『陽村集』 17 7) 獅巖采永, 「海東佛祖原流」, 『韓國佛敎全書』 10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