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1919년 전남의 3·1운동과 목포의 4·8만세운동 게시기간 : 2021-03-3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3-30 10:0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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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지나간 3·1운동 102주년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던 해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각종 사업을 화려하게 벌였다. 사람들은 흔히 ‘우수리 없는 해’를 주로 기념한다. ‘우수리 없는 해’란 10년을 단위로 해서 0이 되는 수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00으로 끝나는 해는 그 기념의 의미가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100주년의 기념행사가 더욱 컸다. 반면에 우수리가 남는 102주년은 그래서 많이 달랐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2년 되는 올해는 유난히 조용히 지나간 느낌이다. 100주년과 비교되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2019년 3·1운동 백주년을 맞던 그해 말에 시작한 코로나 19가 1919년의 기억마저 위축시키고 있는 것같다. “대한민국의 과거 100년을 기억하고 현재를 성찰하여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던 기념사업이 어느 틈엔가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는 그 기억의 끝을 이어보고자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소개하고 이를 중심으로 전남의 3·1운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3·1운동은 3월 1일에 일어났지만, 운동이 전국적으로 절정을 이룬 때는 3월 21일부터 4월 10일까지였다. 바로 오늘 3월 31일은 그 절정기의 한복판에 있으니 오늘 3·1운동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절정기에 일어났던 주목할 운동 중에 하나가 목포의 4·8만세운동이다. 이에 대한 설명도 보탰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편에서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시위정보와 공간정보를 종합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2019년 2월 공개했다. 2016년부터 4년간에 걸쳐 전문가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집대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단순히 자료만을 모아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니다. 삼일운동 관련 기초 정보를 종합하고 GIS(지리정보체계)와 연동하여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이다.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가 축적한 역사자료 정보화의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이며,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협력하여 만든 고도의 연구 결과물”이라 자부하고 있다. 이는 국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주소는 http://db.history.go.kr/samil 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편의를 돕고자 그해 말 책자로도 간행하였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1919, 그날의 기록』 총5책으로 나왔다. 이 또한 데이터베이스에서 받아볼 수 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간행사에서 “3·1운동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습니다”라 하듯 여전히 채워야 할 빈 공간이 많다. 100주년에 기울였던 노력들이 지치지 말고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또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 사실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국한문 원문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어려운 한문투 문장이라 읽기 어렵다. 요즘 이 어려운 원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100주년을 기해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그 부분을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로 바꾼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제공하였다. 이를 읽어보며 그날의 감격을 조금이나마 함께 해보길 바란다.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한말 이래 전개되어 왔던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의 귀결점이면서 동시에 농민·노동자·학생과 같은 새로운 세력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독립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3·1운동을 그 이전의 모든 민족운동이 그리로 합류하고 이후의 모든 민족해방운동이 거기서 분출하는 일대 호수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3·1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은 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던 때였다.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양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민지는 대부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걸쳐 있었다. 아시아에 있던 우리도 불행히 식민지가 되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중국도 일본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졌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프랑스나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 동방에는 그야말로 식민지라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암울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있던 이른바 피압박민족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은 지상의 과제였다. 바로 이때,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감히 그 어둠에 도전하지 못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떨쳐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그 만세 소리는 동방의 모든 나라에 등불이 되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중국의 5·4운동이 그랬고 인도차이나반도, 필리핀, 그리고 저 멀리 아랍에까지 3·1운동의 빛은 퍼져나갔다. 인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네루는 3·1운동에 대해 ‘숭고한 독립운동’이라 일컬으면서 그에 대한 감명을 잊지 않았다. 이처럼 3·1운동은 세계 최초로 일어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런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다. 3·1운동에서 우리 민족이 치켜든 민족해방의 횃불은 암흑 속에 있던 동방의 여러 민족들에게 다가가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표지 3·1운동의 전개 3·1운동이라고 하면 대개 3월 1일에 일어났거나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며칠 간 진행되고만 만세운동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약 2년간에 걸쳐서 지속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크게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면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5월까지 약 석달 동안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대중시위운동이었다. 둘째 국면은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새로 출범하는 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이 대규모 무장항쟁 탄압을 위해 간도 출병을 하는 1920년 말까지 조·중 국경지대와 서북간도·연해주 일대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이때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승리가 있었다. 우리가 보통 3·1운동이라 할 때는 주로 그 첫째 국면을 말한다. 첫째 국면만 하더라도 5월까지 석달 여에 걸친 운동이었다. 다시 그 시기는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즉 ① 서울 및 북부지방 확산기(3월 1일〜3월 10일), ② 남부지방 확산기(3월 11일〜3월 20일), ③ 전국 삼일운동 절정기(3월 21〜4월 10일), ④삼일운동 소강기(4월 1일〜5월 31일)로 나눈다.1) 뒤에 살펴볼 목포의 4·8만세운동은 절정기에 속한다. 전남의 3·1운동 전남지방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처음 일어났고 시위는 4월 22일까지 전남 각지에서 전개되었다.2) 전남 지역은 광주군을 수위로 보성군, 순천군, 광양군, 해남군, 영광군 순으로 3·1운동이 활발하였다. 시위만을 확인해도 광주군을 필두로 순천군, 보성군, 제주군, 광양군, 목포부, 해남군 순으로 일어났다. 도시 지역인 광주군과 목포부에서는 기독교계와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반면 남해안 지역인 보성군, 순천군, 광양군, 해남군, 제주군 등은 초기에 천도교계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지만, 지역적 기반이 우세하였던 유생, 서당, 위친계 등을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된 시위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주체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남 23개 부·군 전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3) 하지만 전남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에서의 희생은 물론이고, 특히 한말 의병전쟁에서 항일적인 유생측과 일반 농민층이 다수 의병투쟁에 참가하였다가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되거나 전사함으로써 투쟁역량이 크게 손실되었는데, 3·1운동기까지 아직 그 투쟁역량을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한 천도교와 기독교세력이 다른 지방에 비해 약했다. 결국 전남지방에서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1910년대 보통학교와 개량서당에서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4) 이런 이유들 때문에 3·1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남인들의 민족해방 의지나 열망이 부족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10년 후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전국 삼일운동 절정기에 맞은 목포의 4·8만세운동 전라남도는 상대적으로 3·1운동 발생이 적었던 곳이지만, 학생들의 시위 참여는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전남의 첫 시위가 일어났던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에서는 3월 10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주민이 합류하면서 1천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5) 이런 학생들의 3·1운동 경험은 1920년대 지역 청년운동 및 각종 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목포의 4·8만세운동이었다. 목포에서는 3월 20일과 4월 8·9일에 만세시위가 있었다.6) 3월 20일 시위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다수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목포경찰서장과 군수가 간절히 설유(說諭)하여 해산하였더라”는 정도의 신문보도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하면 4월 8일의 시위를 말한다. 천여 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참여하고 80여명이 체포된 시위로 규모 면으로 보면 광주의 시위 다음가는 두 번째였다. 목포의 만세시위는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하나는 미곡상을 하고 있던 박상렬과 목포상업전수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청년·학생들의 만세시위였고, 다른 하나는 양동교회 신자들이었던 서기견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였다. 정명여학생들은 여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 기독교인들과 청년학생들은 서로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거의 한 달간 준비를 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치밀하게 준비하여 마침내 4월 8일 거사를 성공시켰다. 기독교인들은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을, 오재복·이금득·박상오는 목포보통학교 학생들을, 박상렬은 목포상업학교(간이상업학교) 학생들을 각각 동원하였다. 약속시간인 오전 10시가 되자 시내 여기저기서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고, 태극기가 나부끼고 격문이 뿌려졌다. 기독교인들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깃발을 들고 시가지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마구 칼을 휘둘러 군중을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서기견은 큰 상처를 입었고, 박상렬 일행도 남교동 공설시장 앞에서 체포되었다. 그렇게 시위는 끝났다. 모두 80여명이 체포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정명여학생들이 그 80여명의 절반을 차지했다. 목포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8일 하루에 끝난 것이 아니라 7일 준비일부터 9일까지 이어졌다. 정명여학교와 4·8만세운동 민족운동의 거대한 호수, 3·1운동에는 이처럼 목포의 눈물도 담겨 있다. 무엇보다 정명여학교 소녀들의 눈물이 담겨 있다.
목포 정명여학교는 목포에서 여자 교육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개선시켜 나간 한국여자중등교육의 산증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3·1운동 당시 목포 투쟁사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운동의 주모자로부터 참가자가 대부분 정명여학교 학생들이었다. 더구나 정명여학교는 1919년 4월뿐만 아니라, 1921년 11월에도 워싱턴회의에 참여하는 한국대표단을 성원하기 위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7) 정명여학교가 3·1운동과 맺은 인연은 1983년 2월 14일 옛 선교사의 사택을 수리하던 중 천장에서 겉표지에 ‘김목사전(金牧師殿)’8)이라고 적혀 있는 봉투가 발견되면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되었다. 그 봉투 안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동경유학생들이 만든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조선독립광주신문’이라는 인쇄물(지하신문) 1본, “경고 아 이천만동포[20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로 시작하는 격문 1매, 독립가 사본 1매 등 5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이는 정명여학교가 목포 3·1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물증이었다. 이 자료들은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나라 잃은 슬픔과 주권 없는 겨레의 뼈아픈 쓰라림을 겪으며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 했던 선조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오래도록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비’가 정명여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지금 정명여학교에서는 1919년 4·8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기념행사를 매년 개최하면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당시 정명여학교의 주변 길은 지금과는 달랐다. 한덕선 전 정명여중 교장이 그린 그림을 보면 4·8만세운동 당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뛰어나간 길은 학교의 남서쪽 방향, 즉 옛 교장사택과 지금 희성장로교회의 사이였다. 당시에 교문은 거기에 있었다. 지금의 교문과는 정반대쪽이었다. 시위대가 뛰어나갔던 바로 그 길을 다시 내어 그 길 위에서 4·8만세운동을 재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1)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1919, 그날의 기록』 1(종합편), 2019.12, 61〜62쪽.
2)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박찬승, 「전남지방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전남사학』 9, 전남사학회(현 호남사학회), 1995.12); 박이준, 「전남지방의 3·1운동의 성격」(『국사관논총』 96, 국사편찬위원회, 2001.06.30.); 국사편찬위원회, 「2장 전라도의 3·1운동」(『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1919, 그날의 기록』 3, 2019.12) 등 참조. 국편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전라남도의 사례로 총 83건이 수록되어 있다. 3)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글 참조. 4) 박찬승, 앞 글, 390〜391쪽. 5)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1919, 그날의 기록』 1(종합편), 2019.12, 106〜107쪽. 6) 목포의 4·8만세운동에 대하여는 최성환, 「1919년 목포 4.8독립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주요인물」(『한국학연구』 69,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06); 이재근, 「목포지역 3·1운동과 개신교: 목포양동교회·정명여학교·영흥학교의 만세시위 참여를 중심으로」(『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0호, 2019.03.25.) 등을 참조. 7) 1919년 10월 또는 1920년 10월에도 시위가 있었다고는 하나 불분명하다. 이재근, 앞 글, 99쪽 참조. 8) 김목사는 제7대 교장을 역임한 김아각(Dr. Daniel J. Comming) 선교사로 추정하고 있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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