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스승의 애틋한 마음, 제자의 존경. 서로 통하다 게시기간 : 2021-04-07 16: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4-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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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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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수로 박한 노자를 대신하네. 부디 자신을 아끼게나.’ ‘말 가죽에 싸여 돌아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조선, 서양 오랑캐와 처음으로 대적하다 1866년 9월(음력 8월)에 프랑스 함대가 서해로부터 한강 줄기를 타고 올라와 여러 지역을 정탐하고 물러갔다. 그리고 10월 14일(음력 9월 6일) 프랑스 제독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는 함대와 600여 명 이상의 군대를 거느리고 갑곶에 상륙했고 10월 16일(음력 9월 8일) 강화도 성을 공격했다. 그 때 서울에 있던 기양연(奇陽衍)의 말에 의하면 음력 8월에 ‘서양 선박이 부평 땅에 정박했었고 16일 밤에는 염창(서강근처)까지 와 대포소리가 한양까지 진동했다.’고 했고 9월 8일에 ‘서양의 배가 소요를 일으켰는데 큰 배 6척, 작은 배 15척이 있었고 강화도 땅에 정박했다.‘고 하였다. 당시 양헌수는 정족산성에서, 한성근은 문수산성에서 수비했다. 결국 11월 10일(음력 10월 4일)에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에서 빠져나갔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병인년에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라는 말이다. 비록 강화도에서 철군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군대는 민가를 불태웠을 뿐 아니라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도 불태웠고 의궤를 포함하여 340여 책의 문서와 은괴 수천 량을 약탈해갔다. 외규장각은 1782년 2월에 설치된 왕실도서관으로 주로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 때까지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자료는 약 1,042종(1,613책)으로 꽤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 중 340여 책이 약탈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던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군대와 무력 충돌을 경험한 사건이었고, 왕실의 기록물과 재물을 약탈당한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침략, 약탈 소식은 강화도와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 프랑스 군대가 조선 영토를 침략했다는 소식이 퍼져 조선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대원군은 발빠르게 대처했고 종친부가 먼저 나서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하는 데에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기를 요청했다. 종친부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종친들에게 통문을 돌렸다. 석전 이최선, 서양 오랑캐 응징 위해 분연히 일어서다 양요 소식과 종친부의 통문은 호남에까지 이르렀다. 호남은 대대로 ‘의향(義鄕)’ ‘절의의 고장’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 김덕령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물리쳤고, 이순신은 호남에 거점을 두고 왜적과의 해전을 거의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병인년 프랑스 군대가 조선 땅에 침략하여 조선 백성을 죽이고 국가 기록과 재물을 약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호남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주도한 이는 석전 이최선이다. 그는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서 종친의 혈족이었다. 4대조 이서(李緖)가 담양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래 대대로 살았고 조부 이세용(李世容)이 창평 장전으로 옮겼다. 이최선은 창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규형(李圭亨)이 노사 기정진과 동학인 인연으로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기정진은 바른 학문을 보호하고 사악한 학문을 배척한다는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강조했다. 1866년에는 서양 제국의 통상 제의를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최선은 스승의 사상을 충실하게 수용했다. 프랑스라는 서양 오랑캐가 조선 영토를 침략해 소요를 일으키고 살상과 약탈을 자행한 사건은 ‘척사’를 실천하는 의로운 거사[義擧]의 명분으로 충분했다. 이최선은 호남 지역 종친들에게 의거 통문을 보냈다. 글에서 ‘강화도의 놀라운 소식을 듣고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통문을 돌려 의군(義軍)을 규합하고자 하니 음력 9월 25일까지 구암점(九巖店)에 모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서양 오랑캐들은 처음에 선교 활동을 한다고 하고 이제는 재화를 유통한다는 말로 꾀어 농간하면서 우리 강토를 침략했다.’고 분기(憤氣)를 토하며 의병을 규합하여 강화도로 진군하는 일에 동참해주기를 호소했다. 스승, 제자의 의기(義氣)를 돋우다: “남아 입장에서 본다면 불우한 때는 아닐세”
『노사집』
『석전문집』(한국역대문집) “편지 받고서 자네가 의병에 나아갈 날짜가 이미 정해졌다는 걸 알았네. 시사로 논의한다면 진실로 천지간에 처음 있는 변고이지만 남아로서 평소 마음에 품었던 포부로써 말한다면 불우한 때라고 말할 수는 없다네. 부디 자애하도록 힘쓰게나. 나는 병 들어 발걸음이 문턱조차 넘지 못하니 자네가 가는 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다만 마음만 바람결에 실어 보낼 뿐이네.” 이최선은 의병을 규합하여 상경하려 할 때 스승인 기정기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위 글은 기정진이 쓴 답장이다. 시대 상황이 매우 어지럽고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여 나라가 소란스러운 일은 염려스럽다. 그러나 남아 입장에서 볼 때 불우한 때는 아니다. 남아라면 평소 글을 읽어 실력을 기르고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과감히 나아가 임금과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해 싸워야 충(忠)을 실천해야 한다. ‘불우’란 실력이나 충심을 드러내어 공업을 성취할 적절한 때와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의 침략으로 인해 소요 상황을 맞이한 그 때는 남아가 임금과 나라를 위해 싸워 평소의 포부를 이룰 수 있는 때이다. 더구나 기정진은 서양 제국이 요구하는 나라 개방과 통상 요구는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스승의 자리에서 본다면, 의병을 규합하여 싸우러 나가는 제자는 믿음직스러울 뿐 아니라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기정진은 시 한 수를 편지에 동봉한다. 제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며 한편으로 염려하는 마음을 실어 보냈다.
이 편지와 시는 음력 1866년 9월 28일에 썼다. 이최선이 호남 지역 종친들에게 통문하여 음력 9월 25일까지 구암점으로 모이자고 요청한 사실을 상기할 때 아마도 이최선이 출발하려던 전후에 부친 듯하다. 의병으로 나가는 제자가 오랑캐를 물리쳐 평온한 세상으로 만들기를 한껏 기대하는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스승의 바람 대로 기쁜 소식 전하다 : “‘물결 일지 않는다’는 징조를 알았습니다.” 이최선은 통문에서 음력 9월 25일에 구암점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적어도 9월 25일 이후에 의병대를 이끌고 출발했던 듯하다. 프랑스 함대가 9월 8일 강화도를 공격하고 10월 4일에 철군했으니 그가 출발한 시기는 싸움이 시작된 지 거의 20여 일이 다 된 때였고 한양에 닿았을 때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는 프랑스 군대와 싸워 적을 베지 못한 일을 아쉬워했고 무엇보다 당시 ‘적이 살아서 돌아간 사실’에 대해 분개했다. 그는 한양에 도착하여 전투 소식을 듣고 운현궁에 들어간 이후에야 기정진의 편지에 답장을 썼다. 편지에서 그는 스승이 자신을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하늘의 도움으로 ‘요망한 도적[妖寇]’들이 물러나 다행이라고 하였다. “제가 의분에 격동되어 성공할지 실패할지 가리지 않고 의병부대를 규합하였습니다. 제가 떠날 즈음에 편지와 시를 보내시어 지나치도록 칭찬하고 장려해주셨으니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평소 ‘마음 속에 가득 쌓인 충의는 밖으로 말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새기면서 말을 달려 종친부에 다달아 왕사(王師-임금의 군대, 나라의 군대)의 첩보를 들었습니다. 곧 운현궁 군대 막사로 들어가 한양으로 오게 된 연유를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순무사 이경하를 만나 자세히 들으니 총융사 신헌을 후방 구원군으로 삼고 양헌수를 선봉으로 삼았었다고 합니다. 양헌수가 갑곶진을 몰래 건너가 정족산성 아래에 숨어 있다가 적들을 습격하여 40여 급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중략)…보내주신 편지에서 쓰신 ‘한강물 잔잔하고 물결 일지 않는다 전해다오.’라는 시 구절을 여러 차례 읊조리면서 오늘 오랑캐를 평정할 징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에서 이최선은 스승이 평소 ‘안에서 쌓인 충의는 말로써 밖으로 나타난다.’라는 말로 자신을 격려해준 덕분에 의병대를 조직하여 오랑캐를 칠 수 있는 의기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신헌과 양헌수를 각각 후원군과 선봉으로 임명하여 적을 격퇴하고 40여 명의 적을 죽였다는 소식도 전했다. 승전보는 스승이 가장 궁금해하던 내용이다. 기정진은 시에서 ‘한강물 물결 일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중국 주나라 주공이 다스릴 때 태평성세였다. 이 때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흰 꿩을 바치면서 ‘하늘에는 거센 바람, 큰 비가 없고 바다에는 파도가 일지 않은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아마 중국에 성인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고 했었다. 이후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말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기정진 입장에서 서양 오랑캐로 인한 소요사태는 우려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아끼는 제자가 의병으로서 참전하였으므로 제자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리했다는 소식은 동시에 나라가 안정되고 제자도 안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스승의 위정척사 사상을 충실히 받아들여 몸소 실천하는 제자였던 이최선은 스승의 속내까지 잘 알고 있었던 듯 승전 소식을 자세히 전했던 것이다. 스승의 격려에 의기로 답하다: “말 가죽에 싸여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기정진이 편지와 시를 함께 보냈듯이 이최선도 이 편지 속에 시를 동봉하였다. 그는 스승의 시운을 그대로 따라 시를 지어 자신의 의기와 장대한 포부를 표현했다.
‘호남은 의기 많았던 고장’이라는 자긍심에 찬 이최선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내비친다. 한나라 때 장군인 마원(馬援)은 일찍이 ‘남자는 마땅히 변방 들판에서 죽어 그 시신이 말 가죽에 싸여 고향으로 돌아와 묻혀야 한다.’고 했다. 변방의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 그 시신이 말 가죽으로 싸인 채 고향으로 돌아오더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최선은 마원의 말을 빌려 나라를 위해서라면 위험한 전쟁터도,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장한 의기를 드러냈다. 기정진은 위정척사를 내세웠고 특히 서양 제국의 통상 요구와 같은 음험한 속내를 간파하여 철저히 배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최선에게 서양 오랑캐[洋胡]는 조선의 위협적 존재일 뿐만은 아니다. 스승의 말씀처럼 ‘척사’의 구체적, 현실적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삿된 오랑캐를 물리치는 일은 스승의 사상을 이어 받아 실천하는 길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주고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은 일상사이다. 간단한 안부 묻기와 그에 대한 감사의 답장부터 학문적 내용에 관한 제자의 질문과 스승의 답변, 혼인·상례·장례와 같은 일상의 길흉과 관련한 예법을 둘러싼 문의와 답신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노사 기정진과 석전 이최선 사이에 오갔던 이 편지들은 안부도 질문과 답변도 아니다. 서양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 상황 처한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출전하는 제자를 격려하고 아끼는 스승의 마음, 그런 스승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감격하며 승전 소식을 전하고 의기를 더욱 다지는 제자의 마음이 오고간 글이다. 석전 이최선은 스승의 사상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몸소 실천하는 의로운 제자였다. 스승 기정진은 이런 제자가 자랑스러웠을 터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편지와 시로 전했던 것이다. <도움 받은 글> 권수용(2020), 「외세열강과 호남의 초기의병」,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제4회학술대회 자료집.
권수용 편역(2012), 『부자유친』, 심미안. 김봉곤(2004), 「노사 기정진의 사상의 형성과 위정척사운동」, 『조선시대사학보』 30. 노대환(2020), 「『병인양난녹』 속 1866년 洋擾의 기억」, 『한국학연구』57. 성택경(1981), 「병인양요와 우리의 典據」, 『정신문화연구』12. 이주천(2016), 「병인양요 연구의 사학사적 검토:1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정치외교사논총』39.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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