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거리는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게시기간 : 2021-04-2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4-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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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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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인후와 유희춘이 주고받은 우정시(友情詩) 이 두 작품은 김인후(1510〜1560)와 유희춘(1513〜1577)이 마음을 주고받은 우정시이다. 두 사람의 나이를 따져보면, 김인후가 세 살 더 위니까 선배와 후배가 나눈 대화라고 할 수 있다. ①의 김인후가 지은 시 제목에서 말한 ‘종산’은 함경도 종성(鍾城)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 가 있던 시절에 김인후가 시를 써서 보냈고, 이어서 유희춘이 김인후 시에 화답한 작품이 ②이다. 그런데 ①과 ② 시제에 모두 ‘화답’이란 말을 쓴 이유가 있다.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 갔던 때는 1547년(명종2)이었다. 종성은 한반도의 북쪽 끝인데, 그 고된 유배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갑갑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특히, 자신을 잘 알아주는 친구 한 명도 없었으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삭막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희춘은 유배 간 10년 뒤 어느 날 멀리 전라도 장성(長城) 고향 집에 있을 김인후에게 안부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러면서 그 끝부분에다 김인후의 주옥같은 장편시 10여 수를 받아 근심을 잊고 싶다는 내용을 적었다. 유배 가기 전까지 동문이요, 사돈 사이가 된 김인후. 유희춘이 생각했을 때 김인후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아주는 진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시를 지어 보내달라는 부탁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장편시’는 아마도 율시(律詩)를 말한 듯하다. 유희춘의 편지를 받은 김인후는 유희춘이 바라던 대로 시 10여 수를 지어 보낸다. 비록 유희춘이 바라던 장편시가 아닌 절구(絶句)의 단편시에 불과했지만 아쉬운 대로 마음의 대화를 나누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두 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인후는 유희춘을 가리켜 ‘아름다운 친구’라 말하며, 왜 이리 그립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난 과거처럼 한 곳에 모여 학문을 논의할 수 있을는지를 또 다시 물었다. 이어서 유희춘은 북쪽에 문안할 사람이 없어 자신은 김인후만 생각하는데, 마침 부쳐온 단편의 10여 수는 터럭 끝과 같은 미세한 대화인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서로 잘 아니까 긴 시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짤막한 수창(酬唱)을 통해 우정을 표출한 작품인 것이다. 2. 김인후와 유희춘, 동문에서 사돈이 되기까지 김인후의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으로, 전라도 장성 대맥동(大麥洞)에서 태어났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아이로 소문이 났다. 김인후가 10세 되던 해 어느 날 당시 호남 관찰사로 부임해왔던 김안국(金安國)이 몸소 대맥동 집에까지 찾아왔다. 어린이 김인후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김안국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한 사림파의 선구자이다. 곧,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데, 그러한 김안국이 김인후를 만나보러 직접 대맥동까지 간 것이다. 아마도 김안국은 김인후에게 학문에 관한 여러 가지를 물었을 것이며, 김인후는 김안국이 묻는 것에 대해 대답을 잘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안국은 김인후의 학문적 수준이 여느 아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라고 말하였다. ‘소우’란 나이가 어리지만 벗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인후는 김안국을 찾아가 뵙고 『소학』을 배웠다. 『소학』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며 지켜야 하는 기본적 도덕을 내용에 담은 책으로, 당시 사림들이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김인후가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인생의 좌표를 알려준 것으로 주목할 부분이다.
이후 18세(1527, 중종22)가 된 김인후는 1519년 기묘사화를 겪고 화순 동복현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최산두(崔山斗)에게 찾아가 학문을 닦는다. 최산두는 그의 나이 18세 때 순천으로 유배 간 김굉필에게 학문을 익혔던 사림으로, 기묘사화 여파로 동복현에 유배 갔다가 그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인후가 최산두를 찾아간 때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지 8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김인후는 이 무렵 최산두 문하에서 유희춘을 만난다. 다시 말해 김인후와 유희춘은 최산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니, 두 사람은 동문이 된 셈이다. 유희춘은 누구인가? 호는 미암(眉巖)이요,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해남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최부(崔溥)이고,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隣)이며, 형은 유성춘(柳成春)이다. 최부와 유계린, 유성춘은 모두 당대 잘 알려진 사림파의 일원으로, 또한 사림파의 한 사람인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이와 같이 김인후와 유희춘은 최산두를 같은 스승으로 모신 동문으로 끈끈한 우정을 간직하였다. 이후 김인후가 그의 나이 34세(1543, 중종38) 때 옥과 현감(玉果縣監)이 되어 현지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희춘이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가다 옥과에 들러 주자(朱子)가 지은 『효경간오』 한 질을 보여주었는데, 김인후가 손수 베껴 두었다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동문으로서 맺어진 우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인후와 유희춘은 이후 성균관에서 다시 만난다. 이때 겪었던 일과 관련해 다음의 미담(美談)이 전한다. 김하서가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 유희춘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메어다 두고는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하서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하서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모두 찬성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허균, 『성소부부고』 권23, 「성옹지소록 중(惺翁識小錄中)」.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참조)
이 미담은 여러 책에 전하고 있는데, 다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인후가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이전에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무렵 김인후는 전염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병이 옮길까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이때 당시 성균관 관원으로 있던 유희춘이 김인후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를 하여 마침내 병이 나았다. 하마터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던 김인후 입장에서 유희춘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따라서 이후 김인후는 유희춘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여파로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김인후는 한 가지 일을 제안한다. 즉, 김인후 자신의 3녀와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을 혼인시키자고 한 것이다. 김인후 입장에서 보자면, 경렴은 못나고 자신의 딸 3녀와 나이 차이도 상당하여 서로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김인후는 유배 길에 오르던 유희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멀리 귀양 가고, 처자식은 의지할 곳이 없으니, 그대의 어린 아들을 내 마땅히 데려다 사위로 삼을 것이네. 염려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하자 김인후의 온 집안사람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유희춘이 기약 없는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가세(家勢)가 기울 것은 분명하고, 사위로 삼으려고 한 경렴은 나이도 딸보다 훨씬 많을 뿐 아니라 그리 똑똑한 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인후는 집안사람들의 반대를 뒤로 한 채 그 혼사를 단행하였다. 위 인용 부분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우정이 계속 이어진 것에 대한 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김인후와 유희춘은 같은 스승 아래의 동문으로 만났다가 사돈의 인연까지 이어진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3. 살아서의 우정이 죽어서도 이어지고 김인후는 그의 나이 51세(1560, 명종15) 1월에 생을 마감한다. 이때 유희춘은 아직 유배가 풀리지 않아 종성에 있었다. 유희춘은 유배지에서 김인후의 부음(訃音)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흘러간 지난날을 떠올리며 김인후의 죽음을 위로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느낌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희춘은 종성 유배 시절에 자식과 손자를 위해 「경련을 보내고 아울러 계문에게 보이다〔送慶連兼示繼文〕」 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시 내용을 보면, 마지막 구에서 자신과 김인후의 근원을 이을 것을 주문하고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희춘 지음(『미암집』 권2) 1구에서 말한 ‘남으로 가는 아이’는 아들 경렴을 가리키고, ‘손자’는 경렴과 김인후 3녀 사이에서 태어난 계문, 즉 광선(光先)을 말한다. 2구는 어느 정도 학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으로, 손자 광선에게 격려의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선물로 벼루와 먹을 주면서 마지막으로 두 할아비의 근원을 이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두 할아비’는 유희춘 자신과 김인후를 두고 말한 것으로, 사림으로서 후손들이 그 맥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말한 것이다. 유희춘은 그의 나이 55세(1567, 명종22) 때 유배에서 풀려 다시 벼슬에 올랐다. 근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것이다. 유배가 풀리자 여기저기 가야하는 곳이 많았다. 그 중에 물론 김인후의 묘소에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암일기』 1568년 1월 12일과 13일의 기록을 보면, 유희춘이 장성에 있는 김인후의 집과 집에서 2리쯤 떨어진 김인후의 묘소에 가서 음식을 차려 올리고, 제문을 읽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제문이 전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살아서의 우정이 죽어서까지 이어진 것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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