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지리산 화엄사의 본산(本山)운동과 진응혜찬(震應慧燦) 게시기간 : 2020-11-17 07:00부터 2030-12-17 16:16까지 등록일 : 2020-11-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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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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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엄사의 위상 지리산 화엄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천년의 화엄성지임을 내세우고 있다. 화엄사가 통일신라 8세기 중엽 연기 스님에 의해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창건되어진 사찰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라하대에는 선승선각도선이 중창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화엄종찰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즈음에 1장 6척의 장육불을 모신 장육전을 건립하였으며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긴 화엄석경으로 장엄하고 있었다.
1. 화엄사 화엄석경(문화재청) 고려중기에는 대각의천과 정인왕사가 머무르며 중창불사를 일으켰으며. 고려말에는 조형왕사가 전면적인 보수를 하여 사격을 이어갔다. 조선초기 불교통폐합 정리기인 새종대에도 선종대가람으로 법등을 이어갔다. 정유재란시 왜군의 만행으로 장륙전이 전소되고 화엄석경이 산산조각이 나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벽암각성 등의 주석으로 부휴계 사찰로서 법등이 이어졌다. 화엄사는 조선후기 이후 1960년대 말까지 부휴계의 승맥이 이어졌으나, 1969년 이후 현재에 이르도록 용성진종과 동헌완규를 잇는 도광·도천계 승려가 화엄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고 식민지 지베체제가 강요되었다. 불교계에도 그 여파가 미치게 되었다.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의 제령(制令) 「조선사찰령」이 그것이다. 사찰의 본말사제가 조선사찰령의 핵심 중의 하나였다. 역사적 전통성을 가진 대사찰 화엄사가 본사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조계산 선암사의 말사로 별격지(別格地) 사찰이 된 것이다. 화엄사에서는 이를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본산승격운동을 1911년부터 1924년까지 13년간 줄기차게 진행하였다. 화엄사의 본산승격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누가 주도하였는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화엄사 벽암각성비 1911년 6월 반포된 조선사찰령 이후 화엄사가 본산으로 승인이 되는 1924년 11월까지 선암사와 화엄사간의 본산승격운동과 관련된 일체의 자료가 『사찰령시행규칙개정서류철』(1924)인데, 3권으로 편철된 750쪽이 넘는 방대한 서류철이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2. 지리산 화엄사의 본산(本山)운동과 진응혜찬(震應慧燦) 1911년 일제의 조선사찰령으로 지리산 지역을 대표하던 화엄사가 조계산 선암사의 말사가 되었음을 화엄사에는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에 지속적으로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본산승격운동을 펼폈다. 화엄사의 본산승격운동은 화엄사 주지로 파견된 김학산을 폭행치사케 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이는 등 사회문제화 되었다. 화엄사가 자리하고 있는 구례군민 800여 명이 연명을 통한 집단민원을 제기하는 등 화엄사 본산승격문제를 종교적 차원을 넘어 지방행정과 총독부의 통치정책과 관련된 문제로 확대시켜갔다1). 조선사찰령 이후 1911년 11뤌 30일 화엄사 주지로 인가된 포월영신(抱月永信)은 화엄사·흥국사를 비롯한 10개 사찰의 연합으로 화엄사가 본산으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는 요지로 제1차 승격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2년 11월 21일 화엄사의 요청을 기각하였다. 이에 화엄사는 불복하고 1913년 2월 5일 화엄사 주지 포월영신의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본산신청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제2차 운동으로 맞섰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1913년 5월 2일 전남도지사에게 화엄사의 청원이 사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화엄사 고문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화엄사에서는 답신서와 함께 「화엄사 선종대가람 도총섭 문서」, 「벽암각성비문」, 『화엄사사적』 등 화엄사 관련 여러 문건들을 전남도지사에게 제출했다. 화엄사의 본산승격운동이 본격화 되자, 일제는 화엄사의 본산인 선암사의 사법인가신청을 보류하였다. 선암사의 제1세주지 방홍파, 제2세주지 장기림은 잇따라 선암사 사법을 인가해 달라는 요청의 탄원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게 되었다. 또한 선암사 주지 장기림은 1914년 11월 24일 전남도지사에게 화엄사를 선암사 말사에 부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여러 문건들을 제출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화엄사와 선암사가 본산지정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초선총독부 안에서도 사사계(社寺係) 주임 와따나베는 화엄사 본산승격을 반대하였고, 조선총독부 촉탁 다까하시는 화엄사 본산승격을 찬성하고 있어서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고 있을 때에 화엄사는 각 본산 주지들에게 화엄사가 본산이 되늨 것이 마당하고, 본산에 포함되지 못한 부당함을 강조하는 취지의 건백서를 배포하였다. 공세적인 화엄사의 본산승격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화엄사 제1세 주지 포월영신을 대신한 주지대리 진진응(陳震應)이었다. 그는 1913년 5월 11일부터 경성에 상주하면서 조선총독부에 화엄사 본산승격운동을 주도했다. 화엄사는 1916년 1월 25일 주지 박포월의 이름으로 제3차 청원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화엄사 산하에 선암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선암사대웅전중건상량문」을 제출하였다. 또 1916년 5월 10일에는 진진응과 일본인 카미오(上日佳雄)가 서술한 『지리산화엄사적 약술(智異山華嚴寺籍 略述)』을 제출하였다. 이와같이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해도 조선총독부는 무반응이었다. 다시 화엄사는 1917년 10월 박포월(주지), 진진응(입회인), 정병헌(수집인)의 공동명의로 「智異山大華嚴寺 寺格 原由」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4차 본산승격운동이었다. 화엄사 본산승격운동의 핵심에는 진진응과 정병헌이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1919년 8월 29일 선암사 사법을 인가하였다. 전남도지사에게 화엄사의 본산 신청을 각하한다고 통첩을 보내면서 한 조치였다. 3·1운동의 격변기에 일제의 기습적인 행정조치로 보여진다. 이에 선암사는 환영했지만, 화엄사는 즉각 반발하였다. 1917년 11월 14일 화엄사 주지가 된 진진응은 1919년 9월 28일 사이토 총독에게 그 조치를 번복하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니 이것이 제5차 승격운동이었다. 이와같이 진진응은 화엄사 본산승격운동의 주역이었다. 1920년 11월 14일 진진응의 화엄사 주지 임기가 만료되었다. 선암사에서 1921년 1월 21일 광주 증심사 주지였던 김학산을 화엄사 주지로 추천하고 전남도지사는 그를 화업사 주지로 발령했다. 직전 화엄사 주지였던 진진응은 화엄사 인근 천은사 불교강원 강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동은 화엄사를 격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로 전락하게 되자, 화엄사는 즉각 탄원서를 제출하고 구례군청과 전남도청에 대표를 파견하여 본산승격을 청원했다. 당시 화엄사 승려들은 혈서를 제출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화엄사 주지로 발령받은 김학산과 그 일행들은 화엄사로 들어왔는데, 화엄사 대중들이 포위하면서 린치를 가하게 되었다. 격돌과정에서 린치를 당한 김학산은 중태에 빠졌다가 1921년 2월 9일 절명 입적하였다. 화엄사 대중 30여 명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화엄사 대중 14명이 구속되어 정식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2-7년)을 선고 받아 구속 수감되었다. 이와같이 화엄사와 선암사의 대립이 심각한 단계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제당국은 해결책이 없는 가운데 화엄사 인근 주민들에 의해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되었다. 1921년 9월 27일, 구례군민 800여명이 화엄사를 본산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청원서를 구례군청에 제출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지역의 집단민원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청원서는 전남도청을 거쳐 같은 해 10월 18일에 조선총독부에 접수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사찰령 이후 제기되어온 화엄사 본산지정 문제에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현상유지나 미봉책 뿐이었다. 그러나 화엄사와 선안사간 극심한 대립, 주지타살에 이어 지역민의 집단민원 등의 사태로 확산되기에 이르자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사무관 오다 쇼고(小田省吾)에게 화엄사에 대한 재조사를 명하였다. 오다 쇼고는 1922년 9월 18일 「선암사 화엄사 문제 조사보고서(속편)」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오다는 최종 결론에서 일제당국이 선암사 사법을 취소하고, 개정하는 형식을 통해 화엄사의 본사 승격을 단행할 수 밖에 없음을 전망하였다. 마침내 1924년 11월 20일 화엄사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화엄사의 역사 찾기. 본산승격운동의 중심에는 진진응이 있었다. 1910년대 전반기에는 화엄사 주지대리의 자격으로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활동하였고, 1910년대 후반부에는 화엄사 주지로서 본산승격운동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진진응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영(北漢永) 남진응(南震應)’이란 말에서 보여주듯이 그가 당대의 대강백(大講伯)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속성이 진씨(陳氏)로 법호가 진응(震應), 법명이 혜찬(慧燦, 혹은 慧璨)이었다. 그의 출생, 수계, 안거, 수학 이력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2). 진진응은 전남 구례군 광의면 대진리에서 1873년 12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세속 이름은 동해(東海)라고 전한다. 유년시절 광의면 인파리 서당에서 한문 및 유학을 3년간 공부하였다. 그의 나이 15세 되던 1887년 화엄사 봉천암에서 오응암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 다음 해(1888) 7월 3일 화엄사 박하월에게 사미 십계를 수지하고 혜찬(慧燦)이란 법명을 받았다. 1913년 2월 23일 쌍계사 금강계단에서 박호은(朴虎隱)에게 구족계와 대승계를 받았다.
3. 화엄사 일주문 그는 출가하자마자 교학에 몰두했다. 출가하던 당시 1887년 10월부터 화엄사 봉천암에서 박하월로부터 사미과3)와 사집과4)를 수학했다. 이어서 1890년까지는 박하월에게 외전인 고문진보를 비롯하여 사교과 중에서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웠다. 그 무렵 (1890. 2. 25- 1893. 1) 천은사 수도암 강당에서 정원화로부터 사교과의 반야경, 원각경, 법화경을 배웠다. 1893년부터 1895년 1월까지 선암사 대승암 강당에서 김경운으로부터 대교과 과정의 화엄현담, 삼현십지, 불조통재 등을 마쳤다. 1895년 2월부터 구암사에서 설유처명에게 선문염송, 전등록 등을 배웠다. 다양한 교학을 이수한 이후에는 전문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화엄사에서 대교사 법계를, 1926년 보현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받았다. 진진응은 보현사 강사를 1927년에 사직하고 화엄사로 복귀하여 화엄사 주지에 선출되었다. 1928년 화엄사 주지 선거에서 절대 다수의 지지로 선출되었다. 1933년 7월 화엄사 강원의 강사로, 1936년 무렵에는 쌍게사 강사로, 심원사 강사로 활약했으며 회주를 역임하기조 했다. 그는 1942년 1월 31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입적했다. 그가 이끌었던 화엄사 본산승격운동의 13년간의 지난한 고투는 화엄사의 근대 역사였으며 화엄사 승가공동체와 지역민들이 자기정체성을 자각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1) 한동민,「일제 강점기 화엄사의 본산승격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31, 2002)
2) 김광식, 「근현대 화엄사의 사격과 진진응·이동헌」(『대각사상』18, 2012.12 3) 사미과(沙彌科)는 십계를 받고 수행하고 있는 승려가 사찰 강원 사미과에서 1년 또는 2년의 과정. 반야심경,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등을 배운다. 4) 사찰에 있는 강원(講院)에서 사미과를 거친 뒤 사집과(四集科)에서 배우는 네 과목, 곧 도서(都序)·서장(書狀)·절요(節要)·선요(禪要).를 익힌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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