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의열 투쟁의 선구자, 기산도 게시기간 : 2020-11-19 07:00부터 2030-12-24 21:17까지 등록일 : 2020-11-16 17: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
||||||||
매국 역신 겁먹게 한 '떠돌이 거지 선비'를 아십니까?
2018년 3월 7일 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가터에 문을 연 밀양시의 “의열기념관”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에 앞장선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된 기념관인데, 이 기념관을 지은 밀양 시민들은 “밀양 없는 의열단은 없고 의열단 없는 의열 투쟁이 없다”면서 김원봉 선생과 밀양 출신 의열단 단원들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밀양 시민들은 의열 투쟁의 원조가 김원봉이 아니라 기산도라고 말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기산도 선생을 시작으로 의열 투쟁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황망하였다. 아니 부끄러웠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웠으나, 을사오적의 이름들은 외웠으면서도 이 오적을 처단하러 나선 의열의 청년 기산도를 나는 모르고 살았다. 안중근의 동상을 중외공원 안에 모시고 있는 광주인데, 의열 투쟁의 선구, 기산도에 대해서 나는 이름도 모르고 살았다. 기산도가 전 경무사 구완희 전 경무관 이세진과 함께 자객을 모집해 이근택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기산도 등 11명은 붙잡혀 경무청에 갇혔는데, 구완희와 이세진은 모두 달아나서 모면하게 되었다.
奇山度與前警務使具完喜前警務官李世鎭募刺客欲殺李根澤而不克 奇山度等十一人被執囚於警務廳完喜世鎭皆逃得免1) 정교(鄭喬)가 남긴 『대한계년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기산도가 누구인가? 의재(毅齋) 기산도(奇山度;1878-1928)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출신의 의열 투사이다.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의 깃발을 올려 한말 호남 의병의 영수가 된 기삼연 선생이 기산도의 종조부이다. 기삼연의 일대기를 쓴 김동영(金東泳)은 기삼연과 기산도의 일화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된 픽션임을 전제하고 따라 읽어 보자. 을사늑약 이후 기삼연은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왜놈들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폐인 행세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기삼연의 집에 젊은 청년 하나가 찾아왔다. “성재 할아버님!”
“아니 산도가 웬일이냐? 이 산골까지.” “할아버님께서는 지금 어느 세상에 살고 계십니까?” “그야 내가 이 세상에서 살지, 내가 저승에서 사느냐?” “할아버지,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 옛날의 의기와 충의를 어디에 두고 이렇게 딴 세상을 사십니까?” “그야 일본놈에 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면 되지 않느냐?” “할아버님 약주가 너무 심하시더니 정신마저 혼미한가 봅니다. 그 무슨 망령의 말씀이옵니까?” “산도야, 저 일진회 놈들과 오적신을 죽이려므나.” 그때서야 그 젊은 청년의 눈에서 빛이 났다. 이 청년이 바로 기산도이다. 기산도는 기삼연의 종손으로 당시 28세였다. 기산도는 그의 종조인 기삼연이 후일의 거사를 위해 거짓 세상을 사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산도는 이듬해 1906년 서울에 올라가 박제순을 저격하려다 실패했다.2) 여기까지가 김동영의 글이다. 기산도가 저격한 오적은 박제순이 아니라 이근택이었다. 역사가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를 열어 본다.3) ○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다.
2월 17일(음 1월 23일) 오후 7시쯤 군부대신 이근택이 대궐 안에서 물러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8시쯤 손님 여섯 명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뒤, 이근택은 11시쯤 자기 침실에 가서 모로 누웠다. 그의 아내는 곁에서 언서를 읽고 있었다. 갑자기 자객 세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칼로 이근택을 찌르고, 한 사람은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이근택은 허겁지겁 급히 방 안에 있던 촛불을 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객들은 단지 칼을 가지고 이근택을 마구잡이로 공격하여, 그의 머리와 왼쪽 어깨와 등 및 오른쪽 팔 등 열 곳에 상처를 입혔다. 집안 하인 한 사람이 이근택과 그의 아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 급히 그들의 침실로 달려 들어갔는데, 한 자객이 그 하인을 칼로 공격하여 얼굴과 배 및 다리 등 네 곳에 상처를 입혔다. 이때 안방 근처에 있던 우리나라 병사 6명과 경위원(警衛院) 순검 4명이 즉시 달려 들어왔다. 일본 헌병 및 순사들도 대신의 집 시렁에 설치해 둔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역시 급히 도착했다. 하지만 자객 무리들은 이미 모두 도주한 뒤였다. 이는 대개 이근택의 집 남쪽 벽돌담에 가는 새끼줄을 걸어놓고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고 붉은 피를 침구 및 방 안 사방 곳곳에 줄줄 흘렸다. 2월 17일 오전 2시쯤 이근택을 한성병원 특별실로 들것에 싣고 가서 치료했다. 치료한 지 한 달 만에 죽지는 않게 되었다. 이근택의 집안 하인은 그의 집에서 치료하여 역시 상처가 나았다. 이로부터 박제순, 이지용 등 다섯 대신의 집에는 우리나라 병사들이 총을 메고 경계하며 지켰는데, 갑절이나 더욱 몹시 엄중하게 지켰으며 오고 가는 손님들로부터 명함을 받고 샅샅이 살폈다. 안중근(1879-1910)을 소개하는 전기는 산을 이룬다. 김구(1876-1949)를 찬양하는 일대기는 바다를 이룬다. 기산도(1878-1928)는 안중근, 김구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못지않게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책 한 권이 없는 것이냐? 혹시 호남인을 차별하는 주체, 호남인을 멸시하는 주체는 정작 호남인이 아닌가. 자료를 뒤져 보았다. 임시정부의 이론가 조소앙 선생이 남긴 ≪遺芳集≫에서 기산도의 이름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조소앙은 한말 암살당의 원조라고, 의열 투쟁의 원조가 기산도라고 분명히 적어놓았다. 기산도는 호남의 유학자였다. 책을 읽어 대의를 알아 존숭을 받았다. 1905년 보호조약이 체결된 뒤에 공은 이종대(李鍾大), 김석항(金錫恒) 등 11명과 오적을 제거하기로 모의하며 말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은 나라의 역적이며, 백성의 공적이다. 보호조약에 서명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두 그를 죽일 수가 있다. 우리가 방 안에서 울부짖기보다는 차라리 큰길에서 역적들을 죽이는 것이 낫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국내 청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면 민족이 다시 일어날 기반을 세울 수 있다.” 이에 각각 임무를 나누고 거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모의가 밖으로 새나가 체포되고 말았다. 비록 당시에 역적을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한말 암살당의 원조라고 이를 만하다.4)
기산도는 16세인 1893년에 결혼했다. 그의 처는 1908년 구례 연곡사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딸이었다. 기산도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의 가문 출신답게 장가를 들었던 셈이다. 본인 또한 일본군과 싸운 의병이었다. 1906년 2월 16일 초저녁, 을사오적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을 급습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기산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비록 중늙은이이지만, 직접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본 경험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기산도가 말하는 의병 전투는 두 해 전인 1904년의 일이었다. 당시 기산도는 장성과 광주 사이의 못재 고개에서 일병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기산도 의병군은 일병을 여럿 죽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도 3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기산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학 때 40만 명이 일제에 학살됐소. 우리는 무기에서 왜적을 상대한 수준이 못 되오. 단기필마로 싸우는 것이 옳소. 내가 서울로 가서 흉적을 처단할 테니 두고 보시오." 이후 1905년 기산도는 상경했다. 그는 이상철ㆍ박종섭ㆍ박경하ㆍ이범석ㆍ서상규ㆍ안한주ㆍ이종대ㆍ손성원ㆍ박용현ㆍ김필현ㆍ이태화ㆍ한성모ㆍ구완희ㆍ이세진 등과 더불어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결사대를 조작했다. 기산도가 주도하여 결성한 이 모임은 매국 원흉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 독립운동의 선구였다. 사람들은 1906년 2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이씨봉자(李氏逢刺, 이씨가 자객을 만났다)' 사건을 알게 됐다.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再昨日, 어제의 전날)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 첩)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지기(경비원)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 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기산도는 박종섭ㆍ박경하ㆍ안한주ㆍ이종대와 함께 붙잡혔다. 기산도는 병원에서 퇴원 후 자신을 직접 신문한 이근택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 오적(五賊)을 죽이고자 하는 지사들이 어찌 한두 사람이겠느냐! 2천만 모두가 너희들을 처단하러 올 것이다. 네놈들은 결코 천명을 살지 못할 테니 하늘에 지은 죗값을 하리라. 다만 내가 서툴러서 너를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탄로가 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재판장은 1906년 5월 13일 기산도에게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그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1908년 옥중에서 기산도는 종조부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 소식을 들어야 했다. 기삼연 의병장은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 소식에 정신을 놓고 통곡을 하던 기산도는 다짐했다. "내가 어찌 원수를 갚지 않고 이 싸움을 그만두겠는가!" 1916년 기산도는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의 집에 숨어들었다. 고흥군 도화면의 당오리를 은거지로 삼고, 낮에는 머슴살이하고, 밤에는 사랑방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길렀다. 기산도에 관한 한 편의 글을 찾았다. 김상기가 쓴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기산도에 관한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었다. 1919년 기산도가 펼친 독립운동 자금 모집투쟁에 관해 김상기는 소상하게 적었다. 줄여 옮긴다. 1919년 기산도는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기산도는 서울에서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김철을 만났다. 김철은 임시정부의 명을 띄고 의무금을 모집하러 왔다면서 기산도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기산도는 김철의 취지에 동의하고,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파위원에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21일 김철을 전남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왔다. 5월 24일 김철과 함께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의 김종택을 방문하여 모금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종택은 6월 12일 이인행을 기산도에게 데리고 와 동참하게 하였다. 기산도는 6월 상순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의 박상균 집에서 박은용을 만나 독립자금 모집 활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광양의 의병장 황병학도 참여시켰다. 1919년 10월 김종택이 서울의 부호 홍종욱의 집에서 370원의 적금통장을 강탈하였다. 이 일로 기산도의 행적이 밝혀지게 되었다. 10월 21일 기산도는 경찰에 체포되었다.5)
1920년 5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 결정을 받고, 7월 19일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였으나 기산도는 혹심한 고문으로 왼쪽 다리가 절단되고 말았다. 출옥한 후 불구의 몸으로 전전하였다. 그는 재혼한 아내 박순임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가며 떠돌이 생활을 하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1928년 51세로 운명하였다. 그의 유언은 소박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 앞에 작은 나무 비 하나를 세워달라고 했다. '떠돌이 거지 선비 기산도의 묘'
'流離丐乞之士奇山度之墓', 부기 : ‘丐’은 ‘빌 개’이다. ‘丐’을 잘못 보아 ‘焉’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리개걸(流離丐乞)은 유리걸식(流離乞食)의 뜻이다.
1) 정교, ≪대한계년사 8≫, 김우철, 소명출판, 2004, 413쪽.
2) 기호원, ≪성재기삼연선생전≫, 1990, 173쪽. 3) ≪대한계년사 8≫, 27쪽. 4) 조소앙, ≪遺芳集≫, 한국고전번역원, 2019, 233쪽. 5) 김상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122~123쪽. 글쓴이 황광우 작가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