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공동체 운영의 중심이자 누정문학의 산실, 유곡모정-양과동정2 게시기간 : 2020-11-21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11-20 14:0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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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모정과 유곡 모정, ‘초정’과 ‘유곡정’ 양과정의 건립 이후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먼저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1499~1547)의 「제양과모정」이 있다.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송인수는 1543년(중종 39) 2월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각 고을에서 사서오경을 개간하게 하여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송인수는 전라도 관찰사 시절 남평현감 백인걸(白仁傑, 1497~1579), 무장현감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송인수는 1543년 2월부터 1544년 가을까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다. 백인걸은 1541년 3월부터 1545년 3월까지 남평현감으로 재임하였다. 유희춘은 1543년 6월부터 1545년 5월 사이 무장현감을 지낸다. 송인수의 「제양과모정」제목의 ‘모정(茅亭)’과 내용에서 ‘초정(草亭)’ 표기에서 이 때까지는 초가 모정이었던 것 같다. 흐르는 시냇물은 수춘천이었을 것이고 비개인 높은 산은 남쪽으로는 정광산과 죽령산, 서쪽으로 제봉산, 북쪽 저멀리 금당산, 남동쪽 저멀리 건지산도 보이는 곳. 송인수의 문집 규암집에 실린 시의 제목은 「제광주유곡정(題光州柳谷亭)」이다. 유곡은 당시 양과촌이 있던 지역의 면 이름이다. 유등곡(柳等谷)이라고도 했다. 광주의 유곡면에 있던 초정으로 읽힌다. 박광옥이 읊은 유곡 모정, ‘야정’과 ‘소정’ 최형한, 송인수에 이어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1526~1593)과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도 유상한다. 박광옥의 시에서 ‘유곡’은 양과동정이 있는 곳은 땅이름이자 면 지명이다. 제목에는 ‘모정’, 시의 내용에 ‘야정’, ‘소정’이라 한 것을 보면 이 시기에도 ‘초정’이었던 것 같다.
부용정, 양과동, 선도 동약-인적 연망 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이다. 이장동 황산 출생이다. 할아버지 박자회, 아버지 박곤, 숙부 박붕 등 삼대가 양과동 동계좌목에 올라 있다. 양과동과 가까운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명종 10년(1555) 11월 선도 동약 서문을 쓴다. 백록동 규약과 여씨향약을 참작하고 중론도 채택한다고 하였다. 전래 향약을 지역의 실정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이같은 인적 연망을 통하여 부용정 동약, 양과정 동약, 선도면 동약 등이 서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광옥이 유곡의 모정, 양과동정에 간 것은 한여름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을 모시고 야지의 정자에서 더위를 피한 것을 보아서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질녘이 되었다. 밥짓는 연기가 저 산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면. 맡은바 업을 즐겨하니 나랏일에 저어할 것 없고 서로 존중하니 산골에 산다고 누가 하시하나. 존귀함 그대로인데. 그런데 어찌 세상사는 공명을 원할까. 온종일 한가롭게 흥을 즐기다가 느지막이 정자에 오른다. 소매를 헤치고 오르니 숲이 깊어 더운 기운은 다한 듯하다. 농사철에 알맞게 비도 적당히 내리니 벼이삭은 잘 돋아나고 노소가 함께 앉아 애사 경사 소식 나누며 술잔을 오간다. 이름난 이곳 많이 알려져 있지만 들밖에서 보면 숨은 듯 그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양과 모정이 땟둥한 동산에 있지만 조그만 초정은 가려져 있고 더군다나 숲마저 있으니 숨길만하다. 앞에서는 공명을 탓했는데, 여기 드러나지 않게 있는 것이 이 아니 좋을손가. 서늘한 저녁 때에 정자에 올라 쉬네 이어 고경명이 양과 모정에서 읊은 시이다. 이 시도 ‘모정’이라 했다. 박광옥의 시와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어쩌면 함께 방문하여 시를 지으면서 수작을 했을 것도 같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의 시에 차운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석천의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따님이다. 박자회는 음성박씨로 바로 박광옥의 할아버지이다. 석천은 회재로 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큰 어른이기는 하지만 인척으로 사촌간이다.
고경명의 첫 시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의 시에 차운한 것이라는 표기가 『제봉집』에 있다. 사실상 고경명은 양과정의 주인이라 할만하다. 양과정은 고경명의 별서로 일컫기도 한다. 그러니 기구(起句)에서부터 수없이 이웃사람을 초청하고 이들을 맞아 좋은 날에 여러 번을 정자에 오른다고 하였다. 언덕 너머 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 오르고, 저 건너 수춘천의 다리가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인다. 새들 날아들고 나무 등걸엔 술병이 놓여 있다. 동네 아이들도 덩달아 좋다하니 그림보다도 좋구나. 버드나무 숲 강길따라 정자에 올라 바람을 쐰다. 보리는 익어가고 모내기는 한창이다. 채소는 잘 자라고 주점 술 향내는 온 동네에 퍼진다. 이제 가는 길을 아니, 왕래가 잦아지니 개들도 짓지를 않는다. 1750년 정월 초하루 노소가 시회를 열다 현전하는 동약 문서자료 가운데 시회에 관한 자료도 남아 있다. 1750년(영조 26, 경오) 정월 초하루(人日)에 마을 계사에서 노소들이 모여 시회를 열었다. 이때 참여자 가운데 시를 써낸 열일곱명의 시를 필사한 책이다. 최경억(崔慶億, 1681년생), 유문섭(柳文燮, 1690년생), 이언추(李彦樞, 1693년생), 고훤(高暄, 1706년생), 박승광(朴承光, 1713년생) 등이다. 제일 연장자가 일흔살이고 젊은이는 서른 열덟살이다. 표제는 『경오인일운(庚午人日韻)』이다. 1891년(신묘)에 표지를 입혔다. 이같은 시회 전통은 현대사회에서도 이어져 왔다. 1967년 말복날 시문에 조예가 있는 양과동 계원 스물한명이 별도로 모여 시회를 열고 시를 모은 기록이 남아 있다. 낱장을 이어 붙여 두루말이로 된 『양과정아회(良苽亭雅會)』이다. 양과동정은 1901년에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어쩌면 지금의 규모는 이때 갖춰지지 않았나 싶다. 공동체 운영의 중심이자 누정문학의 산실 양과동정이 동약이나 향약 시행처였고, 어쩌면 향음주례도 했을법하다. 규약 조목은 사족의 향촌 지배에 비중이 더 있는 향규적인 성격을 지닌다. 무엇 보다도 1604년 중수 이후 근래에 이르기까지 39점의 문서가 남아 있고, 지금도 강신이나 계회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누정의 기능 가운데 공동체 운영의 중심 공간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최형한, 임억령, 박광옥, 고경명, 고정봉, 고의상 등이 시문을 남겨 누정문학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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