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 완도 가리포진 게시기간 : 2020-12-19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12-17 14:4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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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加里浦鎭) 탄생하다.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鎭堡)」조에 “중종 17년에 왜구의 요충지에 진을 처음 설치하였으며 달량수진(達梁水鎭)을 합하였다”1)라 하여 1522년(중종 17) 가리포 수군진이 탄생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초대 수군첨절제사(약칭 첨사)로 이반(李班)이 도임(到任)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보면 일본과의 바닷길에 대한 설명이 있다.2) 「통문관지」, 「왜기」, 「김세렴 풍향기」 등을 인용하여 바닷길 사정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그중에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왜구대책(倭寇對策)」도 있는데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즉 “평상시에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는 왜적 중 그 태반이 이 섬 사람(오도 사람)이며, 그들이 들어오는 길은 ①오도(五島)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三島)로 와서 밤을 지내고 선산도(仙山島)를 지나 바로 고금도와 가리포 등의 방면으로 들어오며, ②대마도에서 동북풍을 타고 연화도와 욕지도의 사이에 이르러서 밤을 지내고 곧장 남해의 미조(彌助)·방답(防踏) 등 지방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전라도로 입구(入寇)하는 데 익혀진 수로(水路)이다.”
라고 하여 두 가지 바닷길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두 바닷길 중 ①이 늘 뜻밖에 일어나며 ②는 언제나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면서, 전라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금도의 앞면을 점령하여야만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군진을 보다 전진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전진 배치에 적합한 곳이 바로 가리포였다. 이렇게 가리포는 왜구를 방어하는 전진기지로서의 요충지였기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때 가리포에 수군진을 설치하였을까? 그것도 달량진을 병합하면서까지…. 그 전후 동향을 살펴보자. 추자도(楸子島) 왜변 그 전 해인 1521년(동 16)에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추자도 왜변이었다. 이에 대해 병조판서 고형산(高荊山)이 제주목사 이운(李耘)의 보고서를 보고 말하기를 “겨우 두세 달 사이에 해상을 다니는 배가 왜적을 만나 7척이나 부서졌고 배에 탔던 사람 중에 사상자도 많”은데, 그곳이 “병진(兵鎭)과 멀리 떨어져 임기응변으로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라우도 수사는 오로지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둔 것인데, 지금 수사 김양필(金良弼)과 달량만호(達梁萬戶) 정위(鄭偉) 등이 평상시에 변방 일을 조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양필·정위 등을 잡아다 추고하도록 하였다.3) 이때 문제가 되었던 곳은 추자도였다. 그런데 추안(推案)을 보면 김양필이 “추자도는 아주 멀어 그(달량만호 정위)가 순무(巡撫)해야 할 곳이 아니니 어찌 검거하여 조치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중종은 병조낭관(兵曹郞官)을 불러 추자도가 과연 우도 수사의 관할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추자도는 제주에도 속하지 않고 우도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 그러나 조치하여 방어하는 일은 수사의 임무”라고 하면서 김양필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4) 이에 중종이 다시 “지금 김양필 등의 상소를 보니, 양필은 ‘추자도는 직책상 저의 관할이 아니라서 비록 수색하고 싶었어도 감히 마음대로 못했다.’ 하고 정위는 ‘주장(主將)의 지휘를 따랐다.’ 하니, 또한 일리가 있다. 정부(政府)에 의논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5) 그때까지 추자도에 대한 관할 책임은 불분명했던 것 같다. 이에 대신들이 논의하기를 “추자도는 우수진(右水鎭, 즉 우수영)과 아주 멀어 관할할 수가 없고 적선(賊船)의 왕래도 멀어서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과거에 수토(搜討)하기를 청한 자가 있었어도 윤허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라 하여 우수영이 직접 추자도를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다만 “수삼 개월 사이에 왜적을 만나 자주 패하였으니 그곳의 방어가 해이해졌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금지하지 않는다면 제주의 수로 또한 막힐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라 하여 제주 바닷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였다. 고형산은 추자도는 멀어서 관섭할 수 없다지만 그들이 지나는 곳이 실상 수사가 관장하는 범위 안에 있다고 보았다.6) 이처럼 추자도 왜변에 대한 대처를 논의하는 가운데 수영(水營)을 옮기는 문제까지도 제기되기에 이르렀다.7) 이 일로 인하여 그때까지 추자도를 수토하는 일은 우수영 관할이 아니었는데 이때부터 예가 되어 우수영이 수토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8) 이에 따라 달량만호에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 그후 가리포진이 신설되고 달량진이 여기에 합속됨에 따라 그 임무도 가리포진의 것이 되었다. 1522년(중종 17) 회령포‧가리포 등에 잦은 왜구의 침입 가리포에 진을 신설하면서 성을 쌓고 있던 때인 1522년 6월 4일에 왜적이 장흥의 회령포(會寧浦)를 침범하였고 얼마 후에 가리포에도 쳐들어와 접전이 있었다. 전라도어사 윤지형(尹止衡)의 보고에 따르면 "가리포의 성보(城堡)는 산중턱에 있으므로 적이 만일 먼저 그 산꼭대기에 오르게 된다면 공격하기가 매우 용이합니다. … 가리포에서 접전할 때에는 왜적 4명이 몰래 성 밑으로 빠져 나와 진(鎭)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벌거벗은 몸으로 손바닥을 치며 ‘왜인이 앞에 이른다.’ 외치기에 바라보았더니 과연 왜선 4척이 바다 가운데 떠 있었는데 거리가 약 3백 보(步) 정도 되었습니다. 만호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거리의 원근도 헤아리지 않고 활을 마구 쏘아대서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갔습니다. 이때 왜적은 상륙하여 2백 보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몸을 가볍게 뛰면서 판자로 화살을 막으며 우리나라의 화살을 다 주웠습니다. 진의 위기가 순식간에 달려 있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크게 외치기를 ‘수사가 배 40척을 거느리고 온다!’ 하여 그들을 속이자 왜적은 곧 물러갔습니다.”
고 하였다.9) 그리고 이어서 6월 11일에 왜선이 신달량(新達梁)에 침범했다. 전라도관찰사 신상(申鏛)과 절도사 오보(吳堡)가 치계(馳啓)하기를, "왜선 12척이 깃발을 세우고 징과 북을 치면서 80여 명이 먼저 하륙(下陸)하여 신달량에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들이 성벽을 굳게 단속하고 난사(亂射)하며 또한 포를 쏘자 흩어져 북쪽으로 도망했습니다.”10)
또 "왜선들이 더러는 15척, 더러는 10여 척씩 떼를 지어 초도(草島)·보길도·추자도 등지에 드나들므로 남도포(南桃浦)만호 박정(朴楨)과 금갑도(金甲島)만호 최자원(崔自源) 등이 노근도(老勤島)에서 왜선 8척을 만나 서로 싸우되, 신기전(神機箭)과 총통(銃筒)을 쏘아댔고 또한 왜적 5∼6명이 명중된 다음에야 물러갔습니다.“11)
라 하였다. 이어서 전라도 우도의 포작간(鮑作干)들이 보길도에서 왜적을 만나 의복·식량·잡물(雜物)을 빼앗기고 배도 불타버렸다.12) 제주 바닷길을 지켜라!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비변사 대신들은 “‘적왜들이 한갓 가만히 포작간들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섬에 머물러 있으며 소굴을 만들고, 또한 진을 침범하므로 제주와의 길이 장차 막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목포 이상을 넘어서게 된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제도(諸島)를 수색 토벌하여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합니다.”
라 하여 “우리 땅을 소굴로 삼아 제주와의 길이 끊어지게 된다면 작은 일이 아니므로 단지 진만 지키면서 방어할 뿐이어서는 안 되고 수색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13) 이렇게 왜적들의 침범이 이어지자 영사(領事) 정광필이 아뢰기를, “왜적이 계속 왕래하는 까닭은 제주를 통행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이익을 보았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겨 그 술책을 앞으로 마구 쓸 것입니다.”14)
라 하여 왜적의 목적이 제주 바닷길의 차단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정부에서는 제주의 바닷길이 막힐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이때 이를 방어할 임무를 누가 어디서 수행할 것인가가 관건이 되었다. 그들이 찾은 답은 수군진의 전진 배치였고 그 자리는 곧 가리포였다. 이제 가리포진은 추자도 수토에 더하여 제주 바닷길 방어까지 맡게 되었다.
그 후 가리포진은 성을 쌓고 또 행영(行營)도 설치하면서 모양을 갖추어 갔다. 신설된 지 8년이 지난 1530년(동 25), 우도 수사 이몽린(李夢麟)이 보고하기를 "왜선 한 척이 청산도에서 나와 추자도로 향하여 가기에 신(臣)이 병선을 정제(整齊)하여 가리포 행영에 도착해서 변(變)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왜선 한 척이 제도(第島)에서 신이 복병(伏兵)한 곳으로 향해 왔습니다. 왜병은 대개 30여 명이었는데 큰 소리로 외치면서 창검과 궁시(弓矢)로 접전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이 거느린 병선에서 쇠뇌들을 일시에 발사하니, 왜인 4명이 물에 몸을 던져 헤엄쳐 육지로 올라와서 1명이 군관 고산동(高山仝)을 향하여 돌입해 들어오므로 산동이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또 3인이 칼을 가지고 헤엄쳐 신의 배로 향해 오는 것도 쏘아 맞추어 포획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13명은 화살을 맞고 배안에 고꾸라지기도 하고 배밑으로 숨기도 하였는데, 배안에 불을 던져 반은 불타고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서 끝까지 쫓지는 못했습니다. 신의 왼쪽 팔에도 화살을 맞기는 했으나 상처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참획(斬獲)한 왜수(倭首) 17급과 왜궁시(倭弓矢)·반의(斑衣)·잡물(雜物)을 올려보냅니다.”15)
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렇듯 가리포 행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가리포진 신설 때인 1522년(동 17) 『중종실록』 기사를 보면, 병조판서 장순손(張順孫)이 아뢰기를, “미조항·방답·가리포 등에 이미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긴요한 방어지입니다”16)라 하였다. 이를 통해 가리포 축성과 함께 미조항의 축성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종은 “미조항 일은 제주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자주 왜적에게 피해를 입게 되므로 대신들이 모두 시급히 진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라 하여 미조항의 축성도 제주 바닷길 방어 때문임을 다시 언급하였다. 미조항은 남해도 끝에 있는데, 여기에 진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성종조부터17) 있어왔다. 이처럼 이즈음 추자도와 제주도 바닷길의 방어가 전체적으로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 점은 이후 기록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1554년(명종 9) 제주도와 보길도에 왜변이 있었을 때 “조방장(助防將)은 가리포첨사가 오로지 제주만을 위해 조방하고 있으니 특별히 파견할 필요는 없습니다”18)라는 말이 나온다. 가리포가 오로지 제주만을 조방하고 있다는 말이 주목된다. 또 이어서 비변사가 아뢰기를 “가리포첨사를 당상관으로 차송(差送)한 것은 전적으로 제주를 구원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19)라 하였다. 그밖에도 “제주에 일이 있게 되면 가리포첨사가 먼저 들어가 원조(援助)해야 되는데”20)라거나 헌부가 아뢰기를 “제주에 변이 있게 되면 가리포첨사가 구원 나가야 할 것을 비변사가 이미 의정했습니다”21)라 하였고, “왜구들이 제주에 모여들 때에 그곳의 병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가리포첨사가 마땅히 먼저 나아가 구원해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22) 이런 기록들에서 가리포진의 설치가 제주 바닷길 방어에 주목적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이렇게 정부에서는 가리포진을 강화해가면서 제주 바닷길 방어에 진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가리포진의 위상은 커져갔다. 바로 이때 이를 방해라도 하려는 듯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난다. 준비가 덜 되어 있던 형편에서 을묘왜변을 당하였다. 이 왜변을 겪고 난 후 제주도 방어문제를 논의하는데, 간원이 아뢰기를, “제주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저번 흉년에 백성들이 많이 죽어 만약 적변이 생기면 안에는 수졸(守卒)이 없으므로 조정에서 가리포첨사와 진도군수로 제주원장(濟州援將)을 삼았습니다.”
라 전제하고 난 뒤, 을묘왜변의 사례를 들어 가리포나 진도의 성을 비우면 안 된다는 이유로 제주에 대한 지원을 금하자는 의견을 냈다.23) 을묘왜변으로 가리포진의 역할이 제주 방어보다 가리포를 비롯한 주변 방어가 더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제주 바닷길 방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가리포진은 역할이 추가되면서 점차 그 규모를 키워갔다.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 제일의 요충지 가리포진은 1555년 을묘왜변을 당하고 난 후, 진성을 보수 확장하고 병력을 증강하면서 조선에서 가장 큰 수군진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순신이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선조 29) 윤8월 24일, 가리포에 와서 부찰사 한효순, 우우후 이정충(李廷忠)과 함께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서 보고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호남의 제일 요충지이다[眞湖南之第一要衝也].”
라고 하였다.24)이 말이 가리포진의 위상을 결정 짓는 상징적인 문구가 되었다. 전라도 수군진 편제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가리포진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라가 보자. 『경국대전』(1476년)에 정리된 전라도 수군의 편제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1】 『경국대전』 「병전」 「외관직」 중 전라도 수군 편제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의 진관체제로 구성된 전라도 수군 편제를 보면, 우수영과 좌수영에 주진이 있고 임치도진과 사도진이 거진, 그리고 나머지가 제진이 되어 위계를 구성하였다. 아직 가리포진은 신설 전이었다. 이후 신설되었을 때 가리포진은 제진으로 거진인 임치도 진관에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숙종년간에 해방(海防)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면서, 1681년(숙종 7) 신지도에 만호진이 설치되는 등 수군진도 늘어났다. 진관도 재편되었다. 우도는 위도(蝟島)와 가리포 두 개의 진이 거진이 되었다. 위도에는 임치·고군산·산목포(山木浦)·다경포·법성포·검모포(黔毛浦)·군산포·신도(新島)의 여덟 보(堡)를, 가리포에는 고금도·남도포·금갑도·어란포·이진·신지도·마도·회령포의 여덟 보를 소속시켰다. 위도와 가리포 두 진은 양남(兩南) 수로의 인후였으므로 전라도의 감사와 수사에게 순의(詢議)하여 이렇게 진관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리포진의 위상은 대폭 강화되었다.25) 또 1719년(숙종 45)에 “근년 전라도에 신설된 진보(鎭堡)가 상당히 많은데”라26) 하듯이 이때를 전후하여 신설되는 진보(鎭堡)가 특히 전라도에 유난히 많았다. 숙종대 증설되었던 수군진들은 영조대 일부를 혁파하였고, 이를 「양남진보변통절목(兩南鎭堡變通節目)」으로 정리하였다.27) 이에 따르면 위도·법성포·가리포·군산 등 네 개의 진은 위치가 긴중(緊重)하여 책임이 가볍지 않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력과(履歷窠, 근무 평점을 가산해 주는 자리)였는데, 이제 구근(久勤) 자리에 속하게 하였다. 그래서 첨사에서 수사로 승진하는 자리가 되었다. 가리포는 후에 신자과(新資窠)28)가 되기도 하였다. 1780년(정조 4)에 여종주(呂從周)가 고군산첨사로 임명받았는데, 정조가 “그대가 공로를 바친 것으로 말하면 짝할 사람이 없다. 이제 가리포첨사와 서로 바꾼 것은 공로에 보답하는 뜻을 보여줌으로써 고무시키려는 것이다.”29)
라 하여 가리포첨사로 바꿔주었다. 이는 같은 거진이라도 가리포첨사가 고군산첨사보다는 높은 지위였음을 말하여주는 근거가 된다. 18세기 후반 정조대가 되면 이런 사정들이 반영되어 『대전통편』(1785, 정조 9)에 다음과 같이 편제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2】 『대전통편』 「병전」 「외관직」 중 전라도 수군 편제
* 관찰사가 절도사를 겸하기 때문에 절도사는 3원임 * 별장은 격포·흑산도·고돌산에 두었고, 달량진과 돌산포의 만호는 혁파했다. * 제주목사는 수군방어사를 겸하고 제주진에 수군절제사 1원, 명월포에 만호 1인을 두었다. 철종대에는 병조판서 홍종응(洪鍾應)의 청에 따라 “완도를 독진(獨鎭)으로 만들어 (첨사를) 가려서 차임하여 보내고, 전최(殿最)는 순영에서 하게 하여” 그 위상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진과 해남의 사이에 완도가 있으니, 옛날에 청해영(淸海營)이라 일컫던 곳으로 우수사의 행영입니다. 해방(海防)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의 요충지로 일본과 인접하여 순풍이 한 번 불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첨사를 두었으며 … 충무공 이순신이 참으로 호남 제일의 요충지라고 말하였으며, 그 가까이의 대여섯 섬의 진을 모두 본진에서 관할합니다.”30)
라 하여 가리포진의 중요한 바를 거론하였다. 196대 첨사 홍선(洪墡)이 독진 승격을 기념하여 이순신의 말을 빌어 ‘호남제일번(湖南第一藩)’이란 현판 휘호를 써서 객사 입구문에 걸었다. 가리포진은 이렇게 6개의 진을 거느리는 최대의 거진이었다. 주진의 하나였던 전라좌수영이 거느린 진이 5개였으니 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가리포진에는 거북선도 있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라우수영에는 모두 5척의 거북선이 있었다. 나주에 2척이 있었고, 가리포, 마도, 신지도에 각각 1척씩 있었다.31) 그런데 마도와 신지도는 모두 가리포 진관이기 때문에 가리포진은 실제로 거북선 3척을 관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또한 가리포진의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일 것이다. 청산도진과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설치 그 후 19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황당선이나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고 상대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면서 해안 방어의 개념이 달라졌다. 이에 따라 진관 구성도 달라졌다. 외양(外洋) 방어를 위해 1866년(고종 3)에 청산도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금도·신지도·마도·소안도 등 네 개의 진을 모두 청산도진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가리포 진관이었던 고금도·신지도·마도가 청산도 진관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1867년(동 4)에 진도방어영을 설치하면서 구성이 또 달라졌다.32) 진도방어영의 절제(節制) 별단을 보면, 남도(南桃)·금갑·지도·이진·어란포·목포·다경포·임자도·마도 등 아홉 진을 진도 진관으로 옮겨 변방을 방어하는 방책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가리포 진관에 속했던 금갑‧이진‧어란포 등과, 청산도진 관할의 마도 등이 모두 진도진 관할로 옮겨갔다.33) 가리포 진관 소속 진들이 모두 청산도진 또는 진도방어영으로 옮겨갔고 가리포진은 이제 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가리포진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자리가 비기도 하였다.34) 좌·우수영의 경계를 나누는 곳 조선시대에 전라‧경상‧충청은 이를 각각 좌‧우도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이때 좌‧우도를 나누는 기준은 서울이었지만 그 소속 군현이 항상 같지는 않았다. 『증보문헌비고』의 구분에 따라 현 전라남도 서남해의 행정구역만을 보면, 좌도에는 장흥·순천·낙안·보성·광양·흥양 등이, 우도에는 영암·영광·함평·고창·무장·무안·진도·강진·해남·제주·대정·정의 등이 각각 속하였다. 그런데 강진의 경우 『증보문헌비고』나 『탁지지』에는 우도로 편제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 발간된 『호남지도』에는 좌도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렇듯 강진은 우도와 좌도로 그 소속이 오락가락하였다. 이에 따라 가리포진의 소속도 달라졌다. 기록을 통해 그 이동사정을 정리해 보자. 1686년(숙종 12)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유(申鍒)의 장계에 따라 강진의 경내에 있는 네 진, 즉 가리포·마도·신지도·고금도 등을 좌수영으로 소속을 옮겼다.35) 1690년(동 16)에는 어사 심계량(沈季良)이 별단에서 왕래하는데 폐단이 있다고 하여 도로 우수영에 예속시켰다. 왕래하는 폐단이란 육로로 왕래할 때 강진의 진들은 우수영이 좌수영보다 더 가깝기 때문에 좌수영 소속이 폐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1777년(정조 1) 4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문덕(李文德)이 장계를 올려 ”주사(舟師, 즉 수군)의 편부(便否)는 의당 수로(水路)의 험이(險夷)를 논해야 하는 것”이라 하면서 “선척을 운행할 즈음에 본영(좌수영)으로 향할 경우에는 험한 파도가 없는 반면 우영으로 향할 경우에는 험한 파도가 있습니다.”
라 하여 바닷길로 보면 좌수영 소속이 오히려 편하다고 주장하면서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강진 자체가 좌도와 우도로 그 소속이 바뀌곤 했는데, 이에 따라 가리포진을 비롯한 강진 관할의 네 개 진도 오락가락했다. 이처럼 가리포진은 전라도의 좌계와 우계를 나누는 경계에 있으면서 서로 관할을 요청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었다.36) 하지만 가리포진이 주로 우수영에 속하였기 때문에 우수영이 좌수영보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 「강진현」 「관방(關防)」조에는 “금상(중종) 16년에 왜구의 요로이므로 비로소 진을 설치하고, 첨사 한 사람을 두어 달량의 수군을 병합시켰다”라고 되어 있기도 하나 다른 대부분의 기록들에서는 17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17년을 따른다.
2) 『萬機要覽』 「軍政編」 四 「海防」 「日本相通海路」 3)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6월 13일 1번째 기사 4)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7월 6일 4번째 기사 5)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7월 7일 2번째 기사 6)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7월 8일 1번째 기사 7)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8월 10일 3번째 기사 8)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7월 6일 4번째 기사 9)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7월 15일 1번째 기사 10)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6월 11일 1번째 기사 11)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6월 14일 2번째 기사 12)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6월 20일 11번째 기사 13)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6월 22일 1번째 기사 14)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 7월 15일 1번째 기사 15)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1530) 3월 10일 1번째 기사 16) 『중종실록』 44권, 중종 17년(1522) 5월 7일 8번째 기사 17) 『중종실록』 44권, 중종 17년(1522) 2월 27일 1번째 기사 18)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1554) 6월 8일 2번째 기사 19)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1554) 6월 25일 1번째 기사 20)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1월 10일 5번째 기사 21)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1월 11일 1번째 기사 22)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1월 12일 2번째 기사 23) 『명종실록』 20권, 명종 11년(1556) 2월 21일 2번째 기사 24) 『李忠武公全書』卷之七, 「亂中日記」三 [丙申] 閏八月 戊子 25) 『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1683) 윤6월 10일 1번째 기사 26) 『국역 비변사등록』 72책, 숙종 45년(1719) 5월 2일, 右議政 李健命 등이 입시하여 輪番軍 및 戰船 등 全羅道에 신설된 鎭堡를 운영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27) 『국역 비변사등록』 122책, 영조 27년(1751) 2월 11일, 兩南鎭堡燮通節目을 定奪한 바에 따라 써서 들인다는 備邊司의 啓와 그 節目 28) 『승정원일기』 고종 3년(1866) 11월 15일[13] 영종도 첨사를 신자과로 시행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29) 『일성록』 정조 4년(1780) 12월 22일[01] 30) 『국역 비변사등록』 241책, 철종 5년(1854) 10월 11일, 領中樞府事 鄭元容 등이 입시하여 肇慶廟 改修에 대한 施賞, 順天의 軍布 代錢 등에 대해 논의함 31) 『萬機要覽』 「軍政編」四 「舟師」 「全羅右水營」 32) 『국역 비변사등록』 251책, 고종 3년(1866) 12월 14일, 珍島防禦營의 節制防守 방안을 別單으로 써서 들인다는 議政府의 啓와 그 別單 33) 『승정원일기』 고종 4년(1867) 1월 2일[19], 장흥진 관할의 해남 등을 모두 진도진 관할로 고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34) 『국역 비변사등록』 252책, 고종 7년(1870) 6월 9일, 加里浦僉使를 口傳으로 擇差할 것을 청하는 議政府의 啓 35) 『국역 비변사등록』 40책, 숙종 12년(1686) 9월 17일, 全羅道 右水營에 소속된 다섯 鎭을 左水營으로 옮겨 소속시키는 일에 대해 아뢰는 備邊司의 啓;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1777) 4월 5일 2번째 기사 36) 『일성록』 정조 원년(1777) 4월 5일[05], 좌수영(左水營)으로 네 진(鎭)을 이속(移屬)하는 일에 대하여 다시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국역 비변사등록』 158책, 정조 1년(1777) 4월 6일, 左議政 金相喆 등이 입시하여 全州府의 城堞과 塹壕의 곡물이 부족하므로 常賑穀을 획급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함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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