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대구사범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한 이홍빈 게시기간 : 2024-08-07 07:00부터 2030-12-17 16:16까지 등록일 : 2024-08-05 10:2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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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진이 낳은 천재 이홍빈(李洪彬, 1923~1975) 필자는 1945년 8월 15일 민족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 결과가 아니라 처절한 우리 민족의 항쟁 결과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1928년 이경채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광주학생운동은 멀리 쿠바 동포사회까지 독립의 열기를 확산시킬 정도로 엄청난 반향이었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대의 농민, 노동운동을 비롯 국내외의 각종 독립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1938년 광주고보학생들이 결성한 무등회, 1942년 광주사범학생들이 조직한 무등독서회 등 우리 지역 학생들이 해방 순간까지 멈추지 않은 항일투쟁의 선봉에 우리 지역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지역 학생들이 결성하였던 비밀결사 형태의 독립운동 조직이 대구지역에서도 있었다.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의 다혁당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다혁당을 결성한 이가 우리 지역 강진 병영 출신 이홍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1) 이홍빈은 강진 병영 삼인리 295번지에서 1923년 6월 23일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이순흠(1901∼1972)과 연안 명씨 사이에 9남매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다. 공도공파 37세로, 항열은 영(永)이다. 족보 이름은 영빈(永彬)이다. 부친 이순흠은 호가 병산, 일제강점기에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학고 병영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후학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현재 강진병영초등학교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공적비에 제자가 54,000명이라고 나와 있으니,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에까지 강진 출신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이순흠 교장의 공적을 기리고자 1970년 12월 병영국민학교동문생들이 뜻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병영보통학교를 다녔던 홍빈은 대구사범을 진학하였다. 대구 사범을 홍빈이 진학하였을 때 전남북에서 단 3명뿐이었다. 그의 총명한 두뇌를 알 수 있다. 그가 훗날 장녀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사리가 몇 개 나오는지 세어 보아라” 하였다 한다. 그가 워낙 영리하니까 스스로 딸에게 농을 한 것이었다. 이처럼 홍빈은 유머와 위트가 넘쳤다. 홍빈은 어려서부터 확고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철저한 민족교육을 강조한 부친의 영향도 한몫하였다. 병영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홍빈은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그가 광주사범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광주사범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사범학교 설치 규정을 제정한 총독부는 관립으로 경성사범학교를, 그리고 지역별로 공립사범학교를 신설하였다. 1923년 4월 16일 전남공립사범학교가 광주고보 건물에서 개교하였다. 1927년 옛 전남교육청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29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한 일제는 공립사범학교를 폐지하고 총독부 직할 관립학교 체제로 전환하였다. 동맹휴학이 증가하면서 보통교육의 중요성을 총독부가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31년 전남공립사범학교는 폐교되었다. 대구와 평양에는 1930년에 관립사범학교가 신설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에는 예산 부족으로 늦어졌다. 광주에서는 지역 유지들의 출연금이 모태가 되어 1938년 4월 광주사범학교가 신설되었다. 2. 대구사범 진학과 ‘왜관사건’ 1930년 관립 사범학교로 출범한 대구사범학교는 당시 경성, 평양 등 전국에 3곳뿐인 사범학교였다. 일제는 식민 통치에 필요한 기수를 양성하기 위해 사범학교를 설립하였지만, 오히려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대구사범학교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사범학교는 학비가 전액 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사 발령이 보장되어 영호남은 물론 멀리 함경, 평안도에서도 가난하나 똑똑한 수재들이 10:1 경쟁을 뚫고 모여들었다. 상위 30%에게는 장학금도 지급되었다. 따라서 학생과 학부모에게 사범학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홍빈이 입학할 때 전남·북에서 단 3명뿐이었다. 조선인 학생이 중심이 된 심상과(尋常科)는 입학 정원이 약 100명으로 수업연한이 5년이었다. 심상과는 수업연한 6년 보통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었다. 심상과와 별도로 사범학교에는 수업연한 2년 단기 교육과정도 있었다. ‘연습과’라고 불렸는데,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들이 주로 다녔다. 이홍빈이 입학하던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1938년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소위 민족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이 한층 강화되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의 전쟁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기만적인 술책을 강요하였다. 1937년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황국신민교육을 강조한 일제는,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대구사범학교에는 2년의 연습과가 새로 설치된다. 연습과는 고보 5학년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는 제1종 훈도 양성 제도로, 일본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연습과가 설치된 후 조선인 학생들이 다닌 심상과는 하급으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마찰이 더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초 대구사범학교에는 김영기 선생이 있었다. 1933년부터 근무하였고, 1952년 대구사범 교장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스승이었다.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던 선생은, 고려말 충신 포은 정도전, 사육신, 충무공 등의 얘기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는다고 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민족 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1939년 ‘왜관사건’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군수물자 생산과 수송에 강제 동원되었다. 대구사범학교는 경부선 철로 가운데 왜관역에서 약목역까지의 복선화 공사에 투입되었다. 7월 하순에 먼저 심상과 4, 5학년과 연습과 1, 2학년이 동원되었다. 작업 도중 일본인 학생의 부당한 행위로 인해 충돌이 발생하자, 학교는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게 처리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평소에 민족차별을 서슴지 않고 학생들을 괴롭힌 일본인 교사를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교사를 찾아가 집단으로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처분을 받았다. 이것이 왜관사건이다. 왜관사건은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8월에 강제노동에 동원된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는 낙동강 백사장에 동기생 20여 명과 모여 왜관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기에서 이들은 ‘백의단(白衣團)’을 조직하였다. 민족의 상징이자 순결과 밝음과 절개를 상징하는 흰옷에 착안한 명칭이었다. 물론 백의단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왜관사건에 대한 울분으로 즉흥적으로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3. 대구사범학교 독서회, 윤독회, 문예부, 연구회 이 무렵 대구사범학교에는 8기생들이 조직한 ‘윤독회(輪讀會)’가 있었다. 독서 토론 모임이지만, 윤독회는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통로였다. 특히 1936년에 입학한 8기생인 4학년 박효준, 강두안, 이태길 등은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정지용과 이광수 같은 작가의 작품이 중심이었으나, 은유적 표현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문예작품도 일부 담았다. 『반딧불』은 200부 정도 발간되어 8기생 대다수에게 배포되었으며, 9기생 일부에게도 배부되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독립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1940년 11월 23일 8기생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박찬웅, 9기생 유흥수, 문홍의, 이동우 등이 모였다. 이들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 영국과 충돌할 것이며 소련도, 미국, 영국에 가담하여 일본이 결국 패망하고 우리가 독립을 할 것이므로 다가올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의 예측은 정확하였다. 1년 뒤인 12월 5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태평양전쟁은 곧 일본의 패망 시간표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박효준이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 이들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결사의 이름을 ‘문예부(文藝部)’라고 결정하였다. 박효준이 주도한 것으로 보아, 윤독회를 문예부로 개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운동 방침으로 1) 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2) 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각기 이것을 감상 비평하고 서로 의견 교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1년 1월 하순까지 문예부 부원은 10명에 이르렀다. 문예부의 주된 활동은 부원들이 지은 작품을 서로 읽고 비평하는 것이었다. 매주 토요일에 모임을 갖고 각자가 지은 시, 수필, 단편소설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국외 정세를 포함한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들은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그 성과물이 『학생(學生)』이었다.
윤독회에서 만든 책자 『학생』에는 문예부원들이 한글로 쓴 시, 소설, 수필 등의 작품이 주로 실렸다. 『반딧불』처럼 시국을 풍자하는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한글로 된 문학 창작과 시국 풍자는 민족의 자각과 자긍심을 북돋아 항일운동을 벌이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잡지는 문예부원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가진 10여 명의 학생에게도 배부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동지를 확보해 나갔다. 문예부가 활동하던 무렵, 또 하나의 비밀결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바로 ‘연구회(硏究會)’다. 연구회는 1941년 1월에 8기생인 5학년 임병찬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문예부에서 활동하던 이태길과 강두안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연구회의 운동방침은 1) 회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2) 회원은 매월 1일 각자 분담 부문의 연구사항을 발표한다, 3) 각 부문의 책임자는 해당 부문의 하급생을 지도 교양하고 동지의 획득에 노력한다 등이었다. 이태길과 강두안은 문예부와 연구회에서 동시에 활동했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서로의 조직을 알지 못하였다. 4.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 결성과 활동 1941년 2월 연구회는 조직 존속 문제에 직면하였다. 곧 졸업할 5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것이 문제였다. 4학년 유흥수는 임병찬으로부터 연구회의 확대 개편을 부탁받았다. 유흥수는 문예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기생 문홍의, 이동우 등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결과 동지를 충원하여 새로운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2월 중순 유흥수는 권쾌복과 배학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 1941년 2월 15일 저녁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이주호, 조강제, 이홍빈, 문홍의, 박호준, 이동우, 이도혁, 문덕길, 서진구, 최영백, 김성권, 최태석, 이종악, 김효식 17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문홍의가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제안한다. 모두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기에 동의하지 않은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두류공원) 17명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미 연구회나 문예부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인물을 갑자기 비밀결사에 참여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다혁당(茶革黨)’으로 결정하였다. ‘다(茶)’는 갈색 또는 흙색으로 영웅이 좋아하는 색깔이며, 혁(革)은 ‘혁명’을 의미하였다. 단체도 무슨 부(部), 무슨 회(會)가 아닌 당(黨)이다. 스스로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영웅이 되겠다는 포부의 표현이었다. ‘다혁당’ 명칭을 이홍빈이 제의하였다고 한다. 이홍빈은 싸움이든, 씨름, 가위보를 하든 간에 일본인에게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배일 의식이 강하였다. 다혁당은 당수에 권쾌복, 부당수에 배학보를 추대하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4개 부서를 두었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홍빈은 문홍의, 이주호, 박호준 등과 문예부 산하 연구부에서 활동하였다. 다혁당의 규약은 1) 당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2) 당원은 매월 1회 회합하고 당수, 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한다 3) 각 부장은 책임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한다 4) 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5) 정당원은 결당식에 참가한 자에 한하며 새로운 가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등이었다. 다혁당은 새로운 당원의 가입을 받지 않았다. 이는 다혁당이 발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다혁당은 문예부와 연구회의 활동을 이어갔다. 학생들은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최고 권위자가 되어 독립 국가 건설에 앞장서고자 했다. 또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유능한 학생을 선발하여 수재교육을 시켜 독립의 역량을 확대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학생들은 한글로 된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의무적으로 윤독한 후 독후감을 발표했으며, 국내외 정세에 대해 서로 토론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또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지가 담긴 당원들의 작품을 모아 기관지 『학생』 발간을 준비해 나갔다. 기관지 발간은 문예부인 유흥수와 문홍의, 이동우가 주도했다. 이들은 독립 후 국가 건설 과정에 필요한 군사 훈련도 실시하였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민족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배들을 지도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일제가 주창한 내선일체론의 허구성도 폭로하고자 했다. 1941년 3월 졸업한 8회 졸업생들은 경북선산, 강원 영월, 경남 통영, 충남 논산 등 전국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하며 그 성과를 서로 공유하였다. 하지만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홍성에서 훈도(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는 교육을 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찰이 정현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윤독회가 발간한 『반딧불』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었다. 문예부에서 활동한 후 충남 논산 노산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정현과 서신 교류를 하던 박찬웅의 집도 수색당했다. 박찬웅의 집에서 문예부의 활동 보고서가 나오자, 대구와 대전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대구사범의 3개의 결사에 참여한 학생, 심상과 8회 졸업생 대부분, 재학 중인 3,4,5학년의 절반 이상, 결사에 가담한 졸업생이 근무한 학교의 교사, 학생, 학부모 등이 수사 대상이었다. 유흥수는 1941년 8월 초에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권쾌복은 8월 말 개학을 앞두고 포항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 체포되었다. 이홍빈도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까지 대구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김영기 선생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경찰은 엄청난 규모의 학생조직에 깜짝 놀랐다. 일제는 모든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민심의 동요와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심지어 12월 초 대전형무소로 이감될 때까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941년 12월 35명이 예심에 회부되었다. 16명이 대구사범 출신 훈도(교사)였고, 나머지 19명은 재학생이었다. 사건 연루자만 300명이 달하는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공판은 예심이 종결된 지 9개월 만인 1943년 11월에 열렸다. 그만큼 수사가 길어졌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이홍빈 등 32명이 5년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이홍빈은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다혁당의 서진구를 비롯하여 연구회의 장세파, 강두안, 박찬웅, 조명제 등은 잔혹한 고문으로 미결수 상태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12명이 병사하였다. 사실상 순국한 셈이다.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던 이홍빈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았다. 당시를 회상하면 습관적으로 입에서 **라는 욕이 나왔다. 해방이 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그의 부친이 이홍빈을 데리러 대전형무소에 갔다. 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향에 홍빈이 오니 마을 사람들이 죽은 시체를 묻고 오지 그랬냐! 했다고 한다. 김영기 교사는 학생들이 관련이 없다고 스승을 변호하여 기소를 면하고 1942년 1월 석방되었다. 다혁당은 외부 세력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한 결사체였다. 이들은 교사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대구에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2.28 학생운동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5. 자랑스런 전남 교사 이홍빈 감옥에서 해방을 맞은 이홍빈은 이튿날 출옥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48년 무렵 이웃 마을에 사는 서당 훈장의 딸인 김원애와 혼인하였다. 이홍빈의 딸의 증언에 따르면 강진 병영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이후 1952년 강진중학교3)를 거쳐 1962년 광주의 명문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생물을 가르쳤다. 1966년 전남여고 학생과장을 맡아 ‘학생정신 중흥의 기치’를 표방하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4) 이홍빈은, 예절지키기 운동 등 지엽적인 것을 탈피하여 일제 치하에서 광주학생이 주도한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발전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특히 이 운동을 당시 문교부가 지원책을 내놓는 등 관심을 표명하는 것에 우려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출신 교사 다운 생각이었다. 이홍빈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를 잘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최승효 광주 mbc사장이 이홍빈을 스카우트하였다. 아마 광주 궁동에 있는 mbc 사옥과 전남여고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홍빈은 번민 끝에 광주mbc 심의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0년대 초였다. 방송국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1975년 5월 22일 밤 11시 40분 위암으로 작고하였다.5) 그의 나이 불과 53세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처음 이홍빈이 작고하였을 때 광주 가까운 화순에 묘를 썼다. 묘가 약간 경사진 곳에 있었는데, 부인의 꿈에 자리가 불편하다고 홍빈이 호소하였다고 한다. 9남매의 장남이었던 이홍빈은 책임감이 강하였다. 본인이나 자녀들은 힘들어도 동생들의 학비를 모두 책임졌다. 특히 부인은 강진 병영에서 시부모를 봉양하느라 광주에 올라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광주에서의 생활은 이홍빈 본인과 광주에서 여고에 다니던 장녀의 몫이었다. 그가 작고하기 2년 전 장녀의 결혼을 서둘렀다. 아마 위암 진단받은 홍빈이 죽기 전에 장녀라도 결혼시켜야겠다는 조급함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장녀는 광주에서 덕망 높은 교육자로 소문난 정해규 교장의 며느리이다. <국립묘지 묘비명> 뉘라서 청춘을 헛되이 보내리오마는
나라 잃은 겨레 어둠 속을 헤메일 때 대구사범의 의로운 젊은이 항일 결사인 다혁당의 깃발 아래 일어서다 압제의 사슬을 온 몸으로 항거하던 불굴의 기백 드디어 광복의 만세소리로 꽃피어 나다 거룩한 님의 뜻! 이 땅의 넋이 되어 역사의 푸르른 빛으로 영원히 남으리. 1) 2021년 전남교육청의 도움으로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를 출간하였던 필자는, 본서에서 이홍빈을 처음 소개하였다. 당시는 자료가 불충분하여 상세한 설명을 다루지 못하였다. 다행히 최근 국가보훈부의 도움으로, 이홍빈 선생의 장녀(1949년생)와 통화할 수 있었다. 2시간 넘는 전화 통화를 통해 선생과 관련한 여러 궁금함을 풀 수 있게 되었다. 부친의 빛나는 삶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거듭 선생의 장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보훈부 및 광복회 전남지부 관계자의 수고로움에도 사의를 표한다. 참고로 인터넷에 보면 이홍빈 선생의 자료가 비교적 정확히 나와 있다. 2022년 11월 6일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녀의 아들, 딸 그러니까 이홍빈의 외손들이 외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 늘 인터넷을 검색하여 잘못을 바로 잡고 있다고 한다.
2) 인터넷에는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나와 있으나, 장녀는 9남매가 맞다고 하였다. 3) 인터넷에도, 필자가 집필한 책에도 ‘당진중학교’라고 나와 있다. 장녀와 통화를 하여 ‘강진중학교’의 오기로 생각되어 바로 잡는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연구자가 원자료 접근이 어렵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4) 동아일보 1966.5.11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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