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송강 정철(鄭澈) 어머니, 폭염에 아들 걱정하다 게시기간 : 2024-08-14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4-08-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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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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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대부분 폭염경보. 체감온도 35도. 양산 쓰기. 그늘에서 쉬기.
몇 년 전부터 여름이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받는 안전 안내문자 내용이다. 폭염 지속으로 열사병 발생이 우려되니 조심하라고 한다. 되도록 외출하지 말고 양산을 쓰라고 하며 그늘에서 쉬고 물을 충분히 마시라고 알려준다. 날씨 관련 뉴스에는 찜통 날씨, 가마솥더위, 불볕더위, 열대야 등의 단어가 매일 올라온다. 기온이 섭씨 30도 정도는 가볍게 넘고 체감 온도는 더 높다. 해마다 여름은 갈수록 뜨거워지는 듯하다. 누구든 더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더위 먹지 말라고 서로 걱정해준다. 부모라면 밖에 있는 자식이 더위 먹을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열 높은 때에 조심들 하소서
이미지출처:한국고문서자료관 나는 의심 없이 잘 있습니다. 형제분도 잘 계십시오. 날이 많이 험하니 더욱 걱정입니다. 이 열이 높은 날씨에 조심들 하십시오. 우리 큰집도 모두 일 없이 잘 있습니다. 돼지 큰 마리도 두 곳에서 부조로 주려고 하신다고 합니다. 사지 말라고 자연스레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미 안(安), 신미 6월 28일. 1571년 송강 정철의 어머니 죽산 안씨가 아들 정황(鄭滉), 정철(鄭澈) 형제에게 부친 편지이다. 날이 험하니 걱정된다고 하면서 기온 높은 날씨에 조심해서 지내라고 한다. 안씨의 나이는 이미 80에 가까웠다. 아들들은 30대, 40대 성인이었다. 그래도 부모 눈에는 여전히 우물가에서 어정거리는 어린아이이다. 안씨는 뜨거운 날씨에 혹여 아들들이 아플세라 조심하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겨우 두 마디 어치의 말이지만 자식의 건강을 근심하는 마음의 크기와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열 아들 안 부러운 외동딸, 죽산 안씨 죽산 안씨의 아버지는 안팽수(安彭壽)이다. 안씨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다. 안씨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챙겼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안 자고, 문간에서 졸면서 기다렸다.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서야 자러 갔다. 안팽수의 친구들은 재혼하라고 재촉했지만, 안팽수는 ‘딸 한 명이 열 아들보다 훨씬 낫다.’면서 거절했다. 결혼 직후 할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버지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결혼할 때 준비해 가져온 혼수들을 팔아서 상장례 비용을 댔다. 외동딸이었지만 안팽수에게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든든한 딸이었다. 그녀는 15살에 정유침(鄭惟沈)과 결혼했다. 정유침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안팽수가 정유침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안씨의 시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 김씨(金賢賚의 딸)가 있었다. 김씨는 며느리 안씨가 자기를 잘 모신다고 사람들에게 늘 칭찬했다고 한다. 남편은 비록 벼슬이 없는 학생 처지였지만 사이도 좋았고, 그 사이에 아들 넷, 딸 셋을 낳았다. 중년 즈음까지의 생활은 평탄했다. 딸들이 왕실 사람들과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1533년 3월에 맏딸이 양제(良娣)로 들어갔다. 세자궁에 속한 2품 궁녀 자리였다. 그리고 중종의 며느리이자 인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 일로 남편 정유침은 8품에 속하는 부사맹(副司猛) 벼슬을 받았다. 군직이기는 해도, 9품 말단직부터 시작해서 품계가 올라가야 했지만 중종의 특명으로 곧바로 8품 벼슬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셋째딸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와 결혼했다. 이유는 원래 월산대군 손자인데 성종의 아들인 계성군 이순(李恂)의 양자가 되었다. 게다가 중종의 첫 계비였던 장경왕후가 이모였고 명종 때 대윤으로 불렸던 윤임(尹任)이 외삼촌이었다. 당시 윤임의 실권은 대단했다. 안씨 딸들의 결혼은 남편에게 벼슬을 안겨주었고, 어쨌든 실권 있는 집안의 사돈이 되게 했다. 이런 인맥으로 인해 막내 아들 정철은 어린 시절 궁에 드나들고 후에 명종이 된 경원대군과도 함께 놀 수 있었다고 한다. 중년에 닥친 인생 위기 좋은 일이 있으면 마귀가 시기하고 농간을 부린다고 하였던가. 1545년 을사년 음력 7월 1일에 인종이 승하했고,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해 9월 1일, 당시 경기도 감사였던 김명윤이 명종에게 글 한 편을 올렸다. 윤임이 계림군과 흉측한 모의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모의했다는 말이니 역모에 해당했다. 이유가 고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체포하러 갔지만 이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유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안씨의 남편은 물론이고 맏아들 정자(鄭滋), 둘째 사위 최홍도(崔弘渡)가 잡혀갔고 셋째딸도 잡혀갔다. 특히 맏아들 정자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유에게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미리 귀뜸해주어 이유가 도망가게 했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자는 누이와 이유의 혼담이 오갈 때 서로 나이가 맞지 않는다면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유는 정자를 불쾌하게 여겼다. 한편 이유는 외삼촌 윤임에게 ‘정자는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우활한 사람이라서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정자는 이런 말을 듣고 역시 불쾌해졌다. 한편으로는 이유와 윤임을 두려워하여 정자는 일부러 이유와 거리를 두었다. 정유침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아들이 참혹하게 고문을 받는 모습을 보고 정유침은 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내 자식은 아무 죄가 없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하며 아들을 풀어주라고 호소했다. 이 사건은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고변이 있은 지 10여 일 사이에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지목된 이들이 처결되었다.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참형되었다. 안씨의 외손자 이시(李諟)ㆍ이형(李詗)ㆍ이후(李詡) 등도 처형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윤임, 유관, 이유 등의 아내, 첩, 딸 등을 모두 종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안씨의 남편 정유침은 정평부로 귀양가 노역을 해야했고 맏아들 정자는 광양으로 귀양갔다. 조정에서는 인종의 후궁이었던 첫째 딸이 역적 이유의 처형이기 때문에 대궐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일어났다. 안씨는 셋째 사위 이유의 일로 남편과 아들을 유배지로 보내야 했고 딸과 외손자를 잃었다. 첫째 딸도 역적의 가족이 되어 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한순간에 몰아친 정치 광풍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위기는 더 가혹해지고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아래에서는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하는 것을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仲秋) 그믐.
1547년 가을. 누군가 양재역 벽에 빨간색으로 글을 써서 붙였다. 때마침 정언각(鄭彦慤)이 이를 봤다. 그는 남편을 따라 전라도 시집에 가는 딸을 배웅하러 양재역에 갔다가 벽보를 본 것이다. 9월 18일에 정언각은 이노(李櫓)와 함께 조정에 들어와 그 사실을 알렸다. 안씨의 남편은 정평에서 한때 잠깐 풀려나긴 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양재역에 붙은 벽보 사건의 불씨가 남편과 아들에게도 옮겨 붙었다. 남편은 다시 연일로 유배되었고, 맏이 정자의 유배지가 변경되었다. 광양에서 함경도 경원으로 바뀌어 조선땅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가야했다. 맏아들이 서울 동쪽 지역을 지날 즈음, 안씨는 직접 나가 아들을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 아들에게 입혀주었다. 옛날에 출정하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옷을 입고 가면 빨리 돌아올 수 있다는 민간의 관습이 있었다. 안씨도 혹여 아들이 빨리 풀려나오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자는 귀양지에서 세상을 떴다. 게다가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인종의 후궁인 안씨의 첫째 딸까지 내치라고 요청해댔다. 다행히 첫째 딸은 내쫓기지 않았고, 1551년에 순회세자가 태어났을 때 정유침은 특별히 사면되었다. 6,7여 년 간의 귀양살로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남편이 서울에 살 수 없었다. 귀양살이는 풀렸지만 고향으로 가라는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유침은 남원으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창평으로 갔다. 서울살이에 익숙하던 안씨에게 광주나 창평은 낯선 곳이었다. 둘째 아들 정소(鄭沼)는 을사년 사건 이후 순천으로 내려와 살았고, 막내 정철은 10대 소년이었다. 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열 아들 안 부럽게 했던 딸의 꿋꿋함은 굳세면서도 따뜻한 아내와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남편이 실의에 빠져 우울해하면 밝게 웃으면서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었다고 한다. 다행히 막내 정철은 창평 생활에 잘 적응했다. 지역에서 덕망 높고 학문이 깊다고 명성이 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배웠다. 지역의 문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문학적 역량도 맘껏 펼쳐내고 있었다. 유강항(柳強項)의 딸과 결혼하여 안정적인 생활 기반도 마련했다. 안정되어가는 삶, 애 끊는 마음 셋째 사위 일로 집안에 불어닥쳤던 광풍은 훌쩍 지났다. 당시 이유는 황해도 배천을 경유해서 함경도 황룡산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결국 1545년 9월 28일에 토산 현감 토산 현감 이감남(李坎男)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미친 정치 폭풍 속에 안씨는 맏아들을 잃었고, 남편은 6,7여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남편이 연일에서 귀양살이할 때 시어머니 김씨는 남원에 있었다. 시어머니는 아들 걱정에 잠도 못 이뤘다. 음식을 싸 보내면서 아들이 건강하게 지내기만을 바랐다. 정유침은 어머니가 보낸 음식을 받으면 한바탕 통곡한 후에 먹었다고 한다. 음식 안에 담긴 어머니 마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리라. 안씨의 마음은 시어머니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맏아들은 귀양 가 있어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또 타지에서 세상을 떴다. 둘째 아들은 순천에서 잘 지내는 듯했지만 안씨보다 먼저 죽었다. 인종의 후궁이 된 첫째 딸은 그 사이 숙의에서 소의(昭儀)로, 소의에서 귀인(貴人)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자식도 없었고 1566년에 죽어 양주 땅에 묻었다. 아들 넷 중에 두 명을 먼저 보냈고, 딸 셋 중 한 명을 먼저 보내고 또 한 딸의 인생은 정치 때문에 망가졌다. 중국 동진 때 사람 환온이 촉땅을 치기 위해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군사 중 한 사람이 숲에 들어가 원숭이 새끼를 잡아 왔다. 그러자 새끼 잃은 어미 원숭이가 100리나 뒤따라오며 슬프게 울어댔다. 배를 물가에 대자 어미 원숭이가 배로 뛰어 들었지만 곧 죽었다. 배를 갈라 보니 장이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모원단장(母猿斷腸) 이야기이다.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원숭이의 극대화된 슬픔을 보여준다. 안씨의 속은 이보다 더했을 터이다. 생전에 자식 셋을 잃었으니. 둘째 딸은 잘 사는가 싶었는데, 사위 최홍도의 평판은 형편없었다. 딸을 윤원형의 첩 난정이 낳은 아들과 혼인시켰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아부’로 지목했다. 딸 혼인을 벼슬을 낚는 미끼로 삼았다고 비야냥거렸다. 실권의 중심에 있는 윤원형의 장인이 되어 못할 것이 없다는 듯 행세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안씨의 생활은 안정되어 가는 듯했지만, 자식들의 일로 속은 마디마디 끊어질 지경이었다.
폭염 속에서도 자식 걱정, 노모의 무한 애정 1571년 신미년 6월 28일. 양력으로 보면 7월 정도이다. 여름 높은 열기가 위로 하늘을 찌르고, 물밀듯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때다. 안씨 나이도 70이 훌쩍 넘었다. 폭염과 대적하기 쉽지 않은 나이다. 그래도 아직 두 아들 정황과 정철이 건재했다. 살아서 자식을 잃어 본 어머니였기에 남은 자식을 향한 조바심이 없을 수 없었다. ‘고양’에 부친다는 것을 보면 그때 아들 형제는 고양에 있었던 모양이다. 고양은 정씨 집안 선산이 있다. 남편 정유침의 묘, 가까운 곳인 양주에 셋째 딸 정귀인의 묘도 있다. 남편 정유침이 1570년에 세상을 떴고, 아들 정황과 정철은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 여름 열기에 남은 아들들이 혹여 몸이 상할까 조바심 내는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1573년 계유년 여름 4월 13일. 안씨는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자식들에게 한 말은 ‘모두 백년을 누리도록 해라.’ 였다. 젊은 나이에 죽어간 자식들 때문이었을까. 살아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오래 살도록 축원했다.
비석에 ‘정경부인’이라고 쓰여 있다. 이미지출처 :https://dldml2xhd.tistory.com/15919358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한국고문서자료관, archive.aks.ac.kr/ 김덕진(2010), 「송강 정철의 학문과 정치활동」, 역사와 경계」 74, 부산경남사학회. 김창원(2018), 「송강 정철의 평전을 위한 기초연구(2)」, 고전과 해석 24,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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