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전남에 있는 조선의 마지막 향교들 게시기간 : 2024-08-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8-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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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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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한국의 교육열 우리나라는 지난 70년 동안 최빈국에서 경제 강국으로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하였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무엇보다 교육의 힘이 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춘 국민을 길러낸 것 또한 우리 교육이다.”
이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그렇다고 믿고 있는 말이다. 교육열 하나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인식하고 또 실천했던 역사 전통의 극명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미래를 밝게 보는 까닭도 이런 교육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경쟁력의 강화가 다른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책임은 무엇보다 국가에게 있다. 신분에 따른 차별은 있었지만,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는 교육에 대한 나름의 의무를 지켰다. 그중 지방 교육은 향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향교는 ‘일읍일교(一邑一校)’라 하여 행정단위인 군(郡)이 설치되면 의무적으로 두어야 하는 기본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향교들은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신설된 군들이 전남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전남에 있다. 조선왕조가 그 숨을 다해가던 때에도 군이 신설되면 향교는 빼놓지 않고 설립했다. 그런 전통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이하 전남에는 어떤 향교들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교육 의무를 지켜내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조선의 교육제도와 향교 조선의 교육제도를 보면, 국립교육기관인 관학(官學)과 사립교육기관인 사학(私學)이 있다. 관학에는 최고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이 있었고, 그 아래 서울에는 사학(四學), 즉 중·동·서·남학 등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었고, 지방에는 군현마다 향교가 있었다. 사학으로는 서원이 큰 자리를 차지하였고 전국 방방곡곡에 수없이 많은 서당들이 있었다. 이중 지방의 관학인 향교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었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리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즉 군현제의 바탕 위에서 국가가 지방교육기관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향교 교육은 사학 12도(私學十二徒) 등 사립교육기관에 의한 성과보다는 저조했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는 건국한 다음에 일정 규모 이상의 고을에 향교를 설치했다. 나아가 세종대부터는 현(縣) 단위 이상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설치하고 교육·문화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다. 아울러 향교의 재정을 위해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하고 종6품의 교수(敎授)나 종9품의 훈도(訓徒)를 파견하였다. 특히 교수는 문과 급제자 아니면 문신 중에서 임명해 교육을 활성화시켜 나갔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모시고 받드는 제향(祭享) 공간과 교육을 하기 위한 강학(講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의 봉사(奉祀) 기능은 대성전(大聖殿)에서, 후자의 교육 기능은 명륜당(明倫堂)에서 각각 행하였다.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서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구릉지에서는 그 반대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띠었으며, 때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나란히 배치될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조선의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면서 점차 위축되어 갔다. 국가에서 16세기 말에 향교 교육을 독려한 일도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으며, 결국 18세기 중반에는 교관을 폐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자리 잡으면서 16세기 초반부터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부유한 양인들이 교생(校生)으로 들어가 교생의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향교의 교육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1)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향교는 234개이다.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없어지고, 행정구역을 개편함에 따라 1901년 오천군(鰲川郡)을 신설할 때 세운 오천향교가 마지막이었다. 다만 이 향교는 신학제 실시 이후의 것으로 대성전만 지었다. 교육 기능은 아예 없고 배향 기능만 있었다. 따라서 교육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마지막 향교들은 전남에 세워졌다. 전라남도에는 모두 22개의 시, 군에 28개소의 향교가 있다.2) 그리고 특히 조선왕조의 마지막에 창건된 4개의 향교들이 있다. 즉 완도, 지도, 돌산, 그리고 여수의 향교들이 그것이다. 이 향교들은 조선이 마지막까지 나름의 국격을 지켰다는 상징이었다. 이에 대해 알아보자. 완도군·지도군·돌산군의 설치와 향교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8도제를 23부제로 바꾸었는데 1896년 8월에 이를 다시 개정하여 13도제로 바꾸었다. 이때 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도가 각각 남도와 북도로 나뉘었다. 전라남도는 33개 군으로 편제되었고, 여기에 완도군, 지도군(智島郡), 돌산군(突山郡)의 세 개 군이 4등급의 군으로 포함되었다. 완도군, 지도군, 돌산군 등 ‘섬’만으로 구성된 군들은 이보다 조금 이른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로 ‘전주부·나주부·남원부 연해제도(沿海諸島)에 군(郡)을 치(置)하는 건’이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반포됨으로써 설치되었다. 이때는 1729년(영조 5) 2월 병조판서 조문명이 설읍(設邑) 상소를 올린 지 167년만의 일이었다. 군을 설치한 이유는 섬과 육지를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가난한 백성들을 구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려는 뜻”에 있었다. 이처럼 연해제도 군들의 신설은 섬과 육지 간 행정체계의 평등, 즉 수륙일관(水陸一觀)의 뜻을 구현한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지역균형 발전의 참뜻이 이미 백여 년 전에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운 국가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이 신설됨과 동시에 이곳 섬들에 향교를 세웠다는 점이다. 향교는 사직단, 성황당과 함께 마땅히 먼저 창설해야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3) 또 1880년(고종 17) 북방의 함경북도 성진(城津)을 읍으로 승격하는 일을 건의하는 전적(典籍) 이찬식(李燦植)의 상소에 따르면, “향교와 객사를 설치하는 등의 일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기꺼이 부역(賦役)을 하여 공화(公貨)를 쓰지 않고도 빠른 시일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4)라고 하는 데서 향교의 설치는 백성들에게도 설군에 따른 마땅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향교의 창건을 통해 변방의 섬 주민들에게까지도 끝까지 교육받을 권리를 지켜 주려 한 조선왕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저력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여러 섬들의 도움으로 세운 완도향교 완도향교는 1897년(광무 1)에 창건되었다. 1896년에 완도군이 설치되고, 그해 5월 15일에 군민대회를 열어 김광선(金光善)을 향중유사(鄕中有司)로 선출하고, 향교의 설립과 양사재(養士齋)의 설치를 결의하였다.
【그림 1】『완도군읍지(莞島郡邑誌)』(奎 10792, 1899년, 완도군)의 지도 중 일부. 가운데 완도향교가 단촐한 모습으로 보인다. 1896년 7월 3일자 기록을 보면, 완도군에서 “본군에서 새로이 창건하는 사무를 차례로 마련하는 중인데, 향교를 짓고 기타 공해(公廨, 관아건물)를 조금 고쳐 지으려 살펴본즉, 향교 정전(正殿)의 재목과 기와는 새 것으로 해야 하겠고, 동재 서재와 협실의 자재는 폐진 중인 청산·삼도·고금·신지 4도의 진 중에서 청결한 공해를 옮겨 짓는 것이 경비를 절감하는 데 마땅할 듯합니다. 관련 비용은 본군의 결호세전(結戶稅錢) 중에서 마련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질품(質稟, 질의)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향교의 영건과 공해의 개건(改建)은 내부에 보고하여 조치 후에 거행함이 가하다는 지령을 내려주었다.5) 이에 따라 그 이듬해에 진행되었다.
대성전은 새로 벌목한 목재를 사용하여 짓고, 동재는 고금도에서, 서재는 신지도에서, 명륜당은 노화도에서 각각 기존 건물을 해체해 가져온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다고 전해온다. 1897년(광무 1) 7월에 준공하였다. 1903년(동 7)에는 유생의 강학을 위한 양사재를 군수의 도움으로 건설하였고, 향안도 작성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1967년에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형식을 따르고 있다. 3층 계단식으로 맨 아래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그 다음에 학생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맨 위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양사재가 먼저 들어선 지도(智島)향교 전남 신안군 지도읍 읍내리에 가면 아담한 향교가 남아 있다. 이곳이 한때 지도군의 치소(治所)였기 때문에 각 군현에 하나씩만 두는 향교가 이곳에도 있게 되었다. 현 향교의 모습은 창설 당시와는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 3】이는 1899년(광무 3)에 작성된 『지도군읍지성책(智島郡邑誌成冊)』 중 지도(地圖)의 중앙 일부로 왼쪽에 교궁(校宮) 즉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의 구성과는 크게 다르다. 문묘와 명륜당, 동재와 서재, 양사재와 사마재 등의 구성으로 보인다. 1908년 작성된 『지도군지(智島郡誌)』에는 「학교」조에 「향교」「문묘」「명륜당」「양사재」 등의 순으로 그 연혁을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향교는 초대 군수인 오횡묵(吳宖黙) 다음으로 부임한 김한정(金漢鼎) 군수 때인 1898년(광무 2) 향유(鄕儒)들과 함께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향교에는 문묘(대성전), 명륜당, 그리고 양사재가 속해 있다. 양사재는 문묘 서쪽에 사마재와 같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양사재는 오횡묵 군수 때인 1897년 5월 16일(음) 낙성식을 가졌다. 그러니까 양사재가 먼저 지어지고 그 후에 문묘와 명륜당 등이 지어지면서 향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1899년 지도군수 박용규(朴鎔奎)가 작성해서 올린 『지도군읍지성책(智島郡邑誌成冊)』(奎 10786)에 첨부된 지도(【그림 3】)를 보면 동재와 서재, 그리고 양사재와 사마재까지 포함하여 향교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갖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향교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요즘 동재·서재가 없는 것을 지도향교의 특징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창설 당시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진 때문이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횡묵 군수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그리고 특히 양사재를 세우는 데 집중하였다.6) 그는 부임 직후 관민들이 지켜야할 규약 41조의 절목과 향약 17조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 절목의 첫 번째가 향교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읍에는 반드시 향교를 설치하여야 하는데 배치하는 날에 이르러 각 섬의 백성과 선비들이 자기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거만하게 묵패(墨牌) 등을 가지고 침학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이런 폐단이 있으면 해당자 및 임장은 곧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고 엄히 처리하여 널리 퍼지는 폐를 막을 것.”
이었다. 또 대·중·소 3종의 향회를 두도록 하였는데, 향회의 첫 번째 회의 사항으로 권농, 권학, 그리고 제반교육 등의 일을 꼽았다. 규약 절목 중 첫 번째도 향교이고 향회 회의사항 첫 번째도 권학과 교육이었다. 그만큼 교육을 중시하였다. 서당에 대한 관심도 컸다.
향교의 설치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양사재를 먼저 짓고자 하였다. 군수로 부임한 후 군내의 지식인들과 만나 얘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읍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땅히 지금 즉시 시작해야 합니다[有邑矣則校不可不設 宜及今始之]”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횡묵은 지금 군의 형편을 보니 “백성들은 곤궁하고 고달프며[困瘁] 유자(儒者)들은 아둔하고 거칠어[魯莽] 일을 벌이기 어려우니 우선 양사재부터 짓고 사정이 호전되면 그때 향교를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설득하여 양사재를 우선 짓기로 하였다.7) 이에 김선기(金璿基)를 양사재 도훈장에 임명하고, 양사재 공사를 독려하였다. 1896년 11월 8일(음)경에는 건물의 모습이 드러날 정도로 진척되었고, 이듬해 2월 6일(음)에는 토역(土役)을 시작하여 향교의 구역을 정하였다. 양사재 장의에는 권장하는 뜻으로 약관의 나이인 조병호(趙炳鎬)를 임명하였으나 중론의 반대에 부딪쳐 보름만에 교체하는 일도 있었다. 양사재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춘 2월 29일 이후로는 양사재를 모임의 장소로 자주 활용하였고, 그곳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학문을 권장하는 기회로 삼았다. 5월 10일 양사재가 완성될 즈음에 절목을 만들고 양사재 편액도 걸었다. 동쪽방은 육영실(育英室), 서쪽방은 봉명헌(鳳鳴軒)이라 명하였다. 오횡묵은 양사재 낙성을 마치고 새로 신설된 여수군수로 부임하였다. 향교를 짓는 일은 그 후임인 김한정 군수에게 맡겨졌다. 석전(石田)이 석전(釋奠)이 된 돌산향교 1899년 작성된 『돌산군읍지(突山郡邑誌)』(규10807)에 따르면 1897년(광무 1) 군 동쪽 1리 석전평(石田坪) 북편(北偏)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월에 대성전을 처음으로 지었고, 1898년(광무 2) 5월에 명륜당, 7월에 풍화루(風化樓)를 각각 신축하여 완성하였다.8) 교궁 신축비용 200원은 1897년 가을분 호포전으로 충당하였다.9) 다만 읍지에는 탁지부에서 건축비 1천 양을 내려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이후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지방관제가 변경됨에 따라 돌산군이 여수군에 편입되면서 돌산향교가 없어질 위기를 맞았으나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 5】『여산지(廬山志)』(奎 12488, 군수 徐丙壽 찬, 1900)의 돌산군 지도. 우측에 돌산향교가 보인다. 1900년 작성된 『여산지(廬山志)』(奎 12488)에 따르면 유임(儒任) 중에 양사재 유사 1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사재도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사적(事蹟) 조에 “향교의 터를 예전부터 우리말로 ‘석전평(石田坪)’이라 불렀는데 지금 이곳이 ‘석전(釋奠, 문묘에 제사 지내는 곳)’의 장소가 되었으니 그 음이 지명과 상부함이 또한 어울리지 않겠는가?”라는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또 기문(記文)에는 1897년 10월 하순에 신기선(申箕善) 찬의 「대성전신건상량문(大成殿新建上樑文)」, 이도재(李道宰) 찬의 「명륜당신건상량문(明倫堂新建上樑文)」, 그리고 1899년(광무 3) 군수 서병수(徐丙壽) 찬의 「풍화루기(風化樓記)」가 각각 수록되어 있다. 특히 풍화루기에는 “군이 있으면 향교가 있어야 한다[有郡則有校]”라는 구절이 있어 향교 창설의 당위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보유편에 「향교위결기지결사실(鄕校位結基址結事實)」이 있는데 교유(校儒) 주홍필(朱洪弼)과 김재철(金在哲) 등의 노력으로 1900년(광무 4) 1월경에 향교의 기지결(基址結) 56부와 교위결(校位結) 5결에 대한 면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여수군의 신설과 양사재회유소(養士齋會儒所)가 있는 여수향교 여수향교는 1897년에 옛 좌수영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창건되었다. 1897년 5월 내부에서 올린 「전라남도 구역 내 폐지한 좌수영에 여수군을 신설하는 건」의 청의서를 보면, “1897년 5월 5일에 여수 등 4면은 고현인데 일찍이 좌수영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현을 폐지하였던 것인데 지금 이미 영을 폐지한 조건에서 현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지금부터 따로 여수군을 두고 위치는 전 좌수영 자리에 하며 제도와 경비 같은 것은 내부에서 조정해서 아뢰게 하시었기에 이에 … 여수군을 신설하는 위치와 경비에 관한 칙령안을 회의에 올립니다.”10)
라 하였다. 그리고 그 제1조에 순천군의 율촌(栗村)‧여수(麗水)‧삼일(三日)‧소라(召羅) 4개 면을 여수군으로 획정하도록 하였고 제3조에 6월 1일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1897년 5월 15일 칙령 제21호 「전라남도 구역 내 전 좌수영에 여수군을 신설하는 일」을 재가(裁可), 반포함으로써 확정되었다.11) 그리고 “군이 있으면 향교가 있다[有郡則有校]”의 원칙에 따라 향교가 창설되었다.
【그림 7】『여수지(麗水誌)』(奎 10795, 麗水會儒所, 開刊(도유사 유하열(柳河烈), 1902년, 군수 尹豊禎). 좌측 상단에 향교가 보인다. 『여수군읍지(麗水郡邑誌)』(奎 10803, 1899년, 郡守 吳宖默)에 따르면, 향교의 교임으로 도유사 1인, 장의 2인, 재임 2인 외에도 양사재 유사 2인, 회유사 유사 1인 등 이 있다. 오횡묵이 신임군수로 부임했기 때문에 지도군처럼 양사재가 신설되었다. 회유사가 별도로 있는데, 이것은 1902년 『여수지(麗水誌)』(奎 10795, 麗水會儒所 開刊, 都有司 柳河烈)에는 ‘양사재회유소’란 이름으로 나타나 있어 별개가 아니고 양사재 내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수군읍지』의 향교조를 보면, 대성전은 1897년(광무 1) 서문 밖 종동(鍾洞)에 3칸으로 새로 지었다. 동·서무(東西廡) 즉 동재와 서재는 각 3칸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은 5칸(1902년 『여수지』에는 8칸으로 되어 있다)이고 회유소는 옛 별포청(別砲廳) 건물로 22칸이다. 읍유(邑儒)들의 강회소(講會所)로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풍화루는 1934년에 신축하였다.
절도사 이종진(李鍾晋)이 찬한 「대성전상량문」이 남아 있다. 『여수지』에는 조동훈(趙東勳) 찬의 상량문이 추가되었다. 또 『여수지』에는 회유소를 양사재회유소란 이름으로 적고 있다. 그 용도는 본군 사림들의 종학회의소(從學會議所)였다. 1901년에 중건하였다. 1900년(광무 4) 8월 군수 최정익(崔正益)이 쓴 「명륜당서(明倫堂序)」가 있다. 현재 여수향교에서는 ‘Restart! 여수향교’라는 명칭으로 120년 전 학교로 사용되었던 여수향교의 시간과 공간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통 공간인 향교가 인문학 관련 직업군 탐색과 우리지역 문화재 해설 체험 실습 등을 진행하는 공간으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향교에서 중학교로 우리나라 근대교육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반포된 이른바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계기로 본격화하였다. 고종은 이 조서에서 교육이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므로, 학교를 세워 덕양(德養)․체양(體養)․지양(智養)을 교육의 세 가지 강령으로 제시하고, 개명한 지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왕실의 안전과 나라의 부강이 백성의 신교육에 달려있음을 강조하였다. 근대교육을 위해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선교사들은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을 개교하였으며, 정부는 육영공원 설립 등을 추진하였다. 1895년 7월 칙령 제145호 소학교령 시행, 1899년(광무 3) 3월 이후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관제가 차례로 공포되었다.12) 이중 향교와 관련된 변화는 중학교 관제의 제정이었다. 1899년(광무 3) 3월 27일 중학교 관제 제정을 요청하는 청의서[中學校官制請議書]에 따르면, “삼가 생각건대 나라됨이 학업을 일으키고 인재를 키우는 일[興學育才] 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거늘,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학교의 설립은 있으나 다만 어학(語學), 소학(小學)뿐이고 실학(實學)의 교육은 아직 없어 개탄해 온 바 작년 이후 소학교 졸업생이 수십인이 되는데 중학교가 없어 취학할 곳이 없는지라 본년도 예산에 중학교비를 이미 편입하였고 장차 학교를 설립하야 실지(實地) 학업을 가르치기로 하였기에 중학교관제 칙령안을 회의에 제출함.”
이라 되어 있다. 이때의 중학교는 서울에 설립하는 예산에 한하였다. 하지만 중학교관제의 조항에는 12조부터 16조까지가 지방의 중학교 관련 내용으로 되어 있어 장차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13조는 “지방에 중학교를 설립할 때는 그 장소를 해당 군의 향교로 한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향교가 자연스럽게 중학교로 전환하여 갈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점으로 인하여 이 계획은 아쉽게도 계획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교육의 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1911년 3월 말 현재 전국의 서당은 16,540개 소, 학생수는 141,604명이었는데, 1920년에는 서당이 25,482개로, 학생은 292,625명으로 늘어났다.13) 약 10년 동안 서당과 학생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한 것인데, 여기서도 역시 우리 국민들의 교육열을 확인할 수 있겠다. 나가며 대한민국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보면, 국민의 4대 의무가 명시되어 있다. 즉 교육을 받게 할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이다.14) 이중 납세와 국방은 의무만 있지만, 교육과 근로는 의무이면서 동시에 권리이기도 하다. 그중 교육의 의무는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고 하여 교육 받는 자신이 아닌 교육 대상인 자녀를 보호하는 국민, 즉 부모에게 있다고 되어 있다. 이런 의무에 가장 충실한 국민이 바로 ‘엄마들’이다. 때로는 그 열정이 지나쳐 부작용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이런 교육의 힘에 달려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조선의 마지막 향교들의 면면에서, 또 수많은 서당의 존재에서 교육 전통의 맥락이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교육이 이끌어갈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한편 전남도 내 29개(광주향교 포함) 향교는 미군정이 제정한 「향교재산관리법」에 따라 1948년 10월 5일 문묘의 유지·관리와 교화사업 등을 목적으로 ‘전라남도향교재단’을 설립하였다.15) 그리고 이 전남향교재단은 전남대 문리과 대학의 모체인 대성대학을 설립하였고, 나아가 전남대가 종합대학으로 출범하는데 거액의 설립자금을 기탁하는 등 지역 고등교육의 탄생에 기억해야 할 만한 소중한 기여를 하였다.16) 이 또한 전통교육에서 현대교육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향교의 후광이 아닐까? 1)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석규·고영진, 『한국사 속의 한국사』 2(느낌이있는책, 2016) 중 「향교와 서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2) 김남철 외, 『전남의 향교』(전남지역사 교육자료 11, 전라남도교육청, 2023.12) 참조. 3) 이점은 『請議存案』建陽元年(1896)二月三日, 「一 全州府 羅州府 南原府 沿海諸島郡置件」 중 “但新置 郡의 百度가 草創야 社稷壇鄕校城隍諸享祀 아직 建置치 아니니”라 하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4)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1880) 12월 28일 신유 3번째 기사 5) 『公文編案』 33, 「완도군의 향교 건축비 등 결호세 사용 문의와 처분」, 第三號 質稟, 建陽元年(1896)七月二十三日 6) 이하 내용은 『전라도지도군총쇄록(全羅道智島郡叢鎻錄)』, 한국학디지털아카이브 참조. 7) 같은 책, 1897년(건양 2) 5월 14일자 참조. 양사재 건립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정순우, 『서당의 사회사 –서당으로 읽는 조선 교육의 흐름』(태학사, 2013) 중 제7장 「조선 후기 서당의 문화와 풍속」 중 3절 「19세기 도서 지역의 서당과 수령의 흥학책」 참조. 8) 「돌산향교신설사적(突山鄕校新設事蹟)」에는 ‘開國五百六年(1897년)奉承詔勅新設郡治是年六月建社稷壇十月建大成殿十一月陪來香祝戊戌五月建明倫堂七月 建風化樓同月奉安’이라고 적혀 있다. 9) 『公文編案』 43, 「돌산군의 校宮 신축비용을 1897년 가을분 戶布錢에서 사용하였다는 전라남도의 보고와 지령」, 第十三號 報告, 觀察使 閔泳喆, 光武二年(1898)七月三十一日 10) 『各部請議書存案』2, 「全羅南道區域內廢止 左水營에 麗水郡을 新設 請議書」(1897. 5.) 11)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1897) 5월 15일(양력) 3번째 기사. 여수군의 신설에 대해서는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학산책 중 필자의 「전라좌수영에서 여수군으로」2(2020-09-10) 참조. 12) 전라남도교육청, 『전남학교의 역사』(2015) 참조 13) 古川宣子, 「일제시대(日帝時代) 초등교육기관(初等敎育機關)의 취학상황(就學狀況) -불취학아동(不就學兒童)의 다수존재(多數存在)와 보통학교생(普通學校生)의 증가(增加)-」(『교육사학연구』 3권, 교육사학회, 1990.02), 140쪽 참조. 14) 요즘은 여기에 ‘환경 보전의 의무’와 ‘재산권행사의 공공복리 적합의 의무’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15) 김정인, 「일제 강점기 鄕校의 변동 추이 - 향교 재산 관련 공문서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4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06) 참조. 1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이상식, 「전남대 설립에 공헌한 광주 전남향교」(『향토문화』35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16.11); 전라남도향교재단, 『全南鄕校文化史』上(2004), 431~432쪽 참조.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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