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12 게시기간 : 2024-08-29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4-08-27 15: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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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묘(破墓)와 도깨비굿 2024년 천만 관객 영화 <파묘>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가 여러 가지다. 수상한 묘를 이장하는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장면들이 난무하는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 영화였다. 이를 허투루 여길 수 없어서 지난 3월 15일자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386회로 이를 다루었다. 칼럼 제목을 ‘유쾌한 풍자 영화 <파묘>’로 정했던 것은 도깨비굿과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유행 따라 소재를 선택한 경향이 없진 않지만 여러 상황을 살펴봤을 때 그 행간을 읽는 것이 민속연구자로서 할 일이라 생각해서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은 이 내용을 인용하고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 2021)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던 도깨비굿 내용들을 전폭 인용하는 수준으로 영화 <파묘>와 도깨비굿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제주도의 도깨비굿을 보자. 이 굿은 1971년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용준이 보고한 『한국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도깨비를 ‘참봉’이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그 중에서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주도 무속 중 영감본풀이가 그것이다. 현용준이 간추려 보고한 영감본풀이는 아래와 같다. 서울 남산 먹자 고을에서 허정승의 아들 7형제가 태어났는데, 큰아들은 백두산 일대를 차지하고, 둘째 아들은 태백산 일대를 차지하고, 셋째 아들은 계룡산 일대를 차지하고, 넷째 아들은 무등산 일대를 차지하고, 다섯째 아들은 지리산 일대를 차지하고, 여섯째 아들은 유달산 일대를 차지하고, 일곱째 아들은 제주 한라산 일대를 차지하여 영감신이 되었다. 제주도깨비굿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제주도 영감신은 선앙신으로 놀고, 대정에 가면 도령 선앙신으로 놀고, 위미숲에 가면 각시 선앙신으로 놀고, 선흘 숲에 가면 황세왓 돌허리 아기씨 선앙신으로 논다. 썰물 때는 강변에서 놀고 밀물에는 주중에서 놀고, 산으로 가면 아흔아홉 골머리, 열실, 백록담, 물장오리, 태역장오리를 좋아해서 놀고, 삼천 어부의 어장을 좋아해서 놀고, 해녀와 홀어머니를 좋아하여 같이 살자 하며 따라붙는다. 낮엔 연불(煙火), 밤엔 등불을 들어 노는데, 갓양태만 붙은 헌 갓에, 옷깃만 붙은 도포에, 총만 붙은 미투리 차림에, 함 뼘 못되는 곰방대를 물고 다니는 우스운 모습이다. 안개 낀 날과 비 오는 날을 좋아하며, 순식간에 천리만리를 뛰어다닌다. 먹는 것은 수수떡, 수수밥을 좋아하고, 흰 돼지와 검은 돼지 같은 네발짐승의 머리와 갈비와 열두 뼈를 좋아하고, 시원한 간이나 더운 피도 좋아하고, 고기와 술을 동이로 받아먹는 신이다.
영락없는 도깨비의 모양과 성격을 읊었다. 그래서 도깨비굿이라고 한다. 영감본풀이의 영감은 도깨비불을 인격화시킨 신격이다. 신의 성격과 습성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도깨비는 영감으로 호명되는 남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시 서낭, 돌허리 아기씨 서낭 등 여성격 또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서낭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아 선박의 신이고 만선을 기하는 풍어의 신이기에 가장 두드러진 기능이 풍신(豊神) 혹은 부신(富神)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국의 도깨비 일반에 나타나는 가장 전형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이외 마을을 대표하는 당신(堂神)으로도 나타나고 전염병 등을 퇴치해주는 역신(疫神)으로도도 나타난다. 무엇보다 불을 상징하거나 불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불신(化神)이다.1)
제주도의 영감 도깨비굿과는 사뭇 다르게 진도의 도깨비굿은 오로지 여성들만 전면에 등장한다. 비슷한 섬 지역임에도 한 지역은 영감이라는 남성격으로 한 지역은 여성격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벙거지와 바가지를 덮어쓴 도깨비들이 마을의 뒷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장 앞선 자는 월경의 피로 범벅된 속치마를 장대에 내걸었다. 농악대의 청룡기처럼 핏빛의 속곳이 펄럭였다. 깃발 아닌 이 속치마를 따르는 무리들은 손에 호미며 작은 곡괭이들을 들었다. 소리가 날만 한 물건들도 모두 들었다. 놋양판, 쟁반, 냄비 뚜껑, 나무 막대기, 양철 동이, 놋그릇, 바가지, 솥뚜껑, 식기, 주전자, 양지기, 세숫대야 등이 요란한 소리로 골짜기를 울려댔다. 턱까지 차올라 오르는 열기들이 무리를 좇아 오르다 골짜기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명산대천으로 이름난 마을의 뒷산에 올랐다. 언제부턴가 이 산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지역 유지가 선친 묘소를 옮겨 도장(盜葬)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도깨비들이 명당 삼을만한 등성이와 봉우리들을 뒤지다 드디어 숨겨둔 묘를 찾아냈다. 호미며 곡괭이로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인정사정없이 뼈들을 사방으로 뿌려버렸다. 조상들의 뼈가 흩뿌려져도 누구 하나 나와서 제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잔솔들 사이를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들이 갈 곳 몰라 두리번거렸다. 솔가지들마저 쭈뼛쭈뼛 솟아올라 그러지 않아도 타는 심장들을 찔러대는 듯했다. 이런 광란의 굿판이라니 도대체 해괴한 이 일을 벌인 도깨비들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나는 이를 여성 전유의 반란이라고 의미부여를 해왔다. 얼굴에 모두 숯검정 칠을 했지만 모두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여성 전유의 반란 제의, 오로지 여성들만이 모여 무덤을 파헤치는 굿판 말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온 땅들이 타들어 가고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들이 메말라 죽어가던 어떤 풍경이다. 음택이라 해서 조상의 묘를 중히 여기던 조선 시대에 과연 이런 반란의 의례가 가능했을까? 당연히 가능했다. 명당의 주인들은 이 제의를 제지할 수 없었을까? 물론 제지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명산대천은 아무리 권력 있는 자라도 묘지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음택을 입는 공유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오로지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이 제의에 기왕의 체제들을 담당하던 권문세족 혹은 남성들이 참여할 자리는 없었다. 대체로 극심한 가뭄이나 역병의 유행이 심할 때 치러진 의례 중 하나다. 왜 여성들만 모여서 해괴한 의례를 치렀을까? 일반적인 기우제가 비 내림을 염원하는 기원이라면 기우제 도깨비굿은 비 내리지 않는 자연현상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란 제의다. 이 의례의 목적이 기왕의 질서를 뒤엎는다는 데 있다는 뜻이다. 반란 제의는 자연현상에 대한 전복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전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도깨비굿은 가뭄이나 기근의 자연재해적 위난에만 행해졌나? 그렇지는 않다.2) 도깨비굿을 동반하지 않은 파묘 행위는 좀더 엽기적이다. 한국의 형법전에 따르면 묘에 대한 신성 모독은 극악범으로 취급하여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에서는 어린이를 유괴하고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유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송장을 파내 가며, 죽은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고 살아 있는 자기 아들을 찾을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쓴다. 한국인들이 자기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보면, “이 무덤에 묻혀있는 시신은 머리가 없을 것인데, 어느 날 어느 장소에 얼마만큼의 돈을 갖다 놓으면 돌려주겠노라”라고 쓴 팻말을 발견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자존심이 있는 한국인은 자기 어버이의 시신을 찾으려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저당 잡히거나 아니면 그 일부를 잃게 될 것이다.3)
1900년대 초 헐버트가 당시에 직접 보고 쓴 글인지 어디서 들은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상과 묘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글이라 생각된다. 문순태의 소설 <타오르는 강>에서도 파묘에 대한 내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마을을 지나 영산강을 등 뒤에 두고 논둑길을 무질러 신북쪽으로 넘어가는 점등에 올랐다. 황토밭 점등에서 밋밋한 등성이를 타고 한참 오르다가, 너덜겅을 지나자 참나무 숲이 나왔다. 잡목숲을 빠져나가 다시 아기다박솔이 촘촘한 가파른 등성이를 추어 오르니 달빛이 새끼내 앞들을 굼실굼실 멀리 내려다보았다. 박초시 아버지의 선산은 바로 아기다박솔 등성이 아래에 있었다. 묘역이 꽤 널찍했다.
“자, 서두르게, 덕칠이하고 나허고 묘를 팔 테니 웅보는 망을 보소” 김치근이가 말을 하며 덩실하게 큰 무덤 쪽으로 갔다. “이 깊은 산속에 누가 온다고 망을 보란 말여?” 웅보도 김치근을 따라가며 불만을 토했다. “요 아래 제각 옆에 산지기가 사네. 웅보는 저쪽 위 바위등걸 옆에서 누가 올라오는가 보란 마시.” 김치근의 다그침에 웅보는 하는 수 없이 김치근이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큰 바위 쪽으로 올라갔다. 김치근이와 덕칠이가 묘를 파기 시작했다. 괭이질하는 소리가 찌걱찌걱 달빛이 깔린 고즈넉한 어둠을 깨뜨리듯 크게 들려왔다. (중략) 무덤을 파던 김치근이가 손을 휘저으며 내려오라고 하기에 웅보는 묘역으로 갔다. 깨끗하게 벌초를 해놓은 무덤 옆 풀 섶 위에 희끔 달빛에 비쳐 보여, 가까이 들여다보았더니 흙 묻은 해골바가지였다. 조금도 섬뜩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4) 웅보와 김치근, 덕칠이 등이 박초시네 선산을 파헤쳐 시신을 감추고 흥정을 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일단락되는 내용이 스팩터클하게 전개된다. 이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면, 좀 더 긴박하고 신비롭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화 <파묘>의 묘 파는 장면에 해당한다. 땅을 파는 삽의 소리가 고요한 허공으로 울려 퍼지고 알지 못할 밤 짐승들의 소리와 교접하는 으스스한 분위기,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장막을 걷어내는 전이지대, 가끔 랜턴 빛이 주인공들의 얼굴에 비치며 클로즈업될 때마다 소스라쳐 놀라게 하던 것들이 모두 파묘의 행간에서 묘사되는 장면들이다. 한국인들에게 죽은 자의 무덤은 살아 있는 자의 무게만큼이나 중요했던 것 같다. 무라야마지준이 쓴 『조선의 귀신』에도 묘지와 관련된 사례들이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그중 한 풍경을 인용해본다. 충청북도 문의군 남면 하산리에 사는 신재지 씨는, 같은 군 같은 면 상산리에 사는 신선묵씨가 자기의 선조 묘와 근접한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 땅은 신선묵 씨가 새로 구입한 땅이다. 그러자 자기 조상의 묘소 가까이에 다른 사람의 묘지가 생기면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앙이 생긴다고 해서 집안사람들이 모두 상의하였다. 그 결과 신선묵 씨에게 묘지를 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족 150여 명을 데리고 신선묵 씨의 집으로 몰려가 이장을 강요하면서 위협하였다(1913년 3월 21일 경성일보)5)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도깨비굿은 위 사례들과 사뭇 다른 여성 전유의 반란 도깨비굿에 관한 것이다.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칼럼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명산대천에 박았다는 쇠말뚝 얘기를 길게 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유쾌한 풍자 영화 <파묘> “사람의 혼을 이루고 있다는 푸른 빛,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작은 밥그릇만 하다. 전라지방의 방언.” 국어사전의 혼불에 대한 설명이다. 남자의 혼은 대빗자루 모양의 길고 큰 불덩이고 여자의 혼은 접시 모양의 둥글고 작은 불덩이라고 한다. 영화 <파묘>의 후반부에 등장하여 하늘을 휘젓고 다니던 도깨불이 그것이다. 커다란 횃불이 공중을 휘젓고 날아다닌다. 푸른빛의 밥그릇 크기 도깨비불로는 품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전반적인 정서는 풍수 관념과 무당굿이다. 일제의 잔재와 강제점유를 풍수 관념에 빗대어 풍자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주거나 주택을 양택이라 하고 묘지를 음택이라 한다.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귀신>이나 <조선의 풍수> 등 방대한 양의 민간전승 사례를 수집하여 보고하였다. 고묘법(顧墓法)이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전해진 풍수설(風水說)을 믿고 옛날부터 자손의 운명은 오로지 조상의 유해에 의해 지배되며 또 그 유해는 묻혀있는 묘지의 좋고 나쁨에 영향을 받는다. 묘지의 좋고 나쁨은 땅의 힘(地氣=生氣)을 많이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너무 풍수 현상에 경도된 측면만을 강조하는 이런 견해는 현상만 보고 그 본질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은 보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이런 시선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혹은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줄거리도 대체로 인과적인 서사가 적용되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다. 예컨대 아무리 묘를 잘못 썼다고 죽은 조상이 자신의 후손을 해칠 수 있을까? 우리네 가족 관념으로는 전혀 수용할 수 없는 작위적 얼개다. 영화 감독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설정 자체가 일본군 수장의 그것과 뒤섞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성이다. 하지만 리얼한 굿판 풍경과 남녀 주인공들의 열연이 영화를 매우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 영화의 백미나 매력은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도륙의 상기는 물론 쇼킹한 굿판 장면들과 실제를 능가하는 무당 연기력에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얘기를 좀 더 붙이면, 얼굴이며 몸이며 온 신체에 글씨를 가득 쓰고 의례를 집행하는 장면을 보며 떠올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다. 발바닥에 글씨를 쓰고 이른바 악귀에 대응하는 장면을 보면서 무얼 상상할 수 있을까? 털 벗겨진 제물 돼지들이 묘지를 장식하는 일종의 낯섦에 대한 놀라움, 기괴함에 대한 공포 같은 것보다는, 신체에 무언가를 붙이거나 새기는 일종의 부적(符籍)을 떠올렸을 것이니 말이다. 자현 스님은 『부적의 비밀』에서 한국 부적의 가장 오래된 기록을 후한 시대의 응소(應劭)가 찬술한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찾고 있다. 궁통(窮通)의 복숭아나무 패(牌)가 그것이다. 지면상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취임 때 일군의 무리가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던 모습이 연상된다. 가와이 쇼코가 쓴 <음양사 해부도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섣달 그믐날 추나(追儺, 역귀 쫓는 의례)를 행하는데 오니야라이(鬼追)라 한다. 음양사가 악귀나 역신을 쫓아내는 제문을 읽고 눈이 넷 달린 가면을 쓴 호소씨가 진자를 이끌면서 방패와 창을 부딪쳐 울리며 선택된 귀족이 복숭아나무 활로 갈대 화살을 쏘는 의례다. 바지나 의복을 뒤집거나 거꾸로 입는 심리도, 우리네 장독대에 왼새끼줄을 걸고 버선을 거꾸로 매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적을 소지하거나 붙이는 것을 넘어 아예 몸에 그려 넣기도 한다. 눈병이 생기면 발바닥에 천평지평(天平地平)이라는 글씨를 먹물로 쓰면 낫는다고 한다.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뭔가 기대하는 것도 부적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오컬트 장르의 영화를 두고 굳이 사실관계를 따져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행간과 이면에 숨은 뜻을 읽는 시선이 중요하다. 복숭아나무 행렬을 두고 일본 음양사의 오니야라이를 떠올린다든가, 발바닥에 글씨를 쓰는 악귀퇴치 행위를 보고 윤대통령이 손바닥에 쓴 왕(王)자 글씨를 연상한다든가, 박근혜 대통령 때의 오방낭(五方囊)을 소환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풍수사상에 의한 에코 프랜들리, 즉 땅에 대한 존중과 경외의 태도를 상기하는 것이 음택풍수는 물론 양택풍수의 기본 철학임을 알아차리는 데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리네 음양오행 등 자연친화적 철학을 근간 삼는 전통들이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고 희화화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기왕의 네거티브한 풍수 속설을 비판 없이 인용한 이 영화에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우수한 것은 전면에 등장한 쇠말뚝의 진위보다는 왜 이것들이 소환되는지, 왜 정부는 독도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나라와 국토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풍자(諷刺)의 본령은 헐뜯는 것보다는 비유하여 간하고(諷) 꾸짖는(刺) 것이다. 3. 역병 방지를 위해 벌였던 도깨비굿 내용의 파급을 위해 졸저의 내용을 다시 옮겨둔다. 전염병이 돌 때, 가뭄이 들었을 때의 기우제 때 파묘하는 도깨비굿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진도군 서외리의 도깨비굿과 조도면 가사도의 도깨비굿, 무안군의 도깨비굿 사례를 소개한다. 이외의 자료들도 졸저에 풍부하게 예시해두었으므로 궁금한 이들은 참고 가능할 것이다.
<진도군 서외리 도깨비굿> 서외리 도깨비굿에서 호명되는 귀신들은, 총알 맞아 죽은 귀신, 작두에 목이 잘려 죽은 귀신, 턱 떨어져 죽은 귀신, 객사 귀신, 야챕이 귀신(키가 큰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덜다리 총각 귀신(장가 못간 귀신), 심(마음)앓아 죽은 귀신(말라리아 병으로 죽은 귀신), 몽두리 귀신(시집 못 간 처녀 귀신), 염병 앓아 죽은 귀신, 지랄병 하다 죽은 귀신, 무자 귀신(아기가 없는 귀신) 등이다. 각 마을에서 여자들만 모여 행하던 굿의 대표격이다. 음력 정월 보름부터 굿을 시작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굿을 친다. 이어 사제각과 여제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귀신을 가둔다. 이때의 제관은 생기복덕을 봐서 선택된 이른바 깨끗한 남자다. 여성들의 반란 제의라고 하는데 갑자기 왠 남자가 참여한단 말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도깨비굿의 원형질을 담고 있는 제의들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가두어 놓은 귀신들을 문 열어 풀어주는 때가 음력 9월 9일 중구날이다. 진도지역에 전승되었던 여제(厲祭)의 전형적인 형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국가에서 주도하던 제의 중의 하나였다. 나경수의 조사에 따르면 진도읍 교동리의 여제는 거리제에 부수되어 행해지는 의식이었다. 농사가 시작될 때 귀신을 잡아 가두고 농사가 끝날 때 다시 풀어주는 형식이다. 물론 바탕에는 자연종교의 무의식적 논리 체계가 이들의 관념과 의례 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강제하고 제도적으로 연행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제 이전의 무당들이 행하던 국가적 기우제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시대 취무기우제(聚巫祈雨祭)이다. 고려시대, 가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뙤약볕의 악조건에서 무당이 대신하는 의례였다. 국가기관의 넓은 뜰에 다수의 무당을 강제 동원하여 기우(祈雨)를 강요하는 형식이다. 최종성의 연구에 의하면 국왕이 포괄적으로 수용해야 할 가뭄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과 책망을 무당에게 전가시키는 희생 의례였다. 물론 무당들이 가진 위엄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무당들이 주관하던 기우제는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600여 년 지속 되어 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폐단들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었고 여러 논의를 거쳐 새로운 형식들이 도입되기도 했다. <진도군 가사도의 도깨비굿> 진도읍 서외리 도깨비굿에 비하면 가사도의 도깨비굿은 마을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 정월 그믐 자정을 넘겨 동구 앞에 제상을 차린다. 다음날인 2월 초하루부터 가사도의 모든 여성들이 모인다. 남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당제를 치른 연후다. 여성들은 첫째 날과 둘째 날 이틀 동안 각각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도깨비굿을 한다. 각종 소리 나는 것들을 들고 마치 메구굿을 하듯 두드린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월경해서 피가 묻은 속곳이다. 이것을 선두에 선 사람이 장대에 꼽고 대열을 인도한다. 남자들은 얼씬도 할 수 없다. 이렇게 가가호호 방문하여 액귀를 몰아내고 3일째 되는 날은 ‘낸다’고 하여 모두 한곳에 모여 질펀하게 논다. 이날은 각 집에서 술이나 밥, 과일, 떡 등을 분수에 맞게 내놓고, 또 깨끗한 여자 한 명을 선정해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장만하게 한다. 깨끗한 여자란 당제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는 여자나 혼자 사는 여자를 말한다. 저녁 무렵까지 한바탕 놀고 나서 마을 어귀에 모여 절을 한다. 이것을 보고 ‘도깨비 절하고 나간다’라고 한다. 이후 가사도의 포구인 어류포로 나가 나무로 깎아 만든 배에 액(허수아비 등)을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는 것으로 도깨비굿을 모두 마친다. <무안군 매곡마을 도깨비굿>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는 무안과 혐평 일대의 명산이라는 평산이 있다. 양림마을, 수반마을, 도산마을, 발산마을, 신촌마을이 띠를 이루며 경산 들녘을 에워싸고 있다. 보평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봉수대가 있다. 보평산과 감방산 사이에 있는 능성에는 용굴샘이 있어 명산 보평산의 풍수 스토리를 완성해준다. 이 물이 마르거나 마르지 않거나를 가지고 한 해의 기후와 운수를 점쳤기 때문이다. 누군가 몰래 이 산에 묘를 쓰는 일이 발생하면 이 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보평산은 명산이고 용굴샘은 그를 보전하는 상징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 산에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자손들만의 발복을 위해 몰래 묘를 쓰는 자들이 있다. 이를 도장(盜葬)이라 한다. 그럴만한 능력과 사회적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가뭄이 들거나 역병이 들면 고을의 여자들이 호미와 낫 등을 들고 보평산을 뒤진다. 결국은 몰래 쓴 묘를 발견하고 파헤치며 유골들을 흩뿌려 버린다. 그래도 묘지 임자가 되었건 문중이 되었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종의 시스템이다. 명산대천은 공동체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몰래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뭄이나 기근 특히 역병의 원인을 발복이나 사회적 권력의 독점 때문이라고 진단했음을 알 수 있다. 1) 이윤선,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다할미디어, 2021, 216쪽.
2) 이윤선,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다할미디어, 2021, 229쪽. 3) H. B. 헐버트,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566쪽. 4) 문순태, 『타오르는 강 1부 대지의 꿈』, 소명출판, 2012, 330~331쪽 5) 무라야마지준, 『조선의 귀신』, 민음사, 435쪽 6) 이윤선,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다할미디어, 2021, 260~263쪽 참고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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