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네댓 마을마다 서당이라더니 섬마을에도 서당이 있었네. 게시기간 : 2024-09-27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4-09-19 13: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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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서당은 사숙, 서재, 정사, 서숙, 학당, 강당, 강사, 가숙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들로 불렸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우리나라 관습에 수십 집의 촌락에 서당이 없는 곳이 없으니 배움과 가르침이 매우 근실하네.”1)
라 하였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말하기를 “군현에서는 보통 1향(鄕)이 수십 개의 촌락을 거느리고 있는데 대략 4~5개의 촌락마다 반드시 하나의 서재(書齋)가 있다.”2)
라 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네댓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다. 그야말로 향촌서당들이었던 셈이다. 그런 서당은 “어찌 이리 같지 않나 모두 나라 땅이거늘/ 육지 사람 우리 보길 진흙 속 벌레인양”3)이라 여겼던 섬마을에도 뜻밖에 아주 많이 있었다. 1896년에서 1914년까지 존재했던 행정구역인 지도군(智島郡)에서 확인되는 서당만 45개가 넘는다. 마을이 있는 대부분의 섬마다 서당이 있었던 셈이다. 서당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서당들이 섬마을에까지 세워질 수 있었는지? 그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이행기 서당의 변천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여기서는 특히 지도군 섬마을 서당을 중심으로 살폈다. 조선 후기 서당의 모습 조선 후기에 오면 동성마을이 많이 늘어난다.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이들 동성마을이 주체가 되어 서당을 설립·운영하게 된다. 동성마을마다 서당이 있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서당 설립에 비사족계층의 참여도 많아졌다. 그 결과 서당은 우선 양적으로 크게 늘어났고 또 그 유형도 다양하게 나타났다.4) 이처럼 서당은 문중이나 마을공동체가 설립 주체가 되어 마을 단위로 세워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문중 집단 혹은 일족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보족(保族) 기능과 가문의 가격(家格)과 지위를 높이기 위한 의가(宜家) 기능이 커졌다.5) 이와 같은 문중서당은 같은 문중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가학의 전승을 목표로 한다.6) 이를 위해 동리(洞里)의 자제를 교육시켰고, 교육 내용도 가학적 성격을 띄었다. 서당은 우선 강학소로서 기능하는데, 그 외에도 마을 공동체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강학도 그 수준이나 내용이 다양했다. 초학 아동의 문자교육에서부터 고급성리서의 강론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서당은 주로 초등교육시설이나 상급학교의 준비교육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서당은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학습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내용과 방법으로 운영되었다.7) 그래서 과거 준비까지 시키는 서당도 있었다. 문중이 향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급제자를 배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학』에 입각한 교육을 하면서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도 적절하게 운영하곤 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것은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적 변수였다. 따라서 과거 공부는 가학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하여 가학을 잇고 가문을 키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고 그런 열망이 서당의 교육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림 1】 사방관을 쓴 양반이 자리를 짜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자리짜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18세기 후반에는 섬 지방에까지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당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었다. 지도군의 거의 모든 섬마을에 자리잡고 있던 서재 즉 서당들이 그런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 평민을 대상으로 교육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섬마을에서도 서당을 운영할 수 있었던 데는 몰락한 양반들이 궁벽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집의 가숙이나 영세한 서당의 학장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이른바 고용훈장들의 존재도 그 배경이 되었다.8) 당시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에 얼마나 지성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김홍도의 「자리짜기」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대해 “어린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추어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다. 아들은 낮에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을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레 막대기로 짚어가며 읽어 보이고 있다. 부모는 글 읽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일을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자리짜기>에서는 서민 가정의 유일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9)
는 해석이 붙어 있다. 머리에 사방관을 쓴 것으로 미루어 이는 몰락양반으로 보이는데 그런 형편에서도 아이가 야무지게 막대기를 쥐고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는 모습을 대견해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만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희망을 걸었다. 초대 지도군수 오횡묵의 순행길과 서재(書齋) - 『심진록(尋眞錄)』을 중심으로
1896년(건양 1) 2월 3일, 칙령 제13호로 「전주부·나주부·남원부 연해제도(沿海諸島)에 군(郡)을 치(置)하는 건」이 각의(閣議) 의결을 거쳐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완도군, 돌산군, 지도군 등 섬만으로 이루어진 3개의 군이 신설되었다. 시찰위원들의 조사보고에 따라 지도군은 지도진(智島鎭)에 군을 설치하고 부속 도서로는 나주ᆞ영광ᆞ부안ᆞ만경ᆞ무안의 다섯 개 군의 도서 117곳과 호수(戶數) 5,184호에 결총(結總) 3,109결 67부 4속을 관할하게 하고 등급은 5등군(五等郡)으로 정하였다.10) 다만 1896년 8월에 13도제로 다시 개편하면서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관할 도서는 98개의 섬 및 작은 섬 19곳과 무인도 등이었다. 지도군의 초대 군수로는 오횡묵(吳宖黙, 1834~1906)이 임명되었다. 임명은 1896년 1월 22일이었다. 4월 24일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부임지로 떠났다. 육로 대신 수로를 택해 뱃길로 지도까지 내려갔다. 5월 15일이 되어서야 지도에 도착했다. 임명된 지 다섯 달 만이었다. 그는 창설된 군(郡)을 맡아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로 ‘흥학(興學)’, 즉 “교학의 진흥”을 무엇보다 앞세웠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오늘에 있어 마땅히 가야 할 길,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오로지 흥학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11)라 하였다. 오로지 학문을 일으키는 흥학에 군수의 임무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를 위해 두 차례 순행을 통해 직접 흥학 활동에 나섰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구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에 여러 섬들을 순시(巡視)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일이 곧 이른바 진(眞)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이다.”12)
라 하여 직접 찾아 나섰다. 그는 순행하면서 숙사(宿士)·석인(碩人)·촌수(村秀)·재자(才子)들을 두루 만났고 동행한 일행들과 함께 어울려 시를 지으며 학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행 여정의 사연들을 더해 『심진록』을 엮었다.13)
【그림 3】 신안향토사료지 『국역 심진록』 표지(2014.10, 신안문화원 발행) 이처럼 그는 군내를 순성(巡省)하며 눈으로 직접 보고 얼굴을 마주 대하여 타이름으로써 흥학을 몸소 솔선하였다. 1897년 4월 7일부터 11일까지 1차 순행,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2차 순행을 가졌다. 관련 여정은 【그림 4】의 순행여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행의 목적은 「고시하여 포유하는 일」이란 글에서 권농, 흥학, 찰막(察瘼 :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핌)의 세 가지를 거론하였다.14) 그중에서 흥학은 『심전록』으로, 찰막은 「고해행(苦海行)」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를 보면 흥학에 훨씬 많이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흥학 쪽에 속한 일은 이미 『심진록』에 남김없이 기록하여 경내 제자(諸子)들에게 보여 주었으나, 찰막 쪽의 일에 이르러서는 단서가 어지럽게 뒤얽혀 잠시 일통(一統)으로 총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번 순행에서 거인(居人)과 야로(野老)들로부터 얻은 것을 대략 줄거리를 들어 말함으로써 「고해행」 한 조목을 짓게 되었으니, 이로써 천명을 두려워하고 인궁(人窮)을 가엽게 생각하는 뜻을 은연중에 부쳐 『심진록』과 겸비(兼備)하여 대우(對耦)가 되도록 한다.”15)
고 하였다. 실제로 『심진록』은 원문이 총 144쪽인데, 그중 「고해행」은 6쪽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이 중심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두 차례의 순행과 흥학의 성과 그는 순행하며 가는 곳마다 학도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우열을 비평하여 백지를 시상함으로써 권면하였다. 그리고 시상한 서동(書童)들 중 우수한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두었다. 이에 각 서재 학도들은 또 시를 지으려고 오횡묵에게 운(韻)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시회(詩會)는 1897년 4월 15일 양사재 시회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때 모여든 자가 어른이 사십 여인, 동자가 팔십 여인이었다. 오횡묵 스스로도 오백 여인이 모였던 함안(咸安)의 이수정(二藪亭) 시회에 비교하면서 “모인 숫자보다 많지는 않으나, 그 속되지 않음과 광휘(光輝)가 나는 데는 같다고 하겠다”16)라며 기뻐했다. 그가 순행하며 흥학을 북돋운 덕분이었다. 양사재 시회에는 이렇듯 “무리 지은 동자(童子)들이 청색 홍색으로 섞이어, 마치 물고기가 떼지어가고 새들이 함께 모여든 것 같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17)라 하였다. 함께 순행에 나섰던 그의 아들 오익선(吳翼善)은 “남주(南州)에 사기(士氣) 이로부터 성해져”라는 시구(詩句)를 남겼다. 송파(松坡) 박기우(朴圻佑)도 “새로운 때 이 군(郡)에 재(齋) 마침 이루어져, 유학(儒學) 교화 우리 군수 비로소 경영했지” 등의 시구로 그 순행의 성과를 노래했다.18) 한편 군읍 내에 누대가 없음을 흠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군 사람들이 남강(南岡)에 정자를 하나 지었다. 그 이름을 일엽정(一葉亭)이라 하였다. 그 이름에는 “대저 적은 것은 일(一) 보다 적은 것이 없지마는 수(數)는 반드시 적은 것으로부터 많은 것에 이르며, 작은 것은 잎보다 작은 것이 없지마는 물(物)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게 된다.”19)
는 뜻을 담았다. 이것은 이 군(郡)이 이제 막 흥해가기를 바라는 바를 그린 것이라 하겠다. 바다 타며 흥학에 뜻을 둔 두 번째 순행을 거치면서 이제 지도는 “해국(海國) 또한 왕정이 미치는 곳, 서재 세워 흥학 하니 문명의 자취”20)라고 할 만큼의 성과를 냈다. 그리고 오횡묵 스스로도 “학사(學舍) 경영하여 영재 육성 즐겨하네”라 하고 그 결과 “돌아보며 살핀 우리 고을 풍속, 유문(儒文) 성(盛)한 이 나라로다”라고 평하기에 이른다.21) 이렇듯 순행을 비롯한 오횡묵의 군정에 대해 김인길(金寅吉)은 발문에서 “몸소 선창(先倡)하여 바다를 타고 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만나는 곳마다 그 퇴휴(頹隳)한 기풍을 격려하여 분발하게 하여서, 동리나 마을에 들어선 서숙(序塾)에 무성하게 기쁨이 솟구쳐 떨쳐 일어나는 기상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잠깐 동안의 공효(功效)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는가.”
라 하였고, 김성탁(金聲鐸)도 역시 “공(公)이 이 고을 초창의 종주가 되어 더욱이 흥학 한 가지 일에 삼가 정성을 다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몸소 바다를 타고 앞서 나가, 손수 책을 묶어 남겨 놓아서, 온 군의 봉액지사(縫掖之士)로 하여금 보고 느껴서 떨쳐 일어나도록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고 성하지 아니한가.”
라고 발문을 남겨 칭송을 이어갔다. 하지만 금파(錦坡) 조병호(趙炳鎬)가 “고해(苦海)에 괴로움 바닷사람이 알지, 육지사람 알지 못해, 고해의 쓴 맛”22)이라 하듯, 섬사람들의 어려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고해행」이란 글에 그런 아쉬움을 남겨 섬사람들의 마음을 달랬을 뿐이었다. 시 짓는 일과 흥학 – 가학의 한 요소 앞서 보았듯이 『심진록』에는 수많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순행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흥학의 수단으로 한 일은 곧 작시(作詩) 또는 부시(賦詩), 즉 시를 짓게 하는 것이었다. 시를 짓는 일이 흥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요즘도 문학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하지만 그 기능이 옛날과는 다르다. 왜 옛사람들이 시 짓는 일을 중시했는지를 살펴보면, 오횡묵이 순행하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짓게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짓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사실 옛 문집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시문집’이라 할 만큼 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만큼 시 짓기가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규남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은 선비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개 명색이 유자(儒者)는 경술(經術)에 밝지 않으면 안 되고, 사학(史學)에 해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찰(筆札)과 사율(詞律) 따위 일은 비록 유자의 본업이 아니지만 그것도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 … 선비가 이런 것을 하는 것은 반드시 행세하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지 않으면 선비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23)
즉 선비가 되기에 필요한 기량으로 필찰[또는 簡札, 편지쓰기]과 사율[시 짓기, 운을 맞추어 짓는 사와 율시]을 꼽고 있다. 왜 이렇게 필찰과 사율에 대해 강조하였을까? 먼저 편지는 당시 소통의 수단으로는 으뜸이었다. 교유를 위한 수단은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사율도 교유관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재능이었다. 당시 선비들 일상의 만남에서 시를 짓는 것은 다반사였다. 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또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대부분의 시들은 상대가 있는 시였다. 이는 곧 시가 소통의 수단이었음을 말해 준다. 시는 그 사람의 인품, 지적 수준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물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도 필요하겠지만, 세상살이에서 정말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율이었다. 이처럼 사율 즉 시 짓기는 선비가 되기에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오횡묵은 “이 군(郡)으로 나아가 말해보면 오늘 꾀할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선비를 기르는 것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24)라고 보았는데, 당시에 꼭 필요한 선비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시 짓기’였으니 시 짓기를 흥학의 수단으로 삼아 권면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그는 1897년 5월 25일부로 여수군수로 전근 발령되었다. 『지도군읍지』에 나타난 서당의 현황 1908년 『지도군읍지』를 보면 다른 읍지들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록들이 있다. 즉 「서사(書社)」라는 항목에 수많은 ‘○○재(齋)’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다른 읍지에서는 볼 수 없는 항목이다. 물론 항목이 없다고 해서 다른 군현에 서사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지도군읍지』에는 독특하게도 이를 자세하게 조사해 놓았다. 반면에 지도군에는 다른 여타 군에 흔히 있는 서원이나 사우는 없었다. 따라서 오횡묵 군수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흥학 관련 사항을 찾다 보니 이런 서재에 대한 기록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군읍지』 「서사(書社)」조에 나타난 기록들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지도군읍지』에 나타난 서사(書社) 형편
이 표는 1908년 『지도군읍지』의 「서사」조를 기본으로 정리했다. ✳는 『심진록』, ✼는 『총쇄록』, 그리고 ❋는 『전라남도지』(羅燾佑 編, 追遠堂, 1926)에서 추가한 내용이다. 이 외에도 서재들이 더 있었다. 즉 임자 광산(廣産)의 마을에 죽수재(竹峀齋), 증도(?) 덕정재(德鼎齋)와 송암재(松庵齋) 등의 이름이 『심진록』에 보이나 그뿐,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서 이 표에 넣지 못했다. 조금씩 다른 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재들은 문중과 마을사람들[村人]들이 중심이 되어 세웠다. 따라서 문중 자제·자질들과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습하는 데 그 설립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향촌서당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마을의 뛰어난 인재들” 즉 ‘촌수(村秀)’를 교육한다고 한 서재들이 여럿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남원의 윤빙삼(尹聘三)이 목천(木川)의 반계(磻溪)에 서실(書室)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 송시열이 말하기를 “대개 조용하고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집안의 어린아이들을 돌보았다. 마을의 뛰어난 인재[村秀]가 찾아오면, 아침에는 그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연습하게 했다. 이것이 예전에 이른바 가숙(家塾)이란 것이다.”25)
라 하였다. 이렇듯 가숙 즉 서당은 한집안의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곳이지만 특히 ‘촌수’를 찾아 아침에 가르치고 저녁에 연습하게 하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촌수를 가르치는 것이 왜 중요했을까? 『목민심서』의 다음 글을 참조하면 그 이유를 알 만하다. 즉 다산은 “동몽(童蒙) 중에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자는 따로 뽑아 가르칠 것이다”라면서 “서재에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스승[都都平丈] 한 사람이 앉아서 수십 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 중에서 수재(秀才)를 선발하되, 수재의 기준은 10세 내외의 어린이로서 하루에 글 3~4천 자를 배워 십여 번을 읽고서 배송(背誦)하는 자를 상등(上等) 수재로 정하고, 하루에 2천 자를 배워 20번을 읽고서 배송하는 자를 중등 수재로, 하루에 글 천여 자를 배워 30번을 읽고서 배송하는 자를 하등 수재로 정할 것이다. 이 이하는 수재라 칭할 수 없다.”
라고 ‘수재’의 기준을 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수령은 학궁에 첩문(帖文)을 내려, 학궁에서 여러 향리의 서재에 공문을 보내어 세 등급의 수재에 해당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성명ㆍ연치(年齒)와 평소에 읽은 글과 현재 몇 자를 배워 몇 번 읽고 배송할 수 있는가를 성명 밑에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학궁으로 회보(回報)하게 하고 학궁에서는 수령에게 보고하게 할 것이다. … 혹 수재로 선발된 자 중에 뛰어나게 영특한 자가 있거든 수령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데려와서 큰 인재로 만들어 국가에 바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수령들의 일정한 직무였다.”26)
라 하였다. 수재를 발굴하는 대상은 향리(鄕里), 즉 마을의 서재 생도들이었다. 이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국가의 인재로까지 만드는 일이 수령의 책무였다. 이런 인식들이 섬의 서재들에도 전해져 촌수를 가르치는 것을 중시했다. 그들 중 누구라도 과거를 통해 국가의 인재로 성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지역의 희망이지 않았을까? 그런 간절한 뜻이 ‘촌수’ 교육에 담겨있었다. 근대교육과 서당 전통적 교육기관인 서당은 조선 후기에 확대되었고 갑오개혁으로 인해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존속했다. 특히 애국계몽기에 많이 생겼다. 통감부 설치에 의한 보호정치에서 식민지 강점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일반의 구국독립운동의 기운 안에서 서당은 일층 증가하였다.27)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1911년 3월 말 현재 전국의 서당은 16,540개 소, 학생수는 141,604명이었다. 그것은 한 마을당 0.9개 소의 서당, 호구 160호에 대하여 평균 1개 소의 서당이 있는 정도의 비율이었다. 일제 강점 초인 1910년대에 조선인들은 총독부의 교육정책과 근대 학교에 대한 의구심이 컸다. 그래서 아동들의 공립보통학교 취학을 피할 정도로 거부감이 컸다. 그 대신 전통교육기관인 서당이나 강습소 등을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이 되면, 서당이 25,482개로, 학생은 292,625명으로 늘어났다.28) 약 10년 동안 서당과 학생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하였다. 서당의 취학자가 보통학교를 능가하였던 것이다. 다만 3·1운동 이후 식민통치정책이 변하고, 거기에 더해 근대교육의 효용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학교교육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반에 보통학교 설립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었고, 그 수도 크게 늘었다. 그 결과 서당에 비해 신식교육이 분명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물론 그후에도 서당은 일정한 취학 규모를 유지했다. 해방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29) 이런 데서 서당이 지니는 한국교육사의 독특한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1) 宋時烈, 『宋子大全』 卷144, 「磻溪書室記」
2) 『목민심서』 「예전(禮典)」 제6조 「과예(課藝)」 3) 신안향토사료지 『국역 심진록』(신안문화원, 2014.10) 216쪽. 睡山 安炳亮 詩 4) 서당의 일반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정순우, 『서당의 사회사- 서당으로 읽는 조선 교육의 흐름』(2013.01, 태학사)을 참조하였다. 5) 같은 책, 210쪽. 6) 이욱, 「18세기 가학(家學) 전승과 문중서당(門中書堂)」(『국학연구 제18집, 한국국학진흥원, 2011.06), 129쪽. 7) 이명실, 「서당의 의미 재고를 위한 시론」(『횡단인문학』10,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2022), 283쪽. 8) 이 점에 대해서는 정순우, 「구한말 도서지방의 교육환경과 수령의 흥학 활동」(『嶺南學』 제20호, 2011) 참조. 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중 〈자리짜기〉에 대한 해설 참조. 10) 신안향토사료지 『국역 지도군총쇄록』(신안문화원, 2008.02), 47쪽. 저자인 지도군수 오횡묵과 이 책의 구성에 대해서는 최성환 교수의 자료소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瑣錄》의 주요내용과 가치」 참조. 11) 신안향토사료지 『국역 심진록』(신안문화원, 2014.10), 「尋眞錄序」, 49쪽. 12) 위와 같음 13) 『尋眞錄』에 대하여도 최성환 교수의 자료소개, 「오횡묵과 섬사람들이 남긴 심진록尋眞錄의 주요내용과 가치」 참조. 14) 『국역 심진록』, 61쪽. 15) 같은 책, 209쪽. 16) 같은 책, 129쪽. 17) 같은 책, 144쪽. 18) 같은 책, 133, 136쪽. 19) 같은 책, 145쪽. 20) 같은 책, 196쪽. 21) 같은 책, 204, 209쪽. 22) 같은 책, 216쪽. 23) 「寄子瀷 戊戌正月」(1838년 1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79쪽. 24) 『국역 총쇄록』(1896.10.28.), 177쪽. 25) 宋時烈, 『宋子大全』 卷144, 「磻溪書室記」 26) 『목민심서』 「예전(禮典)」 제6조 「과예(課藝)」 27) 渡部學, 『近世朝鮮敎育史硏究』(雄山閣, 1969), 128쪽. 28) 古川宣子, 「일제시대(日帝時代) 초등교육기관(初等敎育機關)의 취학상황(就學狀況) -불취학아동(不就學兒童)의 다수존재(多數存在)와 보통학교생(普通學校生)의 증가(增加)-」(『교육사학연구』 3권, 교육사학회, 1990.02), 140쪽 참조. 29) 오성철, 「근대 이후 서당교육의 사회적 특질」(『한국초등교육』 32권 1호, 서울교대 초등교육연구원, 2021.03)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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