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한 장 문안 편지로 족합니다 서애 유성룡이 만경 현령 이준에게 보낸 편지 게시기간 : 2020-10-15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10-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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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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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통첩> 이준(李浚)은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의 아들이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이다. ‘바위 틈에 핀 들꽃’처럼 거친 양반들의 텃세 속에서 꿋꿋하게 선조를 현양하고 가문을 일으킨 현손(賢孫)이다. 어머니 석비(石非)가 속량(贖良)되어 이전인이 양인이 되었고 이준의 어머니 정비(丁非) 또한 사비였지만 속량되어 이준, 이순 형제는 양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인이 되었다고 하여 과거 시험을 보고 관직에 나아갈 수는 없었다.
예조가 만력 11년(선조16, 1583) 12월 초1일에 왕명을 받듬. 병조의 수교에 “국가가 불행하여 북쪽 오랑캐가 노략질을 하여 방어하고 지키는 일이 매우 힘들고 군사와 군량이 모두 모자란다. 조처하여 준비할 대책은 다만 상규를 지킬 수만은 없다. 서얼로서 武才가 없는 사람으로서 납속을 한 자는 모두 벼슬길을 허통하라.”고 하여 비변사와 함께 의논하여 사목을 만들어 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번에 학생 이준이 먹을 수 있는 나락 평석으로 80석을 안변부에 납부하였으니, 사목에 따라서 전후 소생 자손을 모두 허통할 것.
禮曹萬曆十一年十二月初一日受/敎 兵曹受敎內 國家不幸 北虜作耗 防戍孔棘 兵/粮俱闕 措備之策 不可徒守常規 庶孽無武才而納粟/者 並許通仕路亦 備邊司同議 成事目/ 啓下爲白有如乎 節學生李浚亦 納可食稻米平捌/拾石于安邊府爲有昆 依事目 前後所生子/孫 並許通者 萬曆十一年十二月 日 給牒 判書(수결) 參判 參議(수결) 正郎/正郎/正郎 佐郞/佐郞(수결)/佐郞 16세기 조선의 상황은 ‘북로남왜(北虜南倭)’라 하여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가 발호하는 시기였다. 이준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하여 양인이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나갈 길을 모색하였다. ‘북로남왜’의 비상 상황에서 국가는 마침 납속(納粟)에 의한 서얼 허통을 허락하였다. 이준은 군량을 납부하여 허통을 받고 왜란 중에는 의병에 참여하여 벼슬을 받았다. 또 무과에 합격하고 임란 중에도 납속을 하여 벼슬이 높아졌다. 속량을 하고 허통을 하는 데에는 많은 경제력이 필요하였다. 이전인, 이준은 서얼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별급 형태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또 철저한 노비 전답 관리를 통하여 재산을 증식시켰다. 1583년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일어났다. 북쪽 변경에 많은 군사력과 군량이 필요하였다. 나라에서는 이를 조달하기 위하여 서얼 허통의 법제를 완화하였다. 이준이 출세하는 첫 출발점이 된 허통첩(許通帖)이다. 니탕개의 난으로 동북 변방에 병사와 병량이 필요했던 국가에서는 서얼 중에서 무재가 없어도 군량을 납속한 자는 모두 벼슬길을 허통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그 기회에 안변에 80섬의 나락을 납부한 허준에게 허통첩이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허통이 된 이준은 임란 시기에 무과에 합격하고 또 납속을 하여 경산 현령, 만경 현령, 청도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로 평안도 강계에 유배를 간 회재를 찾아간 이전인이 7년 동안 유배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공부하며 그곳에서 아버지가 죽자 추운 겨울에 시신을 모시고 경주까지 돌아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전인은 회재가 국왕에게 올리려고 했던 [진수팔규(進修八規)]를 대신 상소하고 또 퇴계 이황, 소재 노수신 등을 찾아다니며 아버지 회재의 복권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퇴계는 회재의 행장을 써주고 복권이 되어 선조 초년에는 유희춘이 의하여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와 함께 4현의 글들을 모아 편집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들어가게 되었다. 문묘 종사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버지 이전인과 함께 회재의 현양을 위하여 애쓴 것은 이준이었다. 아버지 이전인이 죽은 후에도 회재를 현양하는 일은 손자인 이준의 몫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편지>1 이준은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를 하며 회재를 모시는 서원을 세우기도 하고 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575년에 [회재집]이 간행되었을 때에 행장은 이황이 써둔 것을 수록하였지만, 서문은 소재 노수신, 발문은 미암 유희춘, 초당 허엽 등이 쓰고 신도비명은 고봉 기대승, 묘지(墓誌)는 백사 이항복이 썼다. 당대의 명류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렇게 회재를 현양하기 위하여 이준은 온 정성을 다하여 명류들을 모셨다. 회재를 모신 옥산서원, 이전인을 모신 장산서원에는 이러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잠계 이전인과 그의 아들 구암 이준이 윤두수, 윤근수, 이산해, 유성룡, 정구, 김장생, 정창연, 이호민, 장현광, 정경세 등 당대 명류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중에서 유성룡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2통이 있다. 이 자료를 음미해보자.
[전 경산 현령 이 계서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
전에 하루밤을 자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작별 후에 더욱 그립습니다. 지금 또 사람을 보내어 문안을 하니 정말 정성이 느껴집니다. 집에 돌아가서 무양하다니 더욱 위로가 됩니다. 보내주신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어버이 모시는데 감사합니다. 이곳은 대강 지내고 있습니다. 회재 선생의 지문(誌文)을 부탁하시는 것이 이처럼 정성스러우니 어찌 감히 고의로 사피(辭避)하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매우 중대하여서 끝내 저처럼 비졸(鄙拙)한 사람이 맡을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감히 쉽게 승낙을 못하고 있습니다. 몇 년을 기다린 후에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고 형께서도 조금이나마 진척이 있으시다면 혹 따를 수 있겠습니다. 천만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자옥잡록]은 그 글씨를 완상하기에 딱 맞으니 바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두었다가 뒷날 돌려드리겠습니다. 밀양에 보내는 편지는 써서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조금 거리끼는 것이 있고 또 서원 일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방백에게 말해서 공적인 일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잘 헤아리셔서 다시 알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관원의 발문은 전에 없었던 것을 얻었으니 매우 기쁩니다. 바로 도산에 보내서 문집 중에 넣으라고 할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삼가 답장을 합니다. 동지 후 2일 하상의 병든 사람 [李慶山 溪棲 □[謹]謝柬] 前得信宿之敍 幸甚 而/別後依戀倍深 今又/專人寄問 良荷惓惓 仍審/還棲無恙益慰 惠貺亦/謹領 奉親感荷 此間/粗保爾/ 先生誌文之託 勤至若此 豈/敢故爲辭避 但玆事極/重 終非鄙拙所敢承當/ 故不敢定易奉諾 竢數/年後 若神思少定 而拙兄/少有寸進 則或可仰副耳/ 千萬量察 紫玉雜錄// 切於書玩 不卽還鴟 亦姑留竢後/也 密陽書 欲裁還 而有少碍 且/係書院事 不如言於方伯 而公事//爲之也 量宜更示何如 灌園□/跋文 得未曾有 喜深 卽送於陶山/ 使收入集中爲計 如何/如何 不宣謹復 至後二日 河上病拙 유성룡이 이준에게 보낸 이 간찰은 피봉이 없이, 말아진 편지 이면에 [慶山 溪棲 □[謹]謝柬]라고 되어 있다. 수신자가 경산 현령을 역임한 계서(溪棲)라는 별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또 ‘謹謝柬’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준이 먼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한 것이다. 편지 말미에 자신을 ‘河上病拙’이라고 하였으므로, 서애가 1598년 12월에 삭탈관작되어 1599년 2월에 하회로 돌아온 이후의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준이 하회로 서애를 찾아가 하루밤 자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또 회재 선생의 지문(誌文)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서애는 좀 몇 년 기다리라면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거절하였다. 이 지문이 어떠한 성격의 지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회재집]에는 유성룡의 문자가 실리지 않았다. 참고하도록 가지고 간 [자옥잡록]은 좀더 살펴보겠다고 머물러두었다. [서애집]에는 이준이 1599년 2월에 하회로 서애를 방문한 기록이 남아있다.([西厓先生別集]卷1 詩 二月 余自道心出河庄 前慶山縣令李浚 晦齋先生之孫也 從慶州來訪 臨去以詩爲贈) 서애가 이준을 보내면서 쓴 시이다.
하룻밤을 자면서 여러 회포를 푼 두 사람의 이야기는 노년의 건강법에도 미친 모양이다.([西厓先生文集]卷18 跋 書延壽書後 己亥) 기해년(1599, 선조32) 봄 내가 하회 시골에 있을 때에 전 경산 현령 이준이 회재 선생의 손자인데 경주에서 방문하였다. 내가 쇠병(衰病)한 것을 보고 자기 집에 연수서(延壽書)가 있는데 섭생하고 양성(養性)하는 방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나에게 해보라고 권하였다. 가을에 한 부를 베껴서 써보냈다. 이군은 신실한 선비[信士]이다. 그러나 맹자가 말했듯이 양심(養心)은 과욕(寡欲)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 한 마디에 다 축약되어 있다. 결국 [회재집]의 묘지는 백사 이항복이 썼다. 이 묘지를 받기 위하여 일곱 번이나 왕복을 하였다고 이준의 문집인 [구암집(求庵集)] 유사(遺事)에 기록하고 있다. 서애는 또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이 쓴 발문을 도산에 보내서 [회재집]에 넣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회재집]에 박계현의 발문은 없다. <서애 유성룡의 편지>2
[만경 현령에 답장함 (수결)]
매우 그립더니 편지가 와서 얼마나 위로되고 기쁘겠습니까? 이 사람은 봄 이후로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이 겨우 숨만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알리신 일은 비록 회재 선생에게는 더하고 빠지는 것은 없습니다만 적절치 못한 것이 매우 심합니다. 역시 시운(時運)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때의 사적을 자세히 고찰할 수가 없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지금 별집(別集)에 실린 계차(啓箚) 두세 편만 봐도 역시 그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당시의 10조 계사(啓辭) 및 차자(箚子)가 괴이하기는 했습니다. 을사년 가을의 두 편 글이 모두 큰 마디가 되는 것인데 원집에 들어가지 않고 별집에 둔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아마 원집을 편집할 때에는 이러한 문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추가로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요? 몸이 아파 사람을 접견하지 않으니 바깥의 의논을 모르겠으나 들으니 이곳의 유생들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하려고 한다는데, 그곳도 이러한 논의가 있습니까? 보내온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다만 당신은 지금 관직에 있으니 이곳 시골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매번 이렇게 하니 자못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천만 정지하시고 때때로 편지 한 장으로 서로 문안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살펴주십시오. 갖추지 못합니다. 삼가 답장을 합니다. 5월 10일 하촌의 병든 늙은이 [拜復 萬頃 (수결)] 戀極得/書 慰喜可言 此間 自春後無日/不病 僅延喘息而已 示事 雖於/先生無所加損 而未安則極矣 亦恐時/運使然也 其時事迹 未得詳考/ 固爲可恨 然今据別集所載啓/箚二三篇 亦可以見其大槩也 嘗/怪當時十條啓辭及箚子 乙/巳秋二篇 皆是大節 不入於元集/中 而置之別集 何也 豈元集編時 此/等文字未及出而追得 故如此耶/ 病未接人 不知外議 似聞此處/儒生 欲詣闕陳疏 其處無此等/議耶 來貺謹領 但公方/在官 與在此村野中相贈遺不同/ 每每如此 頗覺未安 自今千萬//停止 時以一書相問足矣 惟/照不具 謹拜復 五月十日 河村老病 이 편지는 피봉에 ‘拜復 萬頃’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준이 만경 현령을 할 때에 답장을 한 것이다. 이준은 1603년(선조36)에서 1605년까지 만경 현령을 하였다. 먼저 이준이 유성룡에게 어떤 문제를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회재 선생에게 더하고 빠지고 할 것은 없지만 매우 적절치 않다고 하면서 그것도 시운(時運)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는 북인이 집권을 하고 있어서 서애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있던 시기였다. 이때에 이준이 논의한 문제는 을사사화 때에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의 처신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애는 을사년의 사적을 정확히 적시할 수는 없지만, [회재집]에 실려 있는 계사나 차자에 충분히 회재의 의사가 개진되어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추후 문묘 종사에 있어서 ‘회퇴변척(晦退辨斥)’이 나온 것도 사실은 이러한 문제였으니,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서애는 안동의 유생들이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하려는 논의가 있다고 하면서 그곳의 여론은 어떤가 묻고 있다. 안동의 유생들의 의견은 서애가 정리하여 아들 유진이 상소하려 하였으나 결국 시대적 추세가 상소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西厓先生文集]卷4 疏 晦齋辨明疏 代子袗作 竟不出 甲辰) 이준은 서애에게 편지와 함께 풍성한 선물을 보낸 모양이다. 말미에 보내온 선물을 잘 받았다고 하면서도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구분할 것을 명확히 하였다. “공은 지금 관직에 있으니 이곳 시골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매번 이렇게 하니 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천만 정지하시고 때때로 문안 편지 한 장 보내면 족할 것입니다.” 당시 명류들과 교유하려 했던 미천한 신분의 이준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가능한 한 풍성한 선물을 안기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반면 서애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시운이 무섭기도 하였겠지만 서애는 공직자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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