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경계에 선 흥양(興陽) 삼도(三島)와 1관 4포 게시기간 : 2020-10-1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10-15 11: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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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흥양 삼도 – 왜구 방어의 끝 선 일찍이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이후 왜구 방어를 논의하는 중에 영경연사 상진(尙震)이 변경의 장수들이 공을 탐내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켜 큰 바다까지 쫓아가서 스스로 실패할 것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흑산도와 삼도(三島) 밖에서는 (왜구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으면 싶습니다.”1)
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삼도는 지금의 거문도이다. 서쪽으로는 흑산도, 남쪽으로는 거문도가 왜구 방어의 외곽 한계선이란 뜻이었다. 전라남도 바닷길 좌우의 끝 지점에 있던 섬이 바로 흑산도와 거문도였다. 풍경의 기억 이번 회에서는 이 흥양현과 삼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삼도가 어디? 먼저 삼도가 어디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삼도라는 명칭이 나오는 기록은 여러 군데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삼도와 관련된 용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 거문도의 옛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현 여수시 삼산면의 유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삼도[거문도], 초도(草島), 손죽도(巽竹島) 이 세 섬을 묶어 삼도라 하기도 하였다.2) 『돌산군읍지』를 보면 삼산면(三山面)에 대해서 “군의 서쪽에 세 개의 섬이 있는데 세 개의 산이 세 개의 섬을 이루고 있어 그렇게 이름하였다.”라 하여 삼산면의 삼산의 유래가 세 개의 섬에서 왔다고 하였다.3) 이때 세 개의 섬은 곧 삼도, 초도, 손죽도를 이른다. 경우에 따라 다른 곳을 뜻하기는 하지만 삼도, 초도, 손죽도의 세 섬을 이르는 삼도나 현 거문도의 옛 이름인 삼도나 같은 해역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고지도 상에 나타나는 삼도는 대개 지금의 거문도를 지칭하고 있다. 「고초도조어금약(孤草島釣魚禁約)」과 삼도 한편, 조선 정부와 대마도주 소오 사다모리(宗貞盛) 간에 맺은 「고초도조어금약」이 이 삼도와 관련된다. 1441년(세종 23) 11월경에 맺은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 사람으로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도주(島主)의 도서(圖書)와 문인(文引) 3통을 받아서 지세포(知世浦, 거제도)에 도착하여 문인을 바치면, 만호가 문인을 다시 만들어 준다. 고초도의 정해진 곳 외에는 아무 데나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며, 고기잡이를 마치면 지세포에 돌아와서, 만호에게 문인을 돌려주고 세어(稅魚)를 바친다. 만호는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여 인(印)을 찍어 돌려줌으로써 서로 증거로 삼는다. 만약 문인이 없는 자이거나, 풍랑을 감내하지 못한다 핑계하고 몰래 무기를 가지고 변방 섬에 횡행하는 자는 적(賊)으로서 논죄한다.4)
고초도의 정해진 곳에서는 고기잡이를 허락한다는 약조였다.5) 이곳은 이미 대마도인들이 “매년 혹은 4, 50척, 혹은 7, 80척씩 고초도에 가서 고기를 낚아 자급”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여기서[대마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죽기를 무릅쓰고 저곳[고초도]에 가서 낚시질하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였다.6) 따라서 이를 막아 생기는 말썽보다는 이를 양성화해서 관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가 위와 같은 약조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초도는 어디였을까? 고초도가 어떤 섬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다. 주로 현 거문도냐 아니면 초도냐로 갈린다.7) 조어금약을 맺을 때 이를 반대하면서 “고초도는 우리나라 땅이고, 또 변경이 가까우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8) 라 하였는데 이를 보면, 변경에 있는 섬이었음은 분명하다. 경계의 끝에 있다는 점에서 삼도와 통한다. 삼도이건, 초도이건, 아니면 거문도이건 약간의 이견들은 있으나 어느 경우든 현 여수시 삼산면 일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고초도 밖 그 경계의 끝은 아무래도 현 거문도인 삼도가 될 것이다. 이곳은 예전에는 모두 흥양현에 속했었고 지금은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다. 왜구가 직도(直到)하는 곳, 삼도 당시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오도(五島)9)였는데, “평시 우리 변경에서 노략질하는 영적(零賊)들의 태반은 이 섬에 사는 자들입니다”라 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도는 대마도 오른쪽에 있는데 땅도 작고 토지도 척박하며 인호(人戶)는 1천도 못되고 백성들은 항업(恒業)이 없어서 판매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출몰하면서 노략질하는 것이 다른 왜적보다 더욱 극심하다”는 것이었다.10)
그런데 이들 왜구가 전남 연안으로 들어오는 길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오도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에 이르러 유숙(留宿)한 뒤 선산도(仙山島)를 지나 곧바로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里浦) 등처에 도달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마도에서 동북풍을 타고 연화도(蓮花島)와 욕지도(浴知島) 사이에 이르러 유숙한 뒤 곧바로 남해(南海)의 미조항(彌助項)·방답(防踏) 등처에 도달하는 길”이었다.11) 이중 후자는 왜적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익숙한 길이지만, 수로가 멀고 노출되기 쉬운 데 반해, 전자 즉 삼도 길은 눈에 띄지 않고 신속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섬 오랑캐는 해로(海路)를 익히 알고 있으므로 부산이 적과 이웃이 된다고 하지만 혹 흉적이 편리하고 빠른 길을 택하여 부산을 버리고 삼도를 거쳐 호우(湖右)로 직행하면 하룻밤이 못되어 본경(本境, 전라우수영을 뜻함)을 침범할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같이 된다면 여기에서 거느리고 있는 고군(孤軍)은 마치 당랑(蟷螂,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버티는 격”이 된다고 우려하였다.12) 말하자면 후자가 안전하지만 노출되기 쉬운 저속 수로였다면, 삼도로 직진하는 전자는 거칠기는 하지만 신속하고 은밀하게 들어올 수 있는 수로였다. 삼도 일대의 해류는 일본 고토열도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13) 『은봉전서(隱峯全書)』에 보면, 이대원이 전사한 손죽도 왜변의 사정을 전하면서 “정해년(1587) 봄 3월에 일본 적선 16척이 영남의 큰 바다[外洋] 으로부터 흥양 손죽도에 곧바로 와 닿았다[直到興陽損竹島]”14)라고 하여 삼도 길을 따라왔음을 말하고 있다. 1608년(광해 즉위) 10월 전라감사 윤안성(尹安性)의 치계에도 “본도[전라도]는 경상도와 인접해 있는데, 미조항의 앞바다에는 연화도·욕지도가 있고 발포(鉢浦)의 앞바다에는 대평두도(大平斗島)·소평두도(小平斗島)·손죽도가 있어서, 모두 해적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만일 적군이 영남은 곧장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중앙 해로를 따라 뜻밖의 허술한 지역으로 닥쳐든다면, 막느라고 바쁘게 충돌할 것입니다.”15)
라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중앙 해로가 바로 삼도로 직도하는 해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삼도는 왜구의 근거지인 오도와 직접 연결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삼도는 왜구 침입의 입구이자 출구로 경계가 되는 곳이었다. “경상도·전라도의 각 포구는 실로 왜인의 배가 닿는 첫 길”16)인데 그 중에서도 장흥·고흥·광양 3읍의 땅이 모두 바닷가에 있어 왜구가 배를 대는 곳이었다.17) 이 가운데에서도 “삼도는 곧 왜적들이 왕래하는 요충”18)이며, “매년 9월 초승이면 왜적들이 삼도에 와 정박하고 옷과 양식을 약탈”해 간다고 19) 하듯 흥양 삼도가 가장 뜨거운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고기잡이를 허락해 준 곳이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왜인들의 왕래가 잦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왜변도 자주 일어났다. 어떤 왜변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흥양 왜변의 추이 조선 초기의 왜구 역시 고려 말의 경우와 같이 주로 경상·전라도의 서남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1419년(세종 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그리고 이어서 내이포·부산포·염포 등 3포를 열고 왜관을 두었다. 계해약조(세종 25년, 1443) 체결로 대마도주에게 제한적 무역을 허락하는 회유책을 펴는 등 왜구의 활동을 제어하자, 왜침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그쳤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1510년(중종 5) 4월 삼포왜란으로 파탄을 맞았고, 다시 1512년(동 7) 8월 임신약조를 맺었지만, 후에도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던 주요 왜침으로는 ①녹도왜변(1497), ②삼포왜란(1510), ③흥양왜변(1525), ④사량진왜변(1544), ⑤을묘왜변(1555), ⑥손죽도왜변(1587) 등을 꼽는다. 이중 전라남도에서 일어난 것은 녹도왜변, 흥양왜변, 을묘왜변, 손족도왜변 등이다. 이중 을묘왜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흥양현 내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흥양 일대는 왜구와의 접점지대였다. 계해약조(1443)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흥양 일대에 나타난 왜구의 침략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0) 【표 1】 「계해약조」(1443)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흥양 일대에 나타난 왜구 침략 사례
흥양의 방어 태세- 임진왜란을 승세로 이끔
흥양현은 1441년(세종 23)에 설치되었는데, 고흥현을 중심으로 남양현·두원현·태강현·풍안현·도화현·도양현 등을 합치고 조양현을 보성군에 넘겨주어 대략 현재의 고흥군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흥양읍성은 1445년(동 27) 5월 무렵 축조되었다. 왜구의 주요 출몰지였던 흥양은 일찍부터 방어를 위한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진의 편제에는 전라좌·우수영 사이에서 이런저런 변화들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즈음해서는 좌수영에 5개의 포 즉 수군진이 속하였고 지방행정구획 단위로는 5관(순천도호부·낙안군·보성군·흥양현·광양현)을 관할하였다. 그런데 좌수영 관할 5포 중 방답진을 제외한 4개의 포가 모두 흥양현에 있었다. 1관에 4포가 있었던 셈이다.24) 흥양의 4개 포는 첨사가 주둔하는 거진(巨鎭)인 사도진을 비롯하여 만호가 지휘하는 제진(諸鎭)인 여도진·녹도진·발포진 등이었다. 이렇게 좌수영의 수군진이 흥양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흥양현에 왜적 침입 빈도가 높았고, 또 그만큼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흥양은 전라좌도의 해방(海防) 기지로서 그 중심에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군은 흥양 4포의 수군이 주력을 이루었다. 이는 또 그만큼 흥양 수군이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뜻한다. 흥양 수군들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 사정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1545년(명종 즉위) 7월 19일 황당선 3척이 흥양현 경내에 들어왔을 때 흥양현감과 경내 제진 간의 신속한 대응을 전라좌수영 관내 수군진간의 긴밀한 협력체제와 신속한 응전태세를 확인하는 사례로 들고 있다.25) 비록 신속한 응전의 모습을 보여주었을지라도 중국인을 왜인으로 오해하여 벌인 일이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는 등 미흡한 점들도 보여주었다. 또 전라좌수사 이천(李薦)의 사건이 있다. 1587년(선조 20) 6월 1일 비변사에서 좌수사 이천의 처벌을 청하였는데,26) 어찌 된 사정인지 기록들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7) 전라좌수사 이천이 수토(搜討)할 일 때문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기약한 날짜에 오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순천부사 성응길(成應吉), 보성군수 이흘(李屹), 낙안군수 김대기(金大器), 흥양현감 김의일(金毅一) 등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였는데, 보성군수 이흘이 그만 장을 맞고 즉사하였다. 이에 전라감사 한준(韓準)은 그 연유를 상부에 보고하면서 “이천의 당초 약속이 분명치 않았고 적과 대치한 것도 아닌데 멋대로 당상관에게 곤장을 쳤으며 또 큰 곤장을 남용했으니, 치죄(治罪)하여 위엄을 보이소서” 하였다. 선조는 “대장(大將)은 추고할 수 없다”고 하여 이천을 비호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흘이 곤장을 맞고 죽은 것도 사사로운 원한에 기인되었다” 라고 하여 잘못을 이천에게 돌렸다. 한준을 이어 새로 부임한 감사 윤두수(尹斗壽)는 부임하는 즉시 이천의 우후 이복윤(李福允)과 군관 김대이(金大頤)를 잡아들여 이천이 전일에 형장을 과도하게 쓴 실책의 책임을 물어 이들에게 형벌을 집행한 뒤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천의 호령이 전도되어 인심이 이반되었으므로 만약 사변이 있으면 장차 도리어 자기 편을 해칠 형세가 있으니 조정에서 처리하소서” 라고 장계하였다. 비변사도 윤두수의 편을 들어 아뢰기를, “관대하면 대중을 얻게 되고 군사의 승리는 화합에 있습니다. 좌수사 이천은 그 처사가 전도되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만약 위급함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자기편을 해칠 것이므로 하루라도 재직시킬 수 없습니다. 속히 체차함이 어떻겠습니까?”
라 하였다. 이에 선조는 “지금은 적변(賊變)이 아침 저녁으로 염려되는 때이다. 그런데 이천은 굳세고 용맹스러워 전투를 잘하니 비록 지나친 일이 혹 있더라도 이처럼 투미(偸靡, 경박하고 소신이 없음)하고 고식(姑息, 일시의 안일을 구하는)적인 시대에 사졸(士卒)들이 장수를 존경할 줄 모르는 때를 당해서는 그 죄를 깊이 따질 것 없다. 오로지 힘을 모아 일을 시키다가 너무 지나치면 경계하여 한결같이 적의 칼날을 꺾고 훈업(勳業)을 세울 것을 생각해야 된다”
하여 이천을 옹호하였다. 이렇게 엇갈리는 가운데 “(보성군수) 이흘(李屹)이 기약한 날짜에 닿지 못한 연유를 가지고 관자(關子)를 만들어 부쳤는데, 이흘이 형장(刑杖)을 맞던 날 이 관자를 바쳤으나 이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방어사의 보고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이천을 잡아와 추국한 다음 장(杖) 팔십으로 조율하고 고신(告身) 삼등을 빼앗았다. 이런 경과를 보인 이천의 사례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부사나 군수까지도 곤장을 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좌수사 이천이나, 지나친 형벌이 민심을 이반시켜 위급할 때 자기 편을 해칠 것을 염려한 전라감사 윤두수나 비변사 모두 군사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적변이 염려되는 때 기강을 세우기 위해 군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장수를 존경하고 힘을 모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선조의 입장이나 군사의 승리는 화합에 있다는 전라감사나 비변사의 입장 모두 일리 있는 주장들이었다. 이렇게 의견차로 지도부 내에서 갈등을 빚었지만,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지향이 이순신을 만나 임진왜란에서 좌수군의 승리를 이끌게 한 바탕으로 작용하였다고 믿고 싶다. 이순신 휘하 전라도수군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 흥양 출신이 가장 많았고 임란 초기 해전에서 전라좌수군 사상자 가운데 흥양 군사들이 전체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에서 이를 더욱 확인할 수 있다.28) 흥양에 4개의 포가 진을 치고 있었으니 흥양이 수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남 땅도 우리 땅’–, 진짜 수군 또 임진년 5월 4일,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 첫 출전을 결행한 배경에 흥양 출신의 군관 송희립(宋希立)의 결의와 녹도만호 정운(鄭運)의 지원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한다. 송희립이 “영남은 우리 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토벌함에 이 지역 저 지역에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놓게 되면 본도[전라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29) 이라고 의기가 복받쳐 눈물 흘리며 결의하였고, 정운 역시 “기회를 잃게 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즉각 출전을 주장하였다. 이런 의기들을 모아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좌의정 이항복이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논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중 아뢰기를 “임진왜란 이후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한번 수군에 예속되면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본토(本土)를 멀리 떠나서 한산도나 영남의 지역에 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호남의 백성들은 수군을 귀신의 굴속[鬼窟]처럼 여기고 있습니다.”30)
라고 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임란 해전의 승첩은 결국 호남지방 연해 지역민의 활동과 그들의 희생이 가져온 결과였다.31)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은 역시 흥양 수군이 맡았다. 1) 『명종실록』 권25, 명종 14년(1559) 8월 5일 1번째 기사
2) 주철희, 「고초도 위치 비정에 대한 재검토」(『한일관계사연구』41, 2012. 4), 138쪽. 3) 突山郡(朝鮮) 編, 『突山郡邑誌』(1899); 徐丙壽 編, 『廬山誌』(1899)도 같은 내용이다. 삼산면에는 모두 7개의 큰 섬 도(島)와 6개의 작은 섬 서(嶼)가 있다. 이 중 삼도, 초도, 손죽도가 중심이다. 삼도는 동도, 서도, 고도(古島)로 이루어져 있고, 초도에 부속된 섬으로 상도(庠島)가 있고, 손죽도에 부속된 섬으로는 현 소거문도로 추정되는 거문도와 평도(平島), 광초도(廣草島)가 있다, 그밖에 작은 섬 서(嶼)로는 삼도에 부속된 삼봉서(三峰嶼)와 백서(百嶼, 현 백도를 이름), 초도에 부속된 중결서(中結嶼), 손죽도에 부속된 질마서(叱馬嶼), 영만서(盈萬嶼) 등이 있다. 4) 『海東諸國記』 「朝聘應接紀」 중 「釣魚禁約」; 같은 내용이 『經國大典』 「春官志」 卷之三 「立約」에 실려 있다. 5)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11월 22일 1번째 기사. 여기서는 「고초양도(孤草兩島)조어금약」이라 하여 고도와 초도 두 섬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6)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 5월 29일 3번째 기사 7) 이 점에 대하여는 주철희, 앞 글에 상세하다. 8)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11월 21일 2번째 기사 9) 오도는 일본의 고토 열도[五島列島]를 뜻하며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에 딸린 군도이다. 10 『선조실록』 121권, 선조 33년(1600) 1월 28일 3번째 기사 11) 위와 같음;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 7월 26일 2번째 기사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12) 『선조실록』 193권, 선조 38년(1605) 11월 15일 3번째 기사 13) 주철희, 앞 글, 145쪽. 14) 安邦俊(1573~1654), 『隱峯全書』卷六, 「壬辰記事」 15) 『광해군일기』[정초본] 9권, 광해 즉위년(1608) 10월 21일 1번째 기사 16) 『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1430) 5월 28일 5번째 기사 17)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 8월 1일 2번째 기사 18) 『중종실록』 56권, 중종 21년(1526) 1월 19일 1번째 기사 19) 『중종실록』 56권, 중종 21년(1526) 2월 9일 4번째 기사 20 송은일, 「조선전기 고흥지역 水軍鎭의 설치와 水軍의 동향」(『歷史學硏究』64, 호남사학회, 2016. 11), 52쪽의 〈표 1〉을 참조하여 수정 보완하였음. 21) 『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1497) 10월 15일 4번째 기사 22) 『연산군일기』 37권, 연산 6년(1500) 3월 5일 1번째 기사 23) 『명종실록』 21권, 명종 11년(1556) 7월 8일 2번째 기사 24) 변동명, 「조선시기 흥양지역 1관 4포의 역사」(『임진왜란과 고흥』, 고흥군·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02) 참조. 25) 趙湲來, 「임진왜란과 全羅左水營」(『全羅左水營의 역사와 문화』, 순천대박물관·여수시, 1993), 29〜30쪽. 26)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6월 1일 2번째 기사 27)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7월 24일 1번째 기사; 8월 1일 2번째 기사; 8월 1일 3번째 기사; 8월 26일 2번째 기사 등 28) 趙湲來, 앞 글, 29쪽. 29) 『礪山宋氏忠剛公派世德錄』(齋洞書院, 1971), 충절편 22. “公(군관 송희립)獨慷慨涕泣曰 嶺南獨非王土耶 討賊無彼此道 先挫賊鋒 則本道亦可保也” 30) 『선조실록』 121권, 선조 33년(1600) 1월 28일 3번째 기사; 이항복, 『白沙集』 권9, 「舟師事宜啓」에 같은 내용이 있다. 31) 趙湲來, 앞 글, 32, 39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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