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제주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제주와 광주를 잇다 게시기간 : 2020-10-2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10-19 10: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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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무너졌으니 무엇을 우러러 보며, 대들보가 무너졌으니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남은 생애가 험한 길을 밤에 가는 것 같은 근심이 드는 것은 사사로운 생각일 뿐입니다만 호남 일대에서 경술을 닦는 이들은 귀감을 잃었고, 춘추를 내세우는 이들은 맹주를 잃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 창망하기만 합니다. 나의 슬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山頹安仰樑壞安放 餘生險地冥行爲愁 此猶私慮 湖南一路經術失龜鑑 春秋無主盟 四顧滄茫 孰知我悲乎1)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무너졌다는 것은 따르던 스승의 죽음을 표현한 것이다. 호남 일대 선비들의 귀감(龜鑑), 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선 의병의 대장, 춘추맹주(春秋盟主)는 다름 아닌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었다. 그리고 스승 송사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한 이는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와 광주에서 살다 간 선비 안병택(1861-1936)이었다. 호는 부해(浮海). 호 그대로 바다를 떠다닌 선비였다. 1861년 제주도 조천읍에서 안달삼(1837-1886)과 파평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안병택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78년 17세의 나이에 바다를 건너와 노사 기정진에게 인사를 드렸다. 안병택의 부친 안달삼(安達三;1837-1886)은 노사 기정진의 충직한 제자였다. 안달삼은 어려서 제주의 이한진(李漢震;1823-1881)2)에게서 글을 배웠고, 이후 장성의 기정진을 찾아가 한학을 배웠다. 안달삼이 제주로 돌아올 때 기정진은 안달삼에게 잣나무 한 그루를 주었다. 안달삼은 잣나무를 집안에 심었고, 호를 소백(小栢)이라 하였다. “안소백 선생은 호걸지사다. 노사로부터 북학을 배워 의리지설에 귀의하여 이를 후진들에게 잘 지도하였으니 그의 공은 크다.”3)고 제자 김석익은 회고했다. 1873년 최익현이 제주로 유배를 왔다. 1874년 3월 안달삼은 최익현에게 한라산 기행을 안내해 주었다. 최익현은 안달삼이 소장하던 기정진의 글을 보고선 깜짝 놀랐다. “정밀하게 이치를 보고 간절하게 일을 논하였으니 참으로 고금에 뛰어난 호걸이며, 세상을 건질 큰 선비이다.”고 면암은 평했다.4) 이후 1875년 유배가 풀리자 면암은 돌아가는 길에 장성에 들려 기정진을 배알하게 된다. 그 시절 장성은 성리학의 성지였다. 이때 최익현은 노사의 손자 기우만과도 관계를 맺었다. 안병택의 나이 25세 되던 1886년 부친 안달삼이 타계하였다. 안병택은 아버지 안달삼의 유명에 따라, 1893년 거처를 장성으로 옮겨, 송사 기우만의 제자가 되었다. 안병택이 바다를 건너와 처음 거처했던 곳은 순창군 복흥산 근처였다. 복흥산 인근 조동(槽洞) 마을은 기정진의 탄생지이며, 의병장 기삼연이 금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은신하였던 곳이다. 기우만의 배려에 의해 안병택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산을 정리하고 바다 건너 타향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돛배에 의지하여 제주해협의 거친 파도를 헤쳐 간 유학길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해부터 뜻을 펴지 못하다가 삼성산 정상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모든 생활을 구름과 안개와 접해서 하고 있으니 춘추를 아무데서나 읽을 수 있습니다.”5) 1896년 기우만은 의병활동이 좌절되자 장성 삼성산에 삼산재를 짓고 은둔하며 강학을 하였는데 안병택이 송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은 대체로 삼산재에서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봄에 광주의 장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동남쪽은 넓은 들이 트여 막힘이 없습니다. 고요한 밤에는 청풍명월에 정신이 한층 맑아집니다.”6) 1898년 스승의 지시에 따라 안병택은 광주 장덕동으로 이사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안병택이 장덕동으로 이사한 것은 이희용(1853-1931)의 후원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부해는 약 30여 년 장덕리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현재 장덕리는 아파트로 둘러 싸여 있지만 아직도 ‘서당골’이라 불린다. 《부해문집》엔 일경의 감시 하에서 긴장된 삶을 살아간 족적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 1898년 스승 송사에게 보내는 글에서 “저는 왜경(倭警)의 나타나는 일을 겨우 면하고 있어 다행입니다.”7)라고 썼다. 스승 송사는 1896년 거의한 호남의병의 총수였으니 일경은 송사의 제자들까지 감시하였던 것이다. 1899년 이락 선생에게 회답하는 글에서 “집안에 왜경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위로될 따름입니다.”8)라고 썼으며, 1900년 이응로에게 회담하는 글에서 “시국의 위태로움이 끝에 이르고 중생들은 홀로 외나무다리를 걷는 듯합니다. 포악한 위압이 흉흉하여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쉽지 않아 근심이 백배나 됩니다”9)라 하였다. 특히 일경은 안병택을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였으니 안병택에게 배움을 구하러 오는 제자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이때 호남 전역에서 제자들이 부해를 찾아왔는데 그중에는 제주도 출신의 제자들도 많았다. 기정진-기우만의 학통이 바다 건너 제주도로 전파된 데에는 그 중심에 부해가 있었다. 의병장 기우만의 제자답게, 안병택은 일제강점기 제주의 지식인들에게 항일운동을 고취한 제주의 정신적 지주였다. 《부해문집》은 스승 송사와 제주의 대표적인 의병장 고사훈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오랑캐들이 떠드는 세상으로 모두가 휩쓸려 가고 있는데, 경지(景志)는 세상의 이해득실을 묻지 않으니 이것이 경지가 우리의 무리가 되는 이유입니다.”10) 경지(景志)는 한말 제주 의병장 고사훈(高仕訓;1871-1910)의 자(字)이다. 고사훈은 어려서 부해의 아버지 안달삼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후에 광주에 건너가 부해에게 한학을 배웠다. 부해를 통해 고사훈은 기우만을 만난다. 1908년 고사훈은 장성 의병장 기삼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밀리 무기를 제조하였고, 1909년 제주에서 300명의 의병을 결집, 의병장에 추대된다. 스승 기우만으로부터 전해 받은 안병택의 항일정서는 제주 의병장 고사훈에게 전해졌다. 이때 남긴 시를 읽자.
去歲는 기우만이 곡성 도통사에서 의거를 모의했던 1906년이었을 것이다. 이후 고사훈은 안병택의 곁을 떠나 제주로 들어간 것이리라. 枳城은 제주의 별칭이다. 고사훈이 의병 항쟁을 준비한 곳은 고향 제주의 광양(廣壤)이었다. 잣나무는 노사 기정진이 제주로 돌아가는 제자 안달삼에게 준 나무인데, 항일의 꿋꿋한 기백을 상징한다. 또 다른 선비가 있었다. 김석익(金錫翼;1885-1956)은 광주로 건너와 안병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제자인데, 1905년 송사 기우만이 작성한 구국 격문을 제주도에 유포한 인물이다. 형 김석윤은 총을 들었고, 동생 김석익은 붓을 들었다. 제주도민의 민족혼을 고취하기 위해 김석인은 제주도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김석익의『탐라기년(耽羅紀年)』에 안병택은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서문에서 부해는 국권을 잃은 시대의 아픔을 ‘滄桑餘悲’라고 표현하였다. 《부해문집2》에는 김석익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왜경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요즈음 외보를 접하니 괴질이 창궐하고 있다 하여 두렵습니다.”12) 안병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또 한 명의 제자가 눈에 띈다. 안세훈(安世勳;1893∼1953년)이다. 그 역시 광주에 와 안병택에게 한학을 배웠다. 안세훈의 간략한 연보만 보아도 그가 제주의 항일독립운동을 대표한 인물이었으며, 해방 후 민족사의 비극 그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을 친 인물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926년 만주 간도에서 간도간민교육연구회 상임서기를 맡아 계몽운동을 하다
1935년 제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 1942년 좌익 사상과 반전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검거, 징역 2년 선고받다 1945년 제주도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다 1947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을 맡다 3.1절 기념 시위 사건 참여,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체포되다 안병택은 총을 들지 않았으나, 그의 항일 정신은 제자들을 통해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의 의병장,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안병택의 제자였다. 1925년 안병택은 64세 되던 해 목포로 내려가 한약방을 하였다. 계속된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1936년 76세를 일기로 광주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남긴 글 ‘조용히 살며’(幽居賦)를 들여다보자. 조용히 살며 幽居賦
나 우두커니 지난날 생각해보니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라 분전(墳典)13)을 조금 섭렵했으나 슬프게도 영락하였네 緬余昔承先訓兮 粗涉獵於墳典慨淪落而替微兮 춥고 배고픔을 두려워하며 바람 맞은 쑥 같이 굴러다니다, 서석산 서쪽 들판의 후미지고 고요한 곳에 머물며 살아가려 하니 사람들은 학문만 하며 살아가기 어렵다 사람들은 말렸네 怕凍餓而栖屑14)蓬逐風而飄轉兮 届瑞石之郊野而僻而窈窕兮 衆挽余以學斅固缺陷之世界兮 사방을 둘러보아도 근심스럽기만 하는데, 이 산이 고요하고 예스러워 편안을 누릴 수 있을 듯하였네 瞻四方而蹙蹙兮 眷玆山之靜古栖安於一枝兮 대지팡이 끌며 소요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노래하고 주위가 비단 같이 둘러진 곳에서 아침 이슬에 채소를 캐네 曳竹筇而逍遙日杉松與蓧篁兮 繄左列而右遶朝鋤采於露畦兮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천리 바다를 건너왔고, 선생께서는 나에게 광주에 살라고 하셨으니 고요하고 넓고 풍속이 순후하여 시와 예, 밭 갈고 나무함에 이곳이 충분하다네. 遵奉先志千里渡兮 師門指示石之村兮 窈窕閒曠俗甚淳兮 詩禮耕樵足於是兮15) 1) 答 金時宇, 丁巳 三月. 안병택, 《부해문집2》, 오문복. 2009. 310쪽.
2) 추사 김정희 제자. 부해는 <매계 이한진 선생 행장>을 작성하였다. 충효사상을 일깨워주는 명문이라 평가받는다. 3) 《부해문집2》,1쪽. 4) 《勉菴先生文集》 권6, <上奇蘆沙正鎭>. <노사학의 제주지역 전파와 부해 안병택의 역할>, 권수용. 재인용. 56쪽. 5) 《부해문집2》, 57쪽. 6) 《부해문집2》, 57쪽. 7) 《부해문집2》, 55쪽. 8) 《부해문집2》, 87쪽. 9) 《부해문집2》, 110쪽. 10) 《부해문집2》, 147쪽. 11) 《부해문집1》<寄贈高斯文景志>, 논문집, <한말의 성리학자 부해 안병택 문집 연구>,111쪽. 12) 《부해문집2》, 389쪽. 13) 三墳五典의 준말. 성현의 책. 14) 바빠 편치 않음 15) 논문집, <한말의 성리학자 부해 안병택 문집 연구>, 43-44쪽. 글쓴이 황광우 작가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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