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실비내리는 봄날, 광주 선비들의 시회 - 1568년 부용정 게시기간 : 2020-10-2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10-22 14:0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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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실비가 내린다. 옻돌마을의 부용정에 모인 선비들. 중년의 한 사내가 읍을 하면서 깍듯하게 예를 차린다. 관복을 차려 입은 그 어른, 결기있는 한마디. “큰 일 치르느라 애썼네. 어버이 여윈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잘 추스리시게. 이젠 예전의 응어리는 풀렸을 터이고 큰 일을 도모하게나.” “아. 고맙습니다. 선고장 일이야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전 가르침대로 심기일전 하겠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다시 읍을 한다. 그 옆 젊은이 또한 예를 갖춘다. 다소 주저하면서 그 어른과 중년 선비를 번갈아 보면서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부용정의 내력은 어찌되는가요. 관찰사공이 정자를 지어 강학과 교류를 하면서 향약을 실시하여 향풍을 진작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새겨 보고 싶습니다.” “알았네. 나도 기록으로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네. 그런데 관찰사공이 세상을 뜬지도 벌써 150년이 흘렀으니 갈수록 알기 어려울 거여. 문과에서 이름을 떨친 이순과 젊은 학사가 함께 정리하게나.” 아쉬움 겸 당부 겸 말을 하다가 부용정 저 멀리 이제 막 푸른 잎이 돋아나고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이윽고 하나씩 풀어 나간다. 부용정은 원래 김문발 선생이 건립했다는 것부터 시작이다. 김문발은 1418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 이전 시기, 벼슬살이로 보아 1411~1417년 사이일 것으로 보고 있다. 시회를 열다 -송천 양응정, 제봉 고경명, 명암 김형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1568년 2월 17일 양력으로 3월 중순 봄날 부용정을 찾은 선비들. 나이든 선비는 쉰 살 노년기에 접어든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 중종 14~선조 14). 당시 광주 목사이다. 중년의 선비는 서른여섯의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 중종 28~선조 25), 이순(而順)은 고경명의 자(字)이다. 젊은 학사는 고경명의 문인 명암 김형(鳴巖 金迥). 1543년생이니 스물여섯 살 나이. 이밖에도 옻돌마을 일원의 광산김씨 집안사람들과 근동의 선비들이 함께 자리 했다. 전라도 광주목 칠석면 하칠석리 옻돌마을. 양응정은 목사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었지만, 광주 근동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문인학자. 고경명 등이 제자로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앞에서 “큰 일을 치르느라 애썼다”고 한 것은 고경명의 부친 고맹영이 예순 네 살로 세상을 떠난 뒤 3년상을 그해 1월에 마쳤던 것. “응어리”란 1563년(명종 18)의 일을 언급한 것. 1563년 8월 12일 홍문과 교리로 승급되었다가 가을에는 전적으로 좌천되고 울산군수로 나가도록 했는데, 당로자에게 꺼림을 받게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 와서 독서와 산수에 낙을 붙이고 있었던 것. 젊은 학사 명암 김형도 문장에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광주목지(光州牧誌)』(규10800) 고적조에 “열 길 되는 바위를 보고 시를 읊으니 바위가 궁궁하고 울어 궁암 또는 명암이라 했다”고 한다.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하겠다. 부용정에 걸려 있는 시판 가운데 송천 양응정, 태헌 고경명, 명암 김형의 시 끝에는 ‘무진춘(戊辰春)’ 연기가 있다. 양응정과 고명명의 재세기간과 맞춰보니 1568년(선조 1)이다. 이 해에 고경명은 부친 삼년상을 마쳤고, 봄이라 했으니 어쩌면 이월 중정(中丁)에 시회(詩會)를 했을 법하다. 광주목사 양응정은 시찰 겸 참관을 했을 터이고. 그해 이월 중정은 음력 2월 17일. 양력으로 치자면 3월 중순이다. 향약의 시행이나 원사 제향도 이월 중정과 팔월 중정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중정일로 맞춰 서사(敍事)로 풀어 본 것이다. 이윽고 이들은 담소를 하면서 시를 짓는다. 먼저 양응정이 한 수를 읊는다.
부용정의 현판에는 부용정운(芙蓉亭韻)이라 새겼다. 송천유집(松川遺集)에는 제칠석모정(題漆石茅亭)이라 하였다. ‘모정’ 표기로 보아 목조 와가는 나중일 터. 정자 이름도 표기되지 않았다. 세주로 “정자는 광주에 있는데 선생은 이때 광주목사가 되었다(亭在光州 先生時爲牧使)”라 하여 광주목사 때 지은 시이다. 정무를 미룰 수 없어 느지막이 나서 읊조리다 아침나절 광주목의 동헌 하모정에서 정무를 볼 때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봄철의 비는 풍년이 올 징조라 했던가. 부용정에서 만나기로 나들이 약속은 했지만 일은 미룰 수 없지. 몇 가지 처결을 하고 지시를 한다. 이윽고 신시. 길을 나선다. 광리문을 지나 서남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금당산을 바라보고 향등을 지나 옻돌마을에 다다른다. 아끼던 제자 이순도 보이고 그 옆의 젊은이는 총기가 넘친다.
고경명의 차운이다. 광주목사로서 정무 처리 문서가 쌓여 설켜 있는데 이월 중정일 잊지 않고 나들이 하셔서 흥겨운 자리가 되어 그 고마움을 애둘러 표현한 것. 단순히 술 한 잔 하면서 머무르려 한 것은 아니고 오는 길에 꽃향기를 즐기다가 더디었을 뿐이라 하였다. 이어 명암 김형도 한 수를 읊는다. 가르쳐 준 선생님과 그 선생님의 은사. 어려운 자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 없으니 시를 한수 올린다. 하여 복보(伏步)라 제하여 삼가함을 나타내고 있다.
양응정을 시선으로 추앙한 듯싶다. 자기가 배운 태헌[고경명]을 가르쳤으니 얼마나 영광일 것인가. 뵙고 싶고 배우고자 하여 언젠가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지 기다리다가 머리가 희어질 정도. 그 큰 문향을 듣기만하고도 즐거웠는데 오늘에야 뵐 수 있다니. 지방관에 나서신 뒤로는 소식 듣기 어렵더니 칠석 모정에서 스승 고경명을 모시고 뵈올 수 있으 더디 오신들 어쩌랴. 부용정 시판으로 풀어 본 450여년전 이야기 광주 칠석동 부용정 시판을 풀어 서사(敍事)로 엮어 보았다. 이곳은 고싸움놀이로 유명하다. 부용정은 향약 시행을 처음 한 곳으로 나온다. 조선초기 향약 보급운동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100여년 전에 향촌 자치의 규약을 실행했다니 광주 선현들의 공동체 정신의 역사성을 나타내 준다. 부용정 현장을 가면 현판이 보인다. 일필휘지로 행서와 초서를 써 놓은지라 눈만 껌벅일 뿐이다. 해설문을 가까이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누군가 설명을 해주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그러한 뜻을 담아서 낸 『부용정·양과동정』(광주문화재단 누정총서9, 심미안, 2018)에서 간추린 것이다. 현판 내용을 검토하면서 송천 양응정, 태헌 고경명, 명암 김형 세분의 시판 끝의 “무진춘(戊辰春)” 간지를 세분의 활동기간에 맞춰서 그 시기 전후 사회 사정과 향촌 활동, 지명 들을 풀어 엮어 본 것이다. 하여 1568년 부용정에서 열린 시회로 짐작하여 형상화 해 본 것. “송천-태헌-명암”과 “무진춘”. 몇 글자이지만 세밀히 보고 주변을 살피니 450여년 전 “칠석 모정-부용정”의 현장 이야기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옻돌마을의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이다. 1970년 처음 지정할 때 “고싸움놀이”로 문화재명을 명명했다. 그런데 각 지역마다 형태와 규모가 유사한 다양한 고싸움놀이로 인해 지정 명칭상 변별성이 없어 전승지역을 병기한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로 변경하였다. 2005년의 일이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고싸움놀이를 하는데 그 앞날 당제를 지낸다. 신체는 은행나이다. 700여년 마을을 굽어 살피고 있다. 197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칠석동 은행나무 . 다른 지역의 천연기념물에 버금간다. 부용정(芙蓉亭)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이다. 1990년에 지정되었다. 향약의 연원을 살필 수 있고 민속, 무형, 생활사 문화공간인 부용정. 그 역사문화 특징에 비기면 지정격을 올려야하지 않을까.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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