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근대적 불교 교육기관 명진학교(明進學校)와 지방학림(地方學林) 게시기간 : 2020-10-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10-26 10: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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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 근대적 교육기관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 1876년 개항 이후 불교계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더불어 그들의 선진문물의 전래에 직면하여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불교계는 이에 대응하고자 전국적인 사찰조직과 그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하여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寺院敎育制度)를 근대적으로 여러 차례 개편하였으며, 또 다양한 교육기관을 설치 운영하여 명실 공히 민족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항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계는 불리한 여건 속에 놓여 있었다. 외세에 의존하던 조선정부는 천주교·기독교·일본불교에 대해서는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불교만은 배타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1884년 이후 기독교는 근대식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1909년까지 신학교, 중학교, 소학교, 병원 등을 갖추어 학생 수만도 21,131명을 헤아려 그 교세를 더욱 확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그 침략의 전초로 일본의 각 불교종파를 파견하여 각지에 사찰을 세우고 그들 종지에 따른 각급 불교학교를 세워 일본인 뿐만 아니라 조선인 학생들을 포섭하여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의 오쿠무라(奧村圓心)과 진종본원사(眞宗本願寺)의 오타니(大谷尊寶), 일련종(日蓮宗)의 사노(佐野前勵), 정토종(淨土宗)의 이노우에(井上玄眞)의 활동이 두드러져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6년 불교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봉원사(奉元寺)의 이보담(李寶潭), 화계사(華溪寺)의 홍월초(洪月初) 등은 불교재건을 위해서는 신학문(新學問)을 연구할 근대식 학교설치가 급선무라고 강조하여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10일 원흥사(元興寺)에 최초의 근대식 불교고등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 설립을 결의하게 되었다. 학교 경영은 불교연구회가 맡고, 그 재정은 전국의 중·대법산(大·中法山) 사찰에서 담당하기로 하였으며 학생 모집은 각 수사찰(首寺刹)에서 2명씩 추천하되 연령은 13세까지로 하고 지, 필, 묵, 서책 등은 불교연구회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명진학교는 5월 8일에 정식 개교를 하게 되었다. 학제는 수업연한은 2개년으로 하되, 당분간 입학자의 학력에 응하여 필요한 학과를 교수할 보조과(1년~3개월)을 부설하였으며, 정원은 각 학년 35명(총 70명)으로 정하고, 보조과는 20명으로 하였다. 입학자격은 대교과를 수료한 자로 하되 보조과는 사교과 수료자로서 하였다. 1909년에는 수업연한이 1년 더 연장되고, 부속기관으로 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교사는 원흥사를 사용하여 교실과 강당, 장서당, 기숙사, 그리고 운동장 등을 갖추어 당시로서는 손색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교과과정은 신학문을 교육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배정된 교과목중 70% 이상이 근대학문의 기초과목인 역사 및 지리, 이과(박물, 생물대요), 산술(농업초보, 측량, 법제, 경제대요 등)이었으며, 나머지 불교학은 대교, 수의과에 해당하는 과목으로서, 이는 오늘날의 대학원 수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조과는 오직 측량과 일어 두 과목만 이수하도록 하였다. 직제(職制)는 찬성장(贊成長), 찬성원(贊成員), 교장(校長), 학감(學監), 찰감(察監), 서기(書記) 각 1명과 강사들로 구성되었다. 찬성장에는 홍월초洪月初), 찬성원에는 신해영(申海永) 등이 추대되고 교장에는 이보담(李寶潭, 初代·3代), 이능화(李能和, 2代), 이해선(李海先, 4代)이 차례로 임명되고 강사는 교육계 원로로서 이민설(李敏設), 진진응(陳雲應), 박동진(朴東鎭), 이명칠(李命七) (이상 상임), 이능화(李能和), 신해영(申海永), 현채(玄采), 그리고 특강에는 장지연(張志淵), 윤효정(尹孝貞) 등이 담당하였다. 학생들은 학칙과 승칙을 준수함은 물론 요사에 들어가 밤낮으로 학업에 정진하고 월종, 학기, 학년시험을 치루어 이 관문을 통과하여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명진학교 설림 및 그 운영에 대해 당시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명진학교는 본래의 교육기능 이외에 불교계가 당면한 중요문제(사찰의 토지확보 등) 해결에 큰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명진학교를 보다 근대적인 학교 곧 전문학교로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에 이를 겨우 불교사범학교로 개편한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 요인에는 학교경영을 둘러싼 불교계의 대립(불교연구회, 원융종, 임제종, 선교양종)과 경영진의 무능(불교연구회, 원융종), 일제통감부와 일본불교 각 종파(정토종, 진언종 등)의 간섭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그러나 졸업생(보조과 출신이 뛰어남)들은 근대 불교계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어 큰 영향을 미치었으며, 사회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 가운데 한용운은 보조과에서 일어과정을 단기에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신문물을 접하고, 귀국한 후 모교 부설의 명진학교측량강습소 소장에 등용되어 재직하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표하여 불교 근대화를 위한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특히 「논승려지교육(論僧侶之敎育)」은 승려교육에 있어 보통교육, 사범교육, 외국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불교의 개혁안」에서는 교과서의 개편과 교수법의 과학화를 역설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는 중앙학림의 강사로서 3·1운동 등 항일투쟁을 지도하였으며, 『불교대전』, 『독립선언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등의 저서와 문학작품 및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정치, 사상, 교육, 종교, 문학, 학술 등 각 방면에서 조선 근대사회 발전에 불후의 업적을 남기었다. 이 밖의 졸업생들도 불교, 교육, 사회문화면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친일매종파로 전락하는 자도 많았다. 명진학교 설치의 의의는 첫째, 구한말 불교계가 자각하여 세운 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이었다는 것과 둘째, 그 기초학교를 전국에 20여개 설치하고 또한 종래의 강원을 이에 연결시켜 명실 공히 중앙불교교육기관으로서 질적으로도 근대민족교육에 공헌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불교계를 이끈 생도적 인물을 배양하여 그 전통을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구한말 불교계는 전국에 근대적 학교를 설치하여 근대교육사에 큰 업적을 남기었다. 불교계 교육기관은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으로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 등의 간교한 식민지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자체 분열도 초래하고 심지어는 일본불교에 맹종하려는 친일분자까지 나와 불교교육체제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화엄사(華嚴寺) 출신의 진진응(陳震應), 선운사의 박한영(朴漢永) 등의 불교지도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근대화작업을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야 한용운(韓龍雲)은 승려교육의 과학적 체계화와 사범교육 등을 강조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마침내 1910년 3월에 일본 전문학교 학제를 참고하여 인가신청을 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사범학교령을 적용 불교사범으로 인가하였다. 2. 전남지역 지방학림(地方學林)의 설립. 그 후 불교사범학교는 1914년에 불교고등강숙으로 격하되고 1915년에는 선교양종 30본산(本山) 결의로 전국 사찰에서 4,092원~4,502원을 출자하여 중앙에 전문학교 정도인 중앙학림, 그리고 지방에는 보통학교, 중학정도인 지방학림을 설치함으로써 보통학교-지방학림-중앙학림에 이르는 3단계적인 근대적 제도 곧 학림체제를 확립하고 중앙학림에는 재래식 교육기관인 전문강원의 사교과 출신자를 예과에 입학하게 하여 교육체제를 일원화 하였다. 이 학림체제로서 전국사찰 약 900여개를 기반으로 중앙학림 1개, 지방학림(1928년에 고등보통학교로 개편) 10개, 보통학교 15개와 전문강원 47개, 이밖에 선원 72개를 갖추게 되었다. 1913년 당시 전남 각본사별 승려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出典:『韓國近世佛敎百年史』第2卷 1. 禪房編年 54쪽) 이 표에서 보여주듯이 송광사본말사 승니 수가 297인으로 가장 많았고, 대흥사본말사 승니수가 160인으로 두 번째였으며, 선암사본말사와 백양사본말사의 승니 수가 같은 140인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선당(禪堂, 선방)은 한국불교 전통적인 수행인 참선하는 공간인데, 1913年 당시 전남 각본사의 선학당 수는 아래 표와 같다.
(出典: 『韓國近世佛敎百年史』 第2卷 1. 禪房編年 5-6쪽) 위의 표에서 보여주듯이 백양사본말사와 대흥사본말사에 각각 3곳에 선당(禪堂)이 있었고, 선암사본말사와 송광사본말사·화엄사본말사에 각각 2개의 선당(禪堂)이 있었다.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이 반포된 이래 30본산(本山)에서 다투어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각본산(各本山)에서 단독 혹은 연합으로 중등정도의 교육기관 즉 지방학림을 설립하게 되었다. 전남지방의 본사 사찰에서는 백양사 지방학림(白羊寺 地方學林), 송광사 지방학림(松廣寺 地方學林), 대흥사 지방학림(大興寺 地方學林), 선암사 지방학림(仙岩寺 地方學林)을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학교 이름은 대흥사 보통학교(大興寺 普通學校, 海南 大興寺), 광성의숙(廣城義塾, 長城 白羊寺), 승선학교(昇仙學校, 順天 仙岩寺), 신명학교(新明學校, 求禮 華嚴寺)였다. 사찰에서는 이밖에 일요학교, 강습소, 야학활동을 하는 곳도 있었다. 1913년 전남의 4본사 보통학교 및 전문강원 수는 다음과 같다.
(出典: 『海東佛報』 제4호 81쪽) 송광사·선암사·백양사·대흥사의 4본사에 보통학교와 전문강원이 설립되어 기초교육과 불경 학습 등 승려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선암사본말사에는 보통학교와 전문강원이 각각 두 곳에 설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1917년 당시 전남 본말사별 학생 수는 아래와 같다.
(출전: 『朝鮮佛敎叢報』 제2호) 송광사본말사와 선암사본말사가 4본사 가운데 지방학림·불교전문·보통학교의 학생 수가 많은 편이었다. 1917년 당시 전남 본말사별 승려 및 신도 수는 다음과 같다.
(출전: 『朝鮮佛敎叢報』 제8호 72쪽)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본말사가 303인으로 승려가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선암사본말사가 285인으로 잇고 있었다. 남녀 신도 수는 송광사 본말사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나라가 망하고 국토가 유린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승가교육은 선방(禪房)과 강원(講院)을 통해 전통불교를 수호하려는 노력과 근대적 지식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 앞으로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교육 문제는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는 도제양성과 청신남녀의 대중교화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불교종단 존립의 근간이 되고 있다. 또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소위 승단정화기를 거치면서 흐트러진 승풍을 바로잡는 정법의 당간을 세우는 일로서 종단 차원에서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없다고 본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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