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볼모가 되었던 거문도 ① 게시기간 : 2020-10-31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10-2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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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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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바닷길 5대 항로 중 하나 우리나라의 바닷길 중 큰 바다를 건너야 하는 곳으로 다섯 항로가 있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여객선 결항이 1년에 3개월이 넘을 정도로 빈발하고, 여객선의 안전성 문제와 과도하게 비싼 여객선 요금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여객선 공영제의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항로가 전국에 다섯 군데가 있다. 울릉도, 거문도, 추자도, 흑산도, 백령도가 바로 그곳들이다. 그만큼 험한 바닷길을 거쳐야 하며, 큰 바다 즉 외양(外洋)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섬들이다. 그래서 예부터 먼 바다로 나가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이중 전라남도에 속하는 곳이 흑산도와 거문도이다. 이번에는 먼 바닷길, 5대 항로 중 하나인 거문도에 얽힌 사연을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거문도(巨文島)의 원래 이름은 삼도(三島)였다. 거문도란 이름은 사실 다른 곳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삼도가 거문도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른바 ‘거문도 사건’으로 삼도가 그레이트 게임의 볼모가 되었던 사연 때문이다. 거문도 사건은 국제관계와 얽혀 복잡하다. 현재와 비교해서도 교훈 삼을 만한 사건이었다.
삼도가 거문도로 이름이 바뀐 내력 『동아일보』의 연재물 「도서순례(島嶼巡禮)」(李益相) 중 1928년 7월 24일자 「거문도 방면」(7)을 보면, “能文之士(능문지사) 輩出(배출)로 「巨文(거문)」이라 島名(도명) 改稱(개칭)”이라 하여 그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문(巨文)의 유래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섬을 처음 부르기를 삼도(三島)라 하였더니 지금으로부터 삼십오년 전에 중원의 천지에 명성을 휘날리고 신흥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청국의 남북양함대(南北洋艦隊)를 한마디 호령으로 좌우하던 당시 수사제독(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이 군함 8척을 거느리고 이 섬에 이르렀다. 육지가 그리운 그들은 섬 안을 시찰도 하고 이 지방사람과 접촉도 하였다. 그러나 도민(島民)과 언어를 상통할 수 없어 필담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넓은 바다 외로운 섬 중에 어찌 필담할 정도의 글이 있으랴 하였으나 의외로 도민의 다수가 필담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중에는 웅문(雄文)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곱은 혀가 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삼도라 할 것 없이 거문으로 고쳐 부르라 하여 그때부터 거문도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거문도 사건 조사차 방문한 청나라 수사제독 정여창이 섬 주민들과 필담을 나누면서 그들의 능력을 보고 “삼도라 할 것 없이 거문으로 고쳐 부르라” 하여 거문도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였다. ‘거문’이란 말 그대로 큰 문장가들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自故(자고)로 人文發達(인문발달)”이란 제목 하에 ‘거유문사(巨儒文士)’로 칭해지던 귤은(橘隱) 김류(金瀏, 1814〜1884)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색이 찬란한 기로 장식한 군함 안에 성대히 잔치를 베풀고 섬의 선비를 초청하여 글로써 서로 회답할 때에 이 섬에서 오늘까지 섬사람에게 숭배를 받아오는 당시 삼도의 거벽(巨擘)이오 웅문(雄文)인 김귤은(金橘隱)이 정씨[정여창]의 막하 팽승무(彭繩武)와 회답한 글은 한학자간에도 암시가 깊고 상징(象徵)이 미묘하다 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된다.”
섬 주민들에게 글을 깨우치게 한 대표적 인사로는 귤은 김류를 예로 들고 있다. 다만 귤은은 한 해 전에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 팽승무와 필담을 나눈 섬사람은 귤은은 아니었고 그의 제자였을 것으로 보인다.1) 그런데 과연 거문도란 이름이 이때 처음 나왔을까? 그렇지는 않다. 거문도란 이름은 그전에도 보인다. 1716년(숙종 42) 5월 『승정원일기』에 처음으로 보인다. 즉 박동채(朴東采)를 거문도 첨사에 임명한다는 기사이고,2) 이어서 6월 2일에 임지로 출발하였다[下直]고 나온다.3) 『정조실록』에도 호남암행어사 정만석이 올린 별단에 “애도(艾島)·사량도(四梁島)·초도(草島)·죽도(竹島)·지오도(之五島)·평도(平島)·거문도(巨文島)·적이도(赤爾島)는 바로 좌수영의 둔전이 있는 곳”이라 하여 거문도를 꼽고 있다.4) 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32) 흥양현조에 보면, 초도, 시산도(時山島), 삼도부터 시작하여 여러 섬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에 삼도와 별개로 거문도가 나온다. 옛 지도에 삼도와 거문도가 함께 있는 것들은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거문도란 이름의 섬은 거문도 사건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원래 거문도는 어디로 갔을까? 삼산면 손죽도 옆에 보면 소거문도란 이름이 보인다. 옛 지도들에 나타난 거문도는 그 위치가 대개 현 소거문도에 비정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거문도란 이름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거문도 사건 이후 삼도를 거문도로 부르면서 원 거문도는 소거문도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 북양 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거문도 사건과 관련하여 보내온 편지에,
“귀국의 제주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 섬이라고 부릅니다.”
라고 하였다. 현 거문도를 중국에서는 거마도(巨磨島)로 알고 있었고,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거문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거문도란 명칭이 거문도 사건 이후 처음 생긴 것은 아닌데, 능문지사가 있어 거문이라 개칭했다는 인식, 정여창이 지어준 이름이란 설이 어느 틈엔가 정설로 자리 잡아갔던 것으로 보인다.5) 자, 그러면 이제부터 삼도란 옛 이름을 거문도로 바꾸게 했던 거문도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거문도 사건이란? 1885년(고종 22) 3월 1일(양력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5일(양력 2월 27일)까지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한 사건을 말한다.6) 3월 1일에 영국의 중국 파견 함대사령관 해군 중장 도우웰(Dowell, Sir William Montague)은 해군대신의 명에 따라 아가멤논 Agamemnon, 페가서스 Pegasus, 파이어브랜드 Firebrand 호 등의 전함을 동원하여 거문도[Port Hamilton]를 불법으로 점거하였다. 영국 정부에서는 3월 10일 대영서리흠차대신(大英署理欽差大臣) 오코너(N. R. O’Conor)를 통해 독판교섭통상사무대신(督辦交涉通商事務大臣) 김윤식(金允植)에게 점령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본 대신은 지금 본국에서 온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뜻밖의 일에 대응 방비하기 위하여 본국의 수사관(水師官)에게 대조선국 남쪽의 작은 섬인 영어로 해밀톤[哈米𥫱 Port Hamilton]이라고 하는 섬을 잠시 지키고 있도록[暫行居守屬] 하였으며, 대조선국 정부에 비밀리에 이러한 내용을 통지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상의 사유로 문구를 갖추어 통지합니다.”
라 하였다. 이미 점령한 지 열흘이나 지난 때였다. 영국 정부는 청이나 일본에는 그 전에 벌써 알렸다. 즉 점령 다음 날인 3월 2일에 런던 주재 청국 공사에게 알렸고, 그 다음 날인 3일에는 청과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공사들이 각각 주재국 정부에 거문도 점령을 통보했다. 정작 당사국인 조선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은 3월 10일이었다. 그만큼 조선 정부는 당사자임에도 후순위로 밀려있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때 조선의 국제적 위상이었다. 거문도를 찾은 제국주의 국가들 영국이 거문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842년 남경조약으로 중국의 5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후 영국정부는 항구 부근의 수로를 측량하기 위해 군함을 동아시아 해역에 파견했다. 측량 전문가인 함장 벨처(Edward Belcher, 1799~1877)가 이끄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H.M.S. Samarang)는 1843년 1월 13일(양력) 영국을 출발하여 지나는 여러 곳의 해역들을 측량하였다. 거문도에 도착한 것은 1845년 7월 16일이었다. 이때 함장은 이 섬에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 ‘Port Hamilt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7) 영국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문도를 찾았고, 또 관심을 표명했다. 1882년에는 조선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교섭 중이던 영국의 전권대표 윌레스(G. J. Willes) 해군 중장이 ‘해밀턴’ 항을 조차해달라고 요구했다. 1884년 12월(양력)에는 동아시아 주둔 영국 해군의 멀린(Merlin)호가 5일간 조사해 가기도 하였다. 그만큼 거문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 거문도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1840년대에 프랑스 함대가 왔고, 1850년대에는 러시아 함선도 왔다. 러시아의 푸챠친(E.V. Putyatin, 1803~1883) 해군 중장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함대의 집결 장소로 조선의 해밀턴 항구를 지정하고, 팔라다호, 보스토크호, 멘시코프공호로 1854년 4월 2일(양력) 거문도에 도착하여 6일간 머물며 정보를 수집하여갔다.9) 거문도는 그 위치와 항구로서의 자연조건 때문에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H.H. Bell)이 해군 장관 웰즈(Gideon Welles)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때 슈펠트(Shufeldt) 중령의 정보 수집 결과를 토대로 거문도를 군사기지로 거론하였다. 슈펠트의 정보 내용을 보면, 거문도를 “확실히 이 섬들은 어떤 세력이라도 해군기지로 관심을 가질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라 하여 천혜의 군사항으로 설명하였다.10) 그 설명을 좀 더 보면, “입구가 정박지에서 직각으로 형성된 육지로 해군이 주둔할 수 있는 항구입니다. 완경사의 해안과 평수구역은 배의 수리와 모든 기타작업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해줍니다. … 섬의 지형은 하나의 자연적 요새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 군사적인 관점으로 만약 적이 접근할 수 없는 섬에 항구를 만들 수 있다면 이곳은 최고의 자격을 갖춘 곳입니다. 섬들은 사실상 서로 마주 보고 항구를 수비할 수 있는 2개의 작은 규모의 지브롤터(Gibralters)입니다. (하략)”
거문도는 일본에서도 석탄 적치장으로 사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 정부에서는 송전(松田)에 석탄을 쌓아놓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레이트 게임- 아프가니스탄과 거문도 영국은 왜 조선의 먼 외딴 섬 거문도에 이렇게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고 또 무리해가면서까지 불법으로 점거했을까? 이즈음 영국과 러시아는 발칸반도 및 중·근동 지역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885년 3월(양력)에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의 판데(Panjdeh, 현재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속함) 지역을 공격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프가니스탄군과 싸워 이겼다. 판데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로 가는 길목인 헤라트(Herāt)의 접경지역이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판데 위기(the Panjdeh Incident)였다. 이렇게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가 불거져 영·러 관계가 악화되자 영국은 이를 기화로 그 전부터 눈독 드리고 있던 거문도를 점거하여 러시아를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아프가니스탄과 거문도!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수천 킬로 떨어져 있어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두 지역이 이렇게 한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 배경은 뭘까? 해양국가 영국과 대륙국가 러시아의 쟁패라는 그레이트 게임11)이 배경이었다. 결국 거문도는 그 게임의 놀이말이 되었던 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이다.12)러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거문도도 중국 북양함대(北洋艦隊)의 근거지였던 웨이하이(威海)의 즈푸(之罘), 일본의 대마도, 조선의 부산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까운 동아시아 해로의 요충지였다. 영국에게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식민지 인도를 방위하기 위한 요충지가 아프가니스탄이었다면, 러시아에게 거문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인바, 양 지역은 영국과 러시아에게 각각 핵심적인 전략거점이었다.13)이렇게 아프간은 영국에게, 거문도는 러시아에게 각각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서로 맞바꿀 만한 대상이었다. 러시아와 전쟁까지도 각오하고 있던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의 전면전에도 대비하여야 했다. 이때 러시아의 태평양지역,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 또는 방어하기 위해 적당한 전진 기지를 확보해야 하였다. 그 최적의 후보지를 거문도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국은 거문도를 점거하였다. 이렇게 해서 거문도가 그레이트 게임의 볼모로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세계사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거 소식을 전해 들은 청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3월 20일 조선 정부에 전한 편지에 이런 말이 들어 있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시키므로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을 침략할까 봐 거마도(거문도의 다른 이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또 조선 조정에서도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되자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홍콩을 침략할까 봐 동양 함대를 파견하여 3월 초하루에 거문도를 점거한 다음 포대를 쌓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았다.”14)
라고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처럼 거문도 점거 사건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안에서 영국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현재 거문도 일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인 이 일대가 한때나마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그레이트 게임의 놀이말이 되었다니 ….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1) 귤은 김류에 대하여는 이영호, 「거문도가 경험한 제국주의와 근대」(『도서문화』48, 도서문화연구원, 2016), 116〜130쪽 참조. 귤은은 「해상기문(海上奇聞)」이란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1859년 영국선박의 대표와 주고받은 필담을 비롯해 1854년 러시아 팔다라함대의 거문도 탐사 이후 전개된 조선의 외교관계, 이양선의 동향에 관련된 여러 글들을 수록하였다. 「해상기문」은 『國譯 橘隱齋文集』(1984, 橘隱齋集成刊委員會)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2) 『승정원일기』495책(탈초본 26책), 숙종 42년(1716) 5월 2일 25/25 기사 3) 『승정원일기』495책(탈초본 26책), 숙종 42년(1716) 6월 2일 2/16 기사 4) 『정조실록』42권, 정조 19년(1795) 5월 22일 3번째 기사 5) 한승훈, 「고립정책과 간섭정책의 이중주 –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영국의 인식과 대응」(『역사비평』, 2016.2); 이영호, 앞 글 참조. 6) 날짜는 음력을 우선하고, 양력인 경우는 양력이라 표기하였다. 조선 정부는 1896년 1월 1일부터 양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전 기록은 음력을 따랐다. 7) 이영호, 앞 글, 106쪽. 8) 한승훈, 「영국의 거문도 점령 과정에 대한 재검토 - 갑신정변 직후 영국의 간섭정책을 중심으로 –」(『영국 연구』36, 2016. 12), 80쪽. 9) 제국주의 국가들의 거문도 탐사에 대하여는 이영호, 앞 글에 상세하다. 10) 『사료 고종시대사』2, 1866년(고종 3) 12월 29일, 슈펠트, 거문도 지역의 탐사 내용을 보고함;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 1월 12일,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 슈펠트 중령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관련 정보의 수집 결과를 해군 장관 웰즈에게 보고함. 11) 그레이트 게임은 1815년,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부터 러일전쟁 이후 영·러협정이 체결되는 1907년까지 약 90여 년간 지속되었던 영국과 러시아의 팽창정책을 둘러싼 쟁패를 뜻한다. 서로 상대방의 취약지점을 위협하여 이를 정책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어 그렇게 불렀다. 김원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한러관계의 지정학 -거문도 사건과 이홍장-라디젠스키 협약(1886)을 중심하여」(『서양사학연구』30, 2014. 4), 45쪽; 최덕규, 「러시아 해군상 쉐스타코프와 거문도사건(1885-1887)」(『서양사학연구』37, 2015.12), 61쪽. 12) 아프가니스탄은 중동보다는 인도-아리아계로 분류된다. 영국은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부터 세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지만, 끝내 점령에는 실패했다. 1919년 8월 19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구 소련, 미국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만큼 지배도 독립도 어려운 독특한 역사를 지녔다. 1970년대 말부터 내전, 테러 등이 일상화된 나라로 여전히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무자헤딘부터 시작해, 탈레반, IS, 다에쉬 등으로 주도세력이 바뀌었다. 13) 최덕규, 앞 글, 61쪽. 14) 『고종실록』22권, 고종 22년(1885) 5월 25일 2번째 기사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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