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한시로 대화를 나눈 가족이 있었다는데…… 게시기간 : 2020-11-05 07:00부터 2030-12-17 00:57까지 등록일 : 2020-11-04 10:0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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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관중이 지은 부모님 예찬시 위의 「무제」 시는 윤관중이 부모님을 예찬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장인과 장모님을 예찬한 시이다. 내용을 다시 쉽게 풀이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경사스러운 날 부모님을 모셨는데, 이날은 가을바람이 불고 햇볕도 적당이 비추었다. 그리고 거문고를 켜면서 부르는 노래는 마음속에 있는 흥을 일으키니 오늘의 모임은 백년을 기약하는 듯하였다.
윤관중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사위이다. 그러니까 윤관중이 지은 「무제」 시는 곧, 유희춘 내외를 예찬한 시인 셈이다. 2. 중양절인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유희춘은 그의 나이 33세 때 을사사화를 맞이하여 관직에서 물러났고, 2년 뒤인 35세 때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마침내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 갔다. 이후 내내 종성에서 지내다가 53세 때 은진현(恩津縣)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에 55세 때 비로소 복직되었다. 유희춘은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인 듯하다. 복직된 이후부터 죽기 이전 11년의 세월 동안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상의 일들을 거의 매일 기록하여 남겼기 때문이다. 그 기록물은 『미암일기』라 이름 하여 현재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 시대 일기 중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있다. 1574년(선조7) 9월 9일자 『미암일기』 내용을 보자. 유희춘은 이날 일찍 업무를 마치고 5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유희춘의 나이는 62세였고, 형조 참판을 지내고 있었다. 5시 이전에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이니까 빠른 퇴근이라 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오니 부인 송덕봉(宋德峯)을 비롯하여 아들 유경렴(柳景濂), 사위 윤관중의 내외, 지인 변간(邊澗) 등이 있었다. 이때 부인이 중양절이라 하여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아마도 중양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일이 흔하지 않아 부인이 일부러 술자리를 마련했으리라. 9월 9일 중양절은 어떤 날인가? 숫자 9는 양수(陽數)인데, 이 양수가 거듭거듭 겹친다는 이유로 ‘중양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이래로 임금과 신하가 중양절에 모임을 가졌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적으로 향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어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양절에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중요한 날로 생각하였다. 또한 국화주를 마시기도 하고,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登高)의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중양절에 유희춘이 퇴근해 집에 돌아오자 부인이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부인이 마련한 술은 아마도 국화주였으리라. 부인은 술자리만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녀 죽매(竹梅)와 끝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뜯도록 하였다. 술과 거문고 연주가 있는 중양절 저녁이라. 술도 마시고 거문고 연주도 듣다보니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 유경렴과 윤관중, 변간 등이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은 매우 기뻐했다. 아들과 딸, 사위 등이 모여 화목한 모습을 보이니 부모가 된 입장에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부모님이 기뻐하시니, 자식의 입장에서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윤관중이 먼저 나서서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무제」 작품인 것이다. 3. 유희춘 가족, 한시로 대화를 나누다 윤관중이 시 짓는 것을 끝마치자 이어서 유경렴이 시를 지었다. 물론 윤관중이 지은 시의 운을 따랐다.
유경렴은 시를 통해 부모님이 살아 계셔서 자식이 효도 하고 있다는 것과 집안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두 번째 구에서 말한 ‘반의(斑衣)’란 색동옷을 말한다. 이 반의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의 춘추 시대 초나라에 70세가 넘은 은자(隱者)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노래자는 원나라 때 이미 24명의 효자 속에 포함될 정도로 90세가 넘은 부모님을 정성껏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초나라는 전쟁을 겪은 뒤였는데, 노래자는 부모님이 불안해하실 것을 염려하여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70세가 넘은 나이에 어린 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노래자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본 그 부모님은 어떤 얼굴 표정을 했을까? 상상컨대, 박수를 치며 기뻐했을 것이다. 유경렴은 곧, 자신과 노래자를 동일시하여 ‘반의’라는 시어를 쓴 것이다. 사위 윤관중과 아들 유경렴이 시를 지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희춘이 유경렴의 뒤를 이어 시를 지었다.
유희춘은 현재 자신이 임금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과 중양절을 맞이하여 가족이 태평스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주로 말하였다. 이와 같이 유희춘이 시 짓기를 마치자 마지막으로 부인 송덕봉이 이어서 시를 지었다.
송덕봉은 ‘여사(女士)’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시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지을 줄 알았다. 조선은 어떤 나라였던가? 사대부가의 여성이 글을 읽고, 글을 짓는 행위 자체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홍주송씨(洪州宋氏) 송덕봉의 집안은 남달랐다. 여성도 능력만 된다면 글을 읽고, 시와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응원해주었다. 송덕봉은 시에서 우선 남편 유희춘이 머나먼 북쪽 종성으로 유배 갔던 일을 생각하였다. 16세 때 당시 24세였던 유희춘과 혼례를 올린 뒤 11년이 지나 남편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송덕봉. 남편 유희춘은 북쪽 종성에 있었고, 송덕봉 자신은 남쪽에 있으면서 근 20년 동안 고된 시간을 보냈으니, 어떻게 훗날 중양절에 온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는 시간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고된 시간을 보낸 뒤에 즐거움을 맞이한 상황을 시를 통해 드러내었다. 4. 또 다른 대화시들 한시 중에 수창시(酬唱詩)라는 것이 있다. ‘수창(酬唱)’이란 시나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는 것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시를 이용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유희춘 집안사람들은 평소에도 시를 이용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유희춘이 시를 지어 부인 송덕봉에게 보내면 부인은 그 시를 받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응답하였다.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때때로 유경렴은 어머니 송덕봉과 시를 주고받았다. 남편과 부인, 아들과 어머니가 시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었으니 누가 봐도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한시를 생활 속 대화에 끌어들여 가장 잘 활용한 가족이 아닌가 생각한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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