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마을 공동체 동약 시행처, 광주 양과동정(良苽洞亭) 게시기간 : 2020-11-07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11-05 10:1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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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良苽)’, 오래된 역사 지명 양과동정(良苽洞亭)은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정자로 ‘양과정’이 아닌 ‘양과동정’이라 한데 의미가 있다. 양과동계의 중심이었던 양과동정은 많은 사람이 모여 마을 공동체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하고 휴식처이기도 했다. 향약 시행처로서 문서도 잘 남아 있다. 양과동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양쪽 옆면에 난간이 마련되어 있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연등 천장을 한 홑처마의 건물이다. 목재의 모양이나 기둥 상부에 乙자형의 헛첨차만을 이룬 단순한 형태는 공포(栱包) 완성 바로 직전의 형태로, 이 정자가 아주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 한다. 1990년 11월 15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양과동이란 행정지명은 1914년 ‘양과리’가 된데서 유래 한다. 그런데 ‘양과(良苽)’라는 땅이름은 오랜 역사가 깃든 지명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단종 2)에 무진군조에 ‘양과(良苽)’와 ‘경지(慶指)’가 부곡으로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 334개 고을의 연혁, 별호, 호구, 성씨, 전결, 토산, 고적 등을 싣고 있다. 보통 고려말기 부터의 역사자료로 보고 있다. 이처럼 ‘양과’는 고려시대에는 ‘부곡’이라는 행정 단위를 이룰 정도로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부곡’ 개념은 비슷한 성격의 ‘향(鄕)’과 함께 일종의 특별행정구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정설이라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 고적조)에도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위의 각각에는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다.”고 뚜렷하게 기록이 보인다. 광주로 보자면 ‘양과’ 지역은 읍치에서 약간은 떨어져 있지만 비옥한 토지가 갖추어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당시 무진군과 같이 독립된 군현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진주에서 관할을 하되 약간은 독립적이라 할 수 있는 특별행정구역 성격으로 ‘부곡’이라 한 것이다. 광주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오랜 유서이다. 1490년대 영사정 최형한의 시 양과동정은 간원대(諫院臺)라고도 한다. “간원대라는 것은 지금의 양과동정인데, 옛부터 사간원의 신하들이 이 마을에서 많이 나와 임금께 글을 올릴 일이 있으면 이 정자에서 모여 상소를 하였기에 이칭이 생겼다.” 정자에 걸려 있는 시판에 덧대진 설명이다. 양과동정에 걸린 시판 「제간원대」를 통해 읽어보자. 지은 이가 영사정((永思亭)인 최형한의 호이다.
최형한(崔亨漢, ?~1504)은 1483년(성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전교서 정자(典校署正字)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임금이 명하여 약과 음식물을 내려 주게 한다. 연이어 양친의 상을 당하였고 무덤이 바라다 보이는 건지산 아래에 정자 ‘영사정’을 짓고 추모의 정을 달래었다. 복을 마친 뒤에 사헌부 감찰을 맡은 이래 여러 관직을 지냈다. 용재 성현(慵齋 成俔, 1439∼1504)이 1493년(성종 24) 5월 8일에 「영사정기문[永思亭記]」을 짓는다. 성현은 「광산향교중수기」(1500년, 연산군 6)와 「광주객관중수기」를 짓기도 한다. 「광산향교중수기」에는 ‘호남 오십고을 경치는 내고향을 꼽는다네’라 하여 광주를 고향으로 적고 있다. 외가가 광주에 살던 순흥안씨 안종약의 집안이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인연이 있던 성현과 건지산 곁마을에 살던 최형한은 오래전부터 교유를 했을 것이다. 영사정에서 보면 저만치 서북쪽으로 양과동정이 바라다 보인다. 제영을 보면, 간원이라는 이름이 어찌하여 생겼는가를 던진다. 그리고 운각과 상대의 관원이 대를 이어 출자하였음을 노래한다. 운각(芸閣)은 교서관(校書館)의 별칭이다. 경적(經籍)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비서성의 별칭인데, 운초(芸草)가 본디 서적의 좀벌레를 없애는 효과가 있어 운초를 비치했던 데서 유래한다. 최형한이 1484년(성종 15)에 전교서 정자를 맡은 적이 있는데 교서관을 고친 이름이다. 성현의 「영사정기문」에 ‘운각에서 공을 종유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라 하여 최형한과 성현이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은 이 무렵 1484년 『풍소궤범(風騷軌範)』등의 서책을 편찬하는데 이때 교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霜臺)’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사헌부는 과거 어사대(御史臺)로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책임을 맡았으므로 추상(秋霜)처럼 엄하다 하여 이렇게 칭하였다. 부정 비리를 맹렬하게 척결하는 풍상지임(風霜之任)을 띠는 직책. 양과동정, 1480년대에 모정으로 건립 최형한이 ‘운각’으로 지칭되는 교서관의 직임과 별칭이 ‘상대’인 사헌부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 같은 시어를 쓴 것 같다. 송내희(宋來煕)가 지은 최형한의 묘갈문 추기에는 “직언으로 극간하다가 나포되어 쫓겨나 궐문밖에서 죽었다[以直言極諫 拿出闕門外而死]’, ‘소인배가 제현을 업신여기자 공이 대직에 있으면서 논간하였고 아흐레를 먹지 않다가 죽었다[少人輩搆誣諸賢 公以臺職論諫 不食九日而死]’ 따위의 표기가 보인다. 간원대로 제한 연유를 알 수 있다. 최형한의 「제간원대」 시가 양과동정에서 지어졌다면 시를 짓기 전에 동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형한은 1484년 병으로 사직하였고 연이어 양친을 여의었다가 다시 관직에 나간 것은 1490년대 초반이다. 고향에 머물렀던 1484년~1490년 사이 부모상 기간 외에는 영사정이나 양과동정, 이웃한 부용정 등에서 광주권의 선비들과 교유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양과동정은 1480년대에는 지어져 있었을 것이다. 양과동 향약의 시행처, 1480년대 설약 정자 안에는 「양과동적입의서」, 「양과동정중수기」 등이 걸려있다. 마을 공동의 동약 시행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양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던 마을의 향약은 성종과 연산군 무렵(1488~1505)에 만들었던 동적(洞籍)에 의해 실시되었다. 「양과동적입의서(良苽洞籍立議序)」는 1604년(선조 37) 유사경(柳思敬, 1556~?)이 쓴 동적의 서문이다. 양과동약의 유래와 중국 송나라 때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의 뜻을 잇고자 했던 양과동약의 의의를 밝히고 성종과 연산군 무렵에 처음으로 동민의 신상정보 등이 담긴 동적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 난리로 인해 옛 동적부가 병화로 소실된 이후 이 서문을 쓰게 된 배경, 그리고 공자가 향당(鄕黨)에 들어섰을 때의 몸가짐에 대한 고사를 들어 향당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임진왜란, 전란의 와중에서는 제대로 실시할 수 가 없었을 것 같다. 어쩌면 거의 폐해질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양과정의 선비들은 난후 향촌 복구 과정에서 지혜를 모았을 것이다. 무엇 보다도 동약을 복구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을 터. 이윽고 1604년(선조 37)에 다시 중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양과동계는 1604년 중수한 뒤 현재까지 기본 틀을 잃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동계의 범위가 사방 30리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중반부터 양과동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이 공동체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양과동향약은 고을 단위 보다는 상부상조의 전통을 말하는 동네 규약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약원의 구성은 양과동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양과동의 주도층인 사족의 향촌지배권 강화에 더 비중이 두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종의 향규(鄕規)적인 인 성격을 갖는 셈이다. 관련 기록자료가 잘 남아 있다. 1604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3종 39건의 문서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6책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이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또한 정자 명칭도 ‘양과정’이 아니라 ‘양과동정’이라 한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 정신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정자가 이처럼 동약의 시행처가 되었다는 점은 향토사나 향촌사회사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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