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선승(禪僧) 도선(道詵)은 왜 여러 차례 추증(追贈) 되었나? 게시기간 : 2020-09-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9-14 14: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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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선은 신라 말에 선사였는데, 고려시대에 대선사, 왕사, 국사로 추증되었다. 도선(道詵, 827-898)은 살아있을 때에도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사후(死後)에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가 입적(入寂)한 직후인 신라 효공왕대(孝恭王代)에 요공선사(了空禪師)로 추증(追贈)되었다. 그가 고려 현종대(顯宗代)에는 대선사(大禪師)에 추증되었으며, 숙종대(肅宗代)에 왕사(王師), 인종대(仁宗代)에는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증되었다. 승려의 사후에 이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추증한 예는 일찌기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도선은 왜 이렇게 여러 차례 추증되었을까? 이를 밝히는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1). 그가 왜 현종대에 대선사, 숙종대에 왕사, 인종대에 국사로 추증되었는가를 당시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이는 고려시대에 도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당시의 정치사회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2). 도선의 행적(行蹟)이 윤색되는 것은 고려중기(高麗中期)에 그의 시호(諡號)가 계속해서 향상(向上)되어 추숭(追崇)되는 것과 연관될 수 있다3). 2. 고려 현종대(顯宗代)의 대선사(大禪師) 추증(追贈) 도선의 행적은 최유청(崔惟淸, 1093(선종 10)-1174(명종 4)이 찬술한 도선비가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이다. 도선(道詵)은 현종 13년(1022년) 1월에 대선사(大禪師)에 추증되었다고 하지만4), 그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다. 도선이 입적한 사후 효광왕대에 요공선사로 추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현종대에 왜 추증되었을까? 아울러 도선은 어떠한 인물로 이해되었기에 추증을 하였을까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선이 태조의 탄생과 삼한 통합을 예언했음을 감안하면, 목종 사후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그의 왕권이 안정 내지는 강화되는 즈음에 추증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태조의 탄생이나 삼한 통합은 모두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종의 왕권이 강화된 시기는 현종 18년 이후로 추정된다. 강감찬이 현종 11년 국왕에게 나성(羅城)의 재축조를 건의하여 현종 20년 완공되었다.. 한편 나성 축조를 주도한 인물은 왕가도(王可道, ?-1034(덕종 3))였다. 본래의 성과 이름은 이자림(李子琳)이었다. 그는 현종 15년 이전 어느 시점인가에 나성의 재축조를 시작했던 현종의 측근 인물로 파악된다. 그는 1014년(현종 5)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의 무신이 난을 일으켰을 때 개경의 사저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 김맹(金猛)을 통해 무신들을 제거할 것을 왕에게 알렸다. 이에 서경유수관판관(西京留守官判官)이 되어 이듬해 왕이 서경에서 군신과 함께 향연을 벌일 때 김훈· 최질 등 19인을 베고 이들의 발호를 방지했던 인물이다. 적극적 북진파(北進派)의 한 사람으로서 보수적인 문신인 최항(崔沆, ?-1024(현종 15), 최언위의 손자)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인물이었다.. 최항은 친불교론자로서 현화사를 창건하는데 앞장 섰다. 현화사는 현종의 원찰이었지만, 현화사 창건자들은 현종을 옹립한 세력으로 현종의 왕권에 제약을 가했던 세력이었다. 최항은 최사의, 채충순 등과 같은 보수파 정치세력이었다. 현종대의 정치상황은 현종의 나주 몽진으로 인한 고려왕실의 보장처(保藏處)가 된 전라도(全羅道)에 대한 지역적 배려와 최항 등 신라계 경주세력의 부상으로 왕건의 출생과 고려로의 통일을 예언한 도선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왕실의 존엄과 신성성(神聖性)]을 고양하는데 도선이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3. 숙종대(肅宗代)의 왕사(王師) 추증(追贈) 도선은 숙종대에 왕사로 추증되었다. 숙종 6년(1101) 8월 원효를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의상을 원교국사(圓敎國師)로 봉증하였다5). 고려중기에 이들을 “동방성인(東方聖人), 대성(大聖)”으로 여겨 칭송하였던 것이다. 이들과 함께 도선이 왕사로 추증된 것이다. 원효나 의상이 국사로 추증된 것은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선이 왕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숙종 원년 김위제(金謂磾)는 남경천도(南京遷都)를 주장하면서 도선의 비기를 인용하였다. 남경천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김위제가 도선을 내세운 것이다. 천도는 국왕인 숙종의 저치적 의도로 이해된다. 숙종은 왜 남경천도에 나섰을까? 숙종은 인주이씨 등 문벌귀족세력을 꺾고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조카 헌종의 양위로 즉위했다. 숙종은 남경천도로 정치를 일신하고자 했다. 숙종은 도선비기를 통해 남경천도를 합리화 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숙종은 현종대에 이미 대선사로 추증된 도선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어 왕사로 추증했다고 이해된다. 4. 인종대(仁宗代)의 국사(國師) 추증(追贈) 도선은 인종대(1123-1145)에 선각국사(先覺國師)로 봉증되었다. 인종은 6(1128)년(허흥식 4년 ;1226년은 잘못임) 4월 원효 · 의상 · 도선은 모두 고승(高僧)이므로 마땅히 소관부서에 명령하여 봉증케 했다. 이미 숙종 6년에 원효와 의상은 국사로 추증했다. 인종 6년의 세 고승의 봉증은 실제로는 <<도선(道詵)>>을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도선이 인종에 의해 국사에 봉증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이다. 서경천도운동 주창자는 묘청(妙淸, ?-1135)이었다, 묘청은 도선의 계승자임을 자청했다. 인종 5년 시작된 서경천도 운동은 국왕의 측근이 주도했다. 국왕은 호의적이었으며 그들은 묘청을 이용했다. 그런데 묘청은 “묘청은 도선-강정화-묘청-백수한으로 이어지는 태일옥장법의 계승자이다.” 라고 하여 자신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의 강정화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며, 도선과 묘청 사이의 연대로 미루어 강정화 한 사람이 이들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도선을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6). 즉 도선은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에 의해 국사에 추봉되었다고 여겨진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그의 추봉도 지지부진 해지고, 결국 더 이상 진척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의종대에 이르러 최유청 찬술의 비문이 만들어졌으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무신의 난(의종 24년, 1170) 직후 1172년(명종 2)에 비로소 도선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도선이 입적한 후 274년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5. 고려중기 고려왕실의 신성성(神聖性)을 고양(高揚)한 선각도선(先覺道詵) 고려중기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 출생의 예언과 천하를 통일한 고려왕조 창업의 천명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이었다. 특히 현종과 숙종대, 인종-의종대의 고려왕실의 신성성(神聖性)을 고양하는 현창운동과 관련되어 선각국사 도선이 부각되어졌다. 이 운동은 실추되어진 왕권을 회복하려는 국왕과 국왕측근세력이 추동(推動)한 결과였다. 그 중심에 선종승려이자 풍수도찰설의 대가인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이 있었다. 1) 今西龍은 道詵이 禪師에서 大禪師로, 大禪師에서 王師로, 王師에서 國師로 贈諡된 사실을 주목하면서 이를 圖讖風水說의 勢力增進으로 이해하였다.(「新羅僧 道詵에 就하여(『高麗史硏究』, 近澤書店, 昭和 19年, 71쪽)
2) 朝鮮時代의 贈諡行政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것이 참고된다. 1. 兪尙根,「李朝時代의 贈諡制度」, (『象隱趙容郁博士頌壽紀念論叢』, 1971) 2. 申用浩,「先賢들의 諡號硏究」, (『公州師大論文集』, 1989) 3. 朴洪甲,「朝鮮時代의 諡號制度」, (『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 金潤坤敎授停年紀念論叢』, 2001) 4. 김학수,「고문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증시행정」, (『古文書硏究』23, 2003) 3) 金杜珍,「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東方學志』57,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1988, 13쪽) 4) 허흥식 <<도선연구>>, 201쪽 5) 『高麗史』世家 11 肅宗 6年條 6) 李丙燾, 『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年)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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