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민족의 교사, 학산 윤윤기 게시기간 : 2020-09-1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9-15 10:5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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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 윤윤기 기념비
“위대하다 학산이여.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주와 품격이 단아하였고 학식 또한 고명하였다. 갑술년(1934년) 봄 학교를 세우는 일을 맡아 홀로 계책을 다하였다. 몸을 다하여 수고하였고 이슬 맞으며 나무 밑에서 행한 풍교(風敎)가 순박하였는데 학교를 준공하여 교실에 들어가서는 촌음을 아껴 가르쳤다. 병자년(1936년) 태풍에 교실이 무너졌는데 다음날 또 나무 아래에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學山 尹允其 記念碑 偉歟學山 故族才格端雅學識高明 甲戌春時任建校設稧獨也 腎勞露座樹下風敎淳淳 竣工 入室哀惜寸陰 丙子風雨敎室顚沛 翌日又從樹下敎學不倦1) 학산 윤윤기는 1900년 7월 9일 보성군 노동면 신천리에서 부친 윤병남과 모친 김삼송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유교의 전통에 따라 엄하고 굳센 가풍을 세웠다. 학산의 부친 역시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친 한학자였다. 학산은 덕암서원과 기산서원에서 사서(四書)를 열심히 공부했다. 1908년 의병들이 학산이 살던 평주 부락에 숨어들었다. 일본 헌병들은 의병을 잡기 위해 마을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학산은 어린 동생을 업고 마을 뒷산을 타고 겸백면으로 도망갔다. 겸백면은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하는 외딴 곳이었다. 학산은 이때 겪은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잊을 수 없었다. 크면서 학산은 부친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다. 사서를 끼고 앉던 자리방석을 털고 일어났다. 신학문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학산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랐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를 잘랐으니 이보다 더 큰 불효는 없었다. 그리고 학산은 집을 떠났다. 1924년 학산은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3월 학산은 전남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훈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학산은 현 광주교육대학교의 모체인 전남공립사범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었던 것이다. 지난 2013년 10월 22일 광주교육대학교는 학산 윤윤기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개최한 적이 있다. 첫 발령지는 장흥이었다. 학산은 1925년 장흥군 안양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 부임하였고, 이곳에서 3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교사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부서진 학교 건물을 고치는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야학을 열어 마을의 문맹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방학이 되면 학산은 영농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하에 마을 청년들을 불러내어 민족교육을 시켰다. 한글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직접 연필과 공책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별도의 학비를 받지 않았다. 제자들은 회고한다. 학교가 일본인 교장과 경찰들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대놓고 한글을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강조하셨습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상용2)
1934년 3월 학산은 천포간이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간이학교는 2년제 단기과정의 초등교육기관이다. 그런데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에는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사(校舍)가 없었다. 일본인 교장은 민족사를 가르친 학산을 밉게 본 것이었다. 교사(校舍)도 없는 곳에 발령을 내면 사표를 던지리라고 계산했을까? 이무 것도 없는 마을에 전보를 낸 것은 명백한 보복성 좌천이었다. 천포는 척박한 땅, 갯벌밖에 없는 오지였다. 학교를 설립하기엔 너무나 열악한 마을이었다. 천포에 온 학산, 지체 없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흑판을 걸어놓을 교실도 없는데 어찌 가르쳤을까? 동네 어른이 빌려준 문중 제각에 학생들을 모았다. 당산나무 밑 널찍한 바위에 아이들을 모았다. 교재도 학용품도 없지만 교사와 학생이 있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낮에만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밤이면 농삿일을 마친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쳤다.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농촌의 주된 교육 현장, 그것이 야학(夜學)이었다. 마을 유지들을 만나 학교 건립을 호소하였다. 임상현이 내놓은 땅을 학교 부지로 삼기로 하였다. 득량만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명당이었다. 마침내 천포간이학교가 문을 열었다. 운동장을 다지고 울타리를 만드는 일은 학산과 학생들의 몫이었다. 학생 수의 정원(定員)이 없었다. 연령의 제한도 없었다. 사실상 무상교육이었다. 오직 요구되는 것은 배움의 열정이었다. 밤낮이 없는 강행군이었다. 1학년과 2학년을 동시에 수업하였다. 1학년을 가르칠 때 2학년은 자습을 하였고, 2학년을 가르칠 때 1학년은 자습을 하였다. 1,2학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하였고, 3,4학년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수업하였으며, 5,6학년은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수업하였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상황, 학산은 단신으로 천포간이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전 학년이 글짓기와 산술,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수신(修身)도 배웠고, 풍금에 맞춰 노래도 배웠다. 학산의 풍금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시조도 배웠고, 주산도 배웠다.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학산은 불법을 마다하지 않았다. 흑판에 조선어를 써가면서 몰래 가르쳤다. 감찰이 오면 망을 보는 학생이 미리 알려주었고, 몇몇 학생들이 한글 교재를 쓸어 담아 뒷산으로 달아나곤 했다. 학산이 천포간이학교에서 실행한 조선어 교육과 민족사 교육은 그 소문이 금세 널리 퍼져나갔다. 시학관과 주재소 순사들은 수시로 현장을 순찰하였다. 학산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글 교재를 없앴고 한글 공책도 사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철저히 칠판에만 의존하였다. 1939년 3월 학산은 보성보통학교로 전보가 났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은 학산의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학산 윤윤기의 기념비 말이다. 그런데 보성보통학교에서 학산이 복무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학산은 부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1940년 1월 돌연 학교에 사표를 냈다. 학산은 교육공무원이라는 특권을 스스로 내던진 것이다. 훈도직만 그만 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황이 주는 은급(恩級)마저 포기하였다. 은급은 일본 정부가 퇴직자에게 주는 연금이었다. 15년 이상 공직에 근무한 사람에게 주는 연금이었는데, 학산은 교직 14년 차에 퇴직함으로써 스스로 연금을 포기한 것이다. 교직을 사퇴하고 연금까지 포기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사 일이 아니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학산의 내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소중한 가보로 전해져온 몇 편의 한시를 읽어 본다. 그중에는 눈에 띄는 특이한 시 한 편이 있다. 억보초병(億步哨兵), 보초병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도대체 학산은 언제 어디에서 보초병을 목격했을까? 億步哨兵 보초병을 생각하며
학산의 큰 아들 윤성식은 5·16 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 구금된 적이 있다.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윤성식은 그곳에서 김성숙을 감옥에서 조우하였다. 김성숙은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이끌어간 독립투사였다. 윤성식은 자신의 부친의 함자가 윤윤기임을 고하였는데 그때 김성숙이 깜짝 놀라며 윤성식을 두 손을 덥석 잡더라는 것이다. 김성숙은 일제 치하에서 윤윤기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시대의 고뇌를 공유한 동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성숙은 1940년 충칭 임시정부 시절 학산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전하더라는 것이다.4) 여기까지는 아들 윤성식의 증언이다. 잠시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이 연합하여 조선의용대를 결성한 것이 1938년 10월 10일이었다. 조선의용군의 전신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고, 정치부장이 김성숙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5월 후난성(湖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重慶)으로 옮겼고 1940년 11월 4일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아들 윤성식의 증언과 조선의용대의 이동 경로를 종합하여 고찰하건대, 학산이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동지 김성숙의 소개로 가능한 일이었다. 학산이 목격한 보초병은 조선의용대의 대원이었을 것이며, 이 역시 김성숙의 안내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겠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 개정령이 발포되었고, 황국신민화 교육이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되었다. 조선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시체제로 편제되었다. 남자는 지원병으로 징병되었고, 여자는 정신대로 동원되었다. 숨이 막히는 시국이었다. 일제는 황국신민서사를 열창하도록 강제했다.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총을 들고 싸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의 시대였다. 1940년 2월 올 것이 왔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창씨개명을 따르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으로 간주하여 갖가지 불이익을 강제했다. 취업 기회를 박탈했고, 식량 배급에서 차등을 두었다.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다. 학산의 두 아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1940년 학산이 왜 교직을 사퇴했는지, 왜 은급을 포기했는지, 이제 그 내면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총을 들고 전선에 서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이다. “조국의 흥망이 그대 두 어깨에 걸려 있으니 어찌 생각하리 살아서 고국에 돌아갈 날을” 억보초병(億步哨兵)은 그냥 쓴 시가 아니었다. 학산 역시 저 보초병처럼 나라 위해 싸우다 죽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학산이 서야 할 전선은 충칭이 아니라 고향 보성에 있었고, 학산이 들어야 할 무기는 총이 아닌 분필이었다. 추측건대 밤을 세워 김성숙과 고뇌어린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 돌아온 학산이 치켜든 일은 일본의 관헌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학교였다. 학산이 세운 양정원(養正院)은 요즘의 대안학교였다. 1940년 4월 12일 양정원에는 1기 입학생 500명이 몰려왔다. 보성군 전역에서 학생이 왔으며, 장흥과 영암, 완도와 강진에서도 학생들이 왔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교문을 열어주었다. 일체의 경제적 부담이 없는 무상교육이었다. 양정원의 무상 교육 하나만으로도 학산은 한국의 교육사에 신기원을 연 교육자였다. 어떻게 수업을 했을까? 잠시 학산의 교실을 탐방하자. 조문도야석사가야(朝聞陶冶夕死可也) ‘아침에 도를 닦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칠판에 쓰시며 학생들에게 조선인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민족혼을 심어주었습니다.--백춘선5)
양정원 교실에는 밤에도 남포등 아래에 몰려든 30-40대 만학도들과 부녀자들이 글을 읽었다. 책상과 의자가 부족하여 선 채로 강의를 받았다. 양정원엔 글을 깨우치기 위한 배움의 열기가 타올랐다. 학생들이 지붕 위로까지 올라가 ‘가갸거겨’ 한글을 배웠다는 소설 《상록수》의 현장이 양정원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독립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수한 민족임을 알아야 한다.”게 학산이 아이들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이제 우리는 학산의 최후를 확인할 때이다. 1950년 7월 22일 보성군 미력면의 예재 고갯길. 학산의 아들 윤호철과 학산의 동생 윤점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갯길을 올라왔다. 그들은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 주변은 난자당한 주검들로 즐비했다. 죽창에 찔려 죽은 사람, 입에 말뚝이 박힌 사람,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현장,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학산의 시신은 굵은 철사로 상체와 두 팔이 묶여 있었고, 하체도 발목이 결박당해 있었다. 예리한 총검으로 찌른 듯, 몸통에는 깊은 자상(刺傷)이 여러 곳에 나 있었다. 입은 양쪽으로 귀밑까지 찢어졌고 코도 찢겨나갔다. 이는 모두 부서진 상태였다. 학산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보성경찰서에서 불과 6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보성경찰서 경찰들이 학산을 경찰서로 연행한 것은 7월 21일 오후였다. 해방 후 학산이 걸은 정치적 행보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지지한 것뿐이었다.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게 학산의 신념이었다. 그날 후배 정해필과 한가하게 바둑을 두고 있던 학산을 잡아간 보성경찰서 서장은 이봉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고등계 형사를 지낸 전형적인 민족반역자였다. 학산의 원혼을 우리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학산이 남긴 시 한 수를 함께 읽자. 학산은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先天下之憂而憂)한 시대의 지식인이요, 선비였다. 聞曉笛 새벽 피리 소리를 들으며
1) 선경식, <학산 윤윤기>, 한길사, 2007. 99쪽.
2) 같은 책, 62쪽. 3) 같은 책, 227쪽. 4) 같은 책, 215쪽. 5) 같은 책, 148-150쪽. 글쓴이 황광우 작가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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