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최서남단 끝섬 가거도, 국가 명승이 되다 게시기간 : 2020-09-1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9-18 10:5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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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도(可佳島)는 호남(湖南)의 바다 가운데 있다. 처음에 이 섬이 적로(賊路)의 첫길이 된다고 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었는데, 근래에 와서 유민(流民)들이 다시 모여들므로 조정에서 장차 다시 몰아내려고 하였다. 윤세기가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훈국(訓局)에 소속시켜 군향(軍餉)에 보탤 것을 청하니, 아울러 따랐다. 이 섬과 홍어도(紅魚島)는 모두 나주의 소관(所管)이다.” 1707년(숙종 33) 8월 19(무술)일의 『조선왕조실록』기사이다. 적로라 하여 섬주민들을 몰아냈는데 유민들이 몰려들자 다시 몰아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호조판서 윤세기가 그대로 두고 군향에 보탤 것을 청해 따르게 된다. 나주의 소관이던 가가도. 지금의 가거도이다. 우리나라의 최서남단이라 변경의 적들로 인해 ‘공도(空島)’를 해도 유민들이 몰려들곤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몰려든 주민들 때문에 세금은 늘어난다. 1792년(정조 16) 11월 19일(을묘)의 『일성록』 기사를 보면, 가가도에서 납부하는 균역청의 춘등(春等) 어세(漁稅) 전(錢) 22냥과 훈련도감의 둔세(屯稅) 전 160냥을 거두어 격군(格軍)과 남녀 33명을 두 척의 배에 태워 보냈는데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배 두 척이 빠져 사람도 죽고 물건도 빠진다. 이에 나주목사의 첩정을 통해 전라감사가 “가가도는 탄환만 한 좁은 땅인 데다가 흉년까지 겹쳤는데 어세와 둔세를 남아 있는 섬의 백성들에게서 다시 거두게 하면 또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날 염려가 있다.”면서 면세를 청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따르도록 한다. 이 무렵의 기록인 『호구총수』에는 39호 81구(남 43, 여 38)의 호구 기록이 보인다. 1871년(고종 8) 9월 23일(경술)에는 폭풍을 만나 가가도에 표류해 온 유구국(琉球國) 사람 22명을 조운선을 내주면서 돌려 보내 주도록 한다. “노한 파도와 놀란 물결에 돛이 꺾이고 돛대가 부서지는 와중에서 놀라움과 두려움 끝에 살아남은 목숨인 만큼 속히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라는 전라우수사의 장계를 의정부에서 임금께 보고한데 따른 것이다. 『승정원일기』기사이다. 이 역사 속의 가거도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7호가 되었다. 명칭은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新安 可居島 섬등半島)」. 2020년 8월 27일자. 섬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가거도’는 국토 최서남단이라는 지리적인 상징성이 있으며, 뛰어난 식생 분포를 가진 섬이다. 수많은 철새가 봄철과 가을철에 서해를 건너 이동하면서 중간기착지로 이용하고 있으며, 넓게 펼쳐진 후박나무 군락과 다양한 종류의 희귀식물들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가거도 북서쪽에 자리한 섬등반도는 섬 동쪽으로 뻗어 내린 반도형 지형으로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봉과 병풍처럼 펼쳐진 해식애(海蝕崖)가 일대 장관을 이루며, 낙조 경관이 아름다운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해식애란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를 이른다. 가거도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 산천조)와 『호구총수』(1789년, 규장각 奎1602),「나주지도」(1872년, 奎10483), 「대동여지도」에는 ‘가가도(可佳島)’, 『나주목읍지』(奎17422)와 『여지도』에는 ‘가가도(佳嘉島)’, 『해동지도』(古4709-61)의 「제주삼현도」에는 ‘가가도(家假島)’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지명은 ‘加佳島’가 주로 쓰였고, 나주목에 속했다. 다른 한자표기로 ‘加可島’(『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등)라는 기록도 보인다. 1896년 2월 3일 신설된 지도군에 속한다. ‘가거도(可居島)’라는 지명은 『지도군읍지』(1908)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1914년 지도군이 없어져서 무안군에 속했고 1969년 신설된 신안군에 속하게 된다. 가거도는 국제교역선이 지나다니던 길목에 자리해 통일신라 시대부터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중간기항지로 활용되어 왔다. 그보다 훨씬 전 신석기시대 조개무지 유적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30호이다. 이 가거도 패총에서는 돋을무늬토기나 눌러찍은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어 형성시기를 신석기 시대 전기로 보고 있다. 서기전 5천년께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 패총 곁에 자리한 「신안 소흑산도 등대」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80호이다. 1907년에 축조되어 1935년 유인등대로 증축된 등대이다. 대한제국시기의 등대와 달리 간략화된 전면 출입구의 돌출 현관과 원뿔꼴의 등롱 그리고 등탑 내부에는 직선형 계단이 있는 변화된 모습으로 축조되어 등대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변화 양상 등 등대건축의 한 변천사를 보여준다. 전남 무형문화재 제22호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도 문화자원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이 노래는 뱃노래와 멸치를 잡을 때 부르는 노래가 복합되어서 한 형태의 민요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지방 민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설소리, 받는소리, 샛소리의 가창형태를 가지고 있다. 가거도 뱃노래는 주민들이 온전히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뱃노래라할 수 있는데 현재는 어렵게 전승이 이어지고 있다.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의 명승 지정은 마지막 ‘끝섬’의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국토 최서남단의 가거도는 국토의 동쪽 끝인 독도(천연기념물 제336호), 서해 최북단인 백령도(명승 제8호, 천연기념물 제391호)와 최남단인 마라도(천연기념물 제423호)와 함께 우리 국토를 감싸는 ‘끝섬’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 가거도가 명승으로 지정됨으로써 우리 영해를 지키는 상징적인 4개의 ‘끝섬’들이 모두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앞으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보존‧활용되고, 우리 국토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금까지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은 전국적으로 114개소이다. 전라남도 21개소, 전라북도 8개소, 광주광역시 1개소이다. 호남 지역이 많은 편이다. 강원도가 27개소이다. 명승은 기념물로 분류되는 문화재 가운데 “경치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것”의 국가지정문화재이다. 자연 경관 위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문화경관이나 역사경관 지구도 명승이 된다. 자연속에 사람이 어울어져 일정한 공간을 이룰 때 명승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대상도 관점에 따라 달리 지정된다. ‘무등산 주상절리대’의 경우 지형 형상에 따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같은 대상이어도 ‘서석대와 입석대’라는 측면, 즉 사람의 눈을 통해서 문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명승으로 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와 지공너덜’이 명승 제114호로 지정된 경우와 비교하면 될 것이다. 전남의 완도 정도리 구계등이나 여수 상백도·하백도 일원, 순천만, 화순 적벽,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와 지공너덜,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 전북의 진안 마이산, 부안 채석강·적벽강 일원, 무주구천동 일사대 일원, 무주구천동 파회·수심대 일원, 군산 선유도 망주봉 일원, 부안 직소폭포 일원 등은 경치 좋은 곳, 자연경관이라 하겠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 순천 초연정 원림, 보길도 윤선도 원림, 장성 백양사 백학봉, 담양 소쇄원, 담양 식영정 일원, 담양 명옥헌 원림,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지리산 화엄사 일원,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 두륜산 대흥사 일원, 진도 운림산방, 화순 임대정 원림, 구례 오산 사성암 일원, 강진 백운동 원림, 광주의 환벽당일원이나 전라북도의 광한루원(廣寒樓苑) 등은 문화경관에 해당하는 명승이라 볼 수 있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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