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우리 이제 비석으로 만났구려! ① 게시기간 : 2020-09-2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9-22 15:5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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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는 산하, 신작로의 비애 대종교를 중광하고 황해도 구월산에서 단식 순교한 홍암 나철의 최후를 지켰던 6인 수행제자 중 으뜸 상교(尙敎)가 김두봉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두봉이 김구를 만나 넌지시 건넸을지 모른다. “재작년 여름 주석께서 남부지방을 순회하시며 보성을 가셨다는데, 제가 한때 모셨던 홍암이 보성 태생이십니다.” 그렇다면 김구, “백연! 그렇소이까? 홍암을 모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내가 파옥하고 망명하면서 보성에서 신세를 졌으니, 나도 홍암과 인연이 없지 않구려. 그런데 우사! 송재 박사님 외가가 보성이라지요?” 백연(白淵)은 김두봉, 우사(尤史)는 김규식, 송재(松齋)는 서재필이다. 아마 김규식은 묵묵하였을 것이다. 아니다! 국토가 이미 동강났던 그해 봄, 덕담을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땅을 인연 삼는 상상 시나리오에 시릿하다가, 머슴의병장 안규홍의 사적을 찾아가는 2번 국도의 사연에 쓰라렸다. 『매천야록』 1909년 9월 기사, “왜인이 길을 나누어 위로는 진산ㆍ금산ㆍ김제ㆍ만경, 동으로는 진주ㆍ하동, 남으로는 목포에서 그물 치듯 사방을 포위하고서는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순사들이 마을 집들을 빗질하듯 샅샅이 뒤져서 조금만 의심이 나면 즉시 살육하므로 이로부터 종적이 끊기고 이웃 마을이라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한편 삼삼오오 도망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숨을 곳이 없자 강한 자는 싸우다가 죽고 약한 자는 땅을 기다가 칼을 맞아 죽어가며 점차 강진ㆍ해남 땅끝까지 밀려났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 그것은 호남의병의 초토화, 양민학살이었다. 이후에도 일본군은 다도해와 한려수도를 샅샅이 헤집고 무인도까지 휩쓸었다. 많은 의병이 죽고 잡혔으며 의병이 나오고 숨고 지났던 마을은 처참하게 보복을 당하였다. 이러한 세월 함평향교 장의 출신으로 호남 제일 의병이 되리라던 남일파(南一派) 맹주 심수택(沈守澤)과 우리가 찾아가는 머슴의병장도 한때의 동료, 도망의병의 밀고로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학살만행, 약탈방화는 1909년 가을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그랬다. 다음은 지리산 문수계곡 아래 토지면 운조루에 살던 젊은 주인 류형업(柳瀅業, 1886∼1944)의 일기 중의 일부이다. “일본병사 6,7명이 하죽(下竹)에 들어가 동임(洞任)을 찾아 일전에 의병이 왔다간 사정을 물었다 한다. 불당(佛堂)과 율치(栗峙)로 갔다고 하니 의병을 따라간 사람을 찾는다고 하며 심하게 닦달하여 동임 몇 명이 달아나자 일본 병사들이 불당마을 동임 집을 불살랐다고 한다.1) “정오에 일본병사 29명이 문수암(文殊庵)에서 내죽(內竹)에 이르렀다고 한다. 토왜(土倭)도 같이 갔는데 토왜는 즉 조선 순검이다. 우리 동을 지날 때 마을 앞 길가의 두길 남짓한 두 그루 나무를 베었는데 모두 토왜의 소행이었다. 일본인이 문수암과 율치의 깊숙한 마을을 모두 불태웠는데, 의병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서 천년고찰까지 잿더미로 만들었으니 들을수록 심히 한스럽다.”2) 창평의병장 고광순의 산화, 연곡사가 불탄 내력도 전해준다. “연곡사 형편을 들어보니 창평 의병장 고광순이 죽었다고 하고 병졸들은 혹은 죽고 혹은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절의 불기(佛器)와 재산 등은 일본인이 모조리 가져갔다고 한다. 절이 거의 전부 불탔으며 불빛이 연일 하늘에 가득하였다니 차마 그 정황을 들을 수가 없다.”3) 이후로도 지리산 자락은 어느 누구도 횡액을 피할 수 없었으니 운조루 주인이나 임실군수를 지낸 부호 임용현(林鏞炫)은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면장은 걸핏하면 치도곤을 당하곤 하였다. “저녁 때 일본병사 7명 한국인 순검 2명, 그리고 부하 2명 등 11명이 연곡사에서 급히 들이닥쳐 식사를 대접하여 보냈다.”4) “한밤중에 일본인 약 10여 명이 갑작스레 몰려와서 저녁밥을 강제로 빼앗아먹고 마을사람들을 시켜 몇 곳을 지키게 하였다. 집안 식구들과 이웃사람들 역시 몹시 두려워하였다.”5) “일본병사가 파도의 임임실(林任實) 댁에서 며칠 밤을 계속 유숙하니 식구들이 출입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6) “수비대가 요즘 우리 군 경내를 두루 다니면서 비적을 잡는다고 하여 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재액을 당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지 못하였다. 면장 오한익(吳漢翊)이 크게 매를 맞았다고 한다.”7) 이렇듯 우리 의병의 산중 근거지를 분쇄한 일제는 마을과 시장까지 출몰하던 의병을 섬멸하고자 호남 산하를 구획정리하듯 쓸어냈으니, ‘남한대토벌’의 남한은 기실 호남이었다. 그만큼 호남의병의 역할과 비중은 컸다. 저들 일본군경 자료에 따르면 1908년 ‘교전회수 및 의병 규모’에서 호남은 전국 대비 25%와 24.7%을 차지하고, 1909년이 되면 46.6%와 59.9%에 이르렀다. 박은식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적었다. “대체로 각도 의병을 보면 전라도가 가장 많은데, 아직까지 상세한 것을 모르니 후일을 기대한다.” 당시 의병 하다가 살아날 길은 영영 망명이 아니라면 동료와 맹주를 담보하고 자수하는 것! 그렇다고 일제는 이들 겨우 살아남은 포로 항복 의병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해남군부터 연해 여러 읍을 가로질러 마산포까지 이른 봄부터 네댓 달 동안 도랑을 메우고 논밭을 깎아내고 벼와 보리를 베어가며 길을 새로 곧게 닦았다. 강제로 일꾼으로 부린 귀화인들이 거세고 말을 듣지 않아 길 주변이 시끄러웠다.” 『매천야록』 1910년 6월 기사에 있다. 일제는 이렇게 뚫은 해남ㆍ장흥ㆍ보성ㆍ낙안ㆍ순천ㆍ광양ㆍ하동ㆍ진주ㆍ마산까지 신작로에 ‘폭도도로(暴徒道路)’란 오명을 씌우며 죽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배반한 의병에게 죽어서도 헤어나기 힘든 오욕을 끼얹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이렇게 뚫린 길로 우리의 쌀과 면화, 누에고치를 실어가고 저들의 상품을 들여오고 사람들을 끌고 갔다. 땅을 빼앗긴 시절 길에는 겨레의 고혈(膏血)과 애환이 차곡차곡 쌓였다. 철도도 마찬가지였다. 철로 부지를 내놓아야 하였고 외지 사람이 누에 뽕잎 갉아먹듯 우리 상권을 잠식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기차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기차를 타면 ‘창가에 앉지 말라’는 어른의 당부를 들어야 했다. 또한 언덕 아래 놀다가 자동차에 돌을 던지거나 주먹밥을 먹이기도 하였으니 어쩌면 기억의 어두운 비탄을 놀이 삼았음에 틀림없다. * 법화마을, 강습재와 일심계 안규홍은 1879년 4월 보성읍 택촌 죽산 안씨 종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안호(安浩)는 보성강 언저리 서운정(棲雲亭)에서 인근 학자와 강론하며 북송 소강절(邵康節)을 흠모하던 처사였다. 선과 악의 미묘한 순간의 갈림을 밝힌 「기변(幾辨)」란 논설을 지었는데, 유배 중이던 정약용이 읽어보고 벗에게 ‘서운옹(棲雲翁)의 정확하고 분명한 뜻은 꿈에도 잊지 못하겠는데, 이미 세상을 떠나 애석할 따름’이라고 감탄할 만큼 심오하였다.8) 그러나 조부와 부친은 재산은 조금 있었을지 몰라도 별다른 학문이 없었다. 더구나 생모는 부실이었다. 당시 부실은 부군과 생전 인연이 끝나면 보통 본가를 떠났다. 얼마간의 재물을 받았지만 없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간혹 왕래하며 홀대라도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안규홍 또한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여덟 살에 생모를 따라 본가에서 삼십 리 떨어진 문덕면 법화마을로 옮겼다. 어릴 적에는 제법 재산 있는 진원 박씨 고모부네 사랑채에서 지냈으나, 차츰 철이 들며 행랑채 사는 생모와 동생을 위하여 남의 집 고용을 나갔다. 배울 생각은커녕 서른 되도록 가정을 꾸릴 형편도 못되었다. 성격은 강직하고 기상은 호방하였다. 간혹 마을 안산 동소산에 나무하러 다녀오며 길목에 있던 강습재(講習齋)를 서성댔을 것이다. 강습재는 1893년 후진 문인과 마을 사람이 한 마을 사는 정시림(鄭時林)을 위하여 공동 출연하여 세운 학당이었다. 정시림(1839∼1912)은 명망 높은 노사 기정진의 고족제자로 노사의 손자 기우만, 능주의 정의림(鄭義林), 합천의 정재규(鄭載圭), 이웃 가내마을 이교문(李敎文)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대학자였다. 그러나 무척 가난하여 자신의 학당을 갖출 수 없었던 차, 강습재가 조성되어 배움이 고팠던 인근 젊고 늙은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자 무척 기뻐하였다.9) “숲속의 늙고 젊은 사람들, 시서(詩書)를 익히는 나그네로세. 이 땅에 대청마루 서당이 이뤄졌으니, 서로 바위에 마주 앉아 예를 갖춥시다.” 안규홍은 강습재에서 비록 공부할 겨를이 없었겠지만, 오가는 길에 기둥에 적힌 글귀를 올려다보며 현성심(賢聖心)ㆍ천고성(千古聖)ㆍ일심천(一心天)ㆍ태극(太極)ㆍ성명(性命) 등에 기웃하였을 것이다. 강습재의 주련(柱聯)이 다음과 같다.
이중에서 ‘일심천(一心天)’에 번뜩하였을까?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일제가 머슴이나 빈농을 의병에 들지 말고 의병을 고발하라며 ‘자위대(自衛隊)’에 끌어들이고 조선인 순사 즉 ‘토왜(土倭)’가 동네를 휘젓고 다니고 일진회가 활개를 칠 때, 염재보(廉在輔)ㆍ이관회(李貫會)ㆍ임병국(任秉國)ㆍ손덕호(孫德浩)ㆍ정기찬(鄭基贊)ㆍ나창운(羅昌運) 등 위아래 마을 고용 살고 나무하러 다니던 벗들과 일심계(一心契)를 꾸렸다. “우리가 남의 집 머슴이라지만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데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는가!” 잠시 관동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그리 멀지 않는 순천 조계산에 둥지를 틀었던 강성인(姜性仁)과 기맥을 통하였다. 그러나 강성인이 의병을 빌미로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욕보이자 안규홍이 분연히 앞장서 처단하였다. “의병의 길이 아니다!” 이때 염재보가 제안하였다. “군대라면 장수가 없어서는 일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듣건대 안규홍은 나이는 비록 젊고 몸집은 작지만 담이 크다.” 또한 “우리는 본디 들판 백성으로 노고(勞苦)를 참지 못하여 죽기로 일어났으니 백성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안규홍은 맹주로 추대하고 행동강령을 제시한 것이다. 1908년 2월이었다. 건너 마을 살던 염재보(1868∼1911)는 1906년 여름 태인에서 창의한 면암 최익현이 순창에 들어가기 전에 곡성 옥과와 입면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따르지 못하여 통분하던 차였다. 평소 좋아하던 술과 사냥을 만류하던 종형에게 ‘말씀이 마땅하긴 하오나 눈을 떠서 산천을 돌아본다면 오늘이 어느 때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안규홍이 동소산에 의기를 세우자, ‘선비란 자들은 함께 일을 도모하기를 부끄러워했다.’10) 그런 중에도 어린 시절 자신을 사랑채에서 머물게 하고 생모에게 행랑채를 내준 주인집 큰 아들 박제현(朴濟鉉)이 머슴을 부릴 품삯과 식량을 낸 것처럼 꾸며서 군량과 군비를 쾌척하였고, 참봉 벼슬을 받은 안극(安極)은 강도에게 강탈당한 것으로 꾸며 집안에 있던 총포를 희사하였다. 마침 서울에서 왔다는 오주일(吳周一)이 십여 명 소년 병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동소산의 기세는 높았다.
1) 『紀語』 권9, 1907년 8월 20일
2) 『紀語』 권9, 1907년 9월 9일 3) 『紀語』 권9, 1907년 9월 13일 4) 『紀語』 권10, 1908년 2월 19일 5) 『紀語』 권10, 1908년 9월 7일 6) 『紀語』 권10, 1908년 7월 5일 7) 『紀語』 권11, 1909년 10월 27일 8) 『다산시문집』 제19권 「答李汝弘」. 여홍(汝弘)은 노론 산림 송환기(宋煥箕)ㆍ박윤원(朴胤源)의 문인으로 강진 만덕사에서 정약용을 만난 이래로 꾸준히 교류하며 인성과 예론을 토론하였던 이재의(李載毅, 1772∼1839)다. 9) 鄭時林, 『月波集』 권1, 「講習齋原韻 竝柱聯散句」 “林樊大小年 講習詩書客 此地堂廡成 相觀禮巖石” 10) 安鍾南 撰, 「安圭洪傳」 『澹山實記』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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