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19세기의 ‘동파열’과 소동파의 진적, [백수산 불적사 유기] 게시기간 : 2020-09-2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9-23 15:3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추사, 자하와 옹방강, 소동파> 1812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을 만나고 온 자하 신위는 그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옹방강에서 더 나아가 그가 가슴 깊이 사랑했던 소동파가 자하에게는 신앙이 되었다. 박제가가 ‘중국 매니아[唐魁]’라는 말을 들으면서 중국을 드나들어 지인들에게 신진기예의 김정희를 소개해두어서 추사는 중국에 가기도 전에 이미 베이징의 지식인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추사도 중국에 가기도 전에 벌써 중국의 서화사를 꿰뚫고 있었다. 추사가 4년 후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자하를 위해 전별해 준 10수의 장편 시는 거의 중국서화사를 요약한 듯하다. 그 서문이다. 자하 선생이 멀리 만 리를 지나서 중국에 들어간다. 보배롭고 훌륭한 경관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지만 소재 노인 한 사람을 만나본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불법을 말하는 자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내가 다 보았지만 부처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자하가 가는 길에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이다. 그래서 소재(蘇齋)의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에 쓴 절구에 차운하여 작별 시를 써올린다. 이 시 하나를 가지고 화두의 하나를 이룰 수 있으니 제 환공이 늙은 말로 길잡이 삼았듯이 나의 경험을 길잡이 삼아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추사는 중국으로 떠나는 자하에게 중국의 어느 경관이나 인물을 보는 것보다도 옹방강 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낫다고 극력 강조하였다. 추사의 안내대로 자하는 중국에 들어가서 곧바로 옹방강을 찾아간다. 담계 옹방강이 소장하고 있는 소동파의 진적 [천제오운첩]과 [시주소시] 송나라 때에 찍은 판본을 보고는 완전히 소동파에 매료되었다. 옹방강은 자신의 서재를 소재(蘇齋), 보소재(寶蘇齋), 보소실(寶蘇室)로 하고 자신의 소동파 벽을 과시하였다. 옹방강을 방문한 추사는 그러한 담계 옹방강에 매료되어 자신의 서재 이름을 담계 옹방강을 보배로 한다는 의미에서 [보담재(寶覃齋)]로 하였다. 추사의 뒤를 이어 담계를 방문한 자하도 옹방강에 푹 빠져서 자신도 담계를 보배로 하고 싶은데 이미 추사가 선점하였다. 어찌할 것인가. ‘나도 담계를 보배’로 한다는 의미에서 [우일보담재(又一寶覃齋)]를 재호로 쓰기도 하였다,
1 東坡笠屐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사와 지인들의 기대 속에 처음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는 자하 신위는 자신 또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추사의 권유대로 자하는 바로 옹방강을 찾아가 그의 서재에 있는 [천제오운첩], [시주소시] 송 판본 등 진적을 마음껏 볼 수가 있었다. 자하 또한 조선의 진적들을 가지고 가서 심정을 받기도 하고 옹방강과 그 문하들과 교류를 하였다. 자하 신위는 자신이 [소재]라는 재호를 쓰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옹방강이 자신과 소재와의 인연의 출발점과 종착점임을 말하였다. 소미재, 보소실, 소재는 모두 담계 노인이 거처하는 곳이다. 내가 왜 또 소재라고 하였는가? 대개 내가 전에 담계 노인의 집에 갔을 때에 천제오운 진적첩(天際烏雲眞跡帖)과 시주 소시 송참 잔본(施註蘓詩宋槧殘本)을 얻어보았다. ... 뒤에 상산(곡산부사)에 있을 때에 냉금전 종이를 얻어서 쾌설당이 모각한 천제오운첩을 임모하여 병풍으로 만들었다. ... 홍두주인이 일찍이 소동파 상 연배본(硯背本)을 가져왔고 나는 전에 송설본(松雪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원나라 사람의 입극본(笠屐本)을 이모한 것과 상관 주만소당본(上官周晩笑堂本)도 있으니 모두 소동파의 상이 넷이어서 모두 청풍오백간에 걸고 왕재청(汪載靑)이 그린 나의 초상을 옆에 걸었으니 바로 송목중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서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공의 문집을 그 위에 두고 냉금전에 쓴 [천제오운첩]을 뒤에 펼쳐두었다.
그림2-1 申緯 [倣梅道人扇面山水]
그림2-2 [방매도인 선면 산수]의 頭印은 [又一寶覃齋]이다. 자신의 방을 소동파 방으로 꾸미고 소재라는 재호를 쓴 것이다. 천제오운첩을 임모하여 병풍을 만들어 치고, 소동파 시집을 서안에 모셔두고, 또 소동파의 초상을 4종이나 얻어 걸고 자신이 옹방강을 방문하였을 때에 왕재청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을 옆에 걸었다. 옹방강을 통해서 이어진 추사와 자하의 소동파에 대한 흠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라는 재호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자하가 재호로 쓰고 또 자하는 익종, 헌종에게 중국 문화의 교양을 익히게 하였는데, 헌종은 그러한 문화를 모아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이라는 당대 전각의 최고품들을 모으기도 하였다. 자하는 담계보다 36년 연하이기 때문에 거의 사제 간의 의를 맺어도 될 정도의 연령차이가 있었다. 담계의 아들 성원(星原) 옹수곤(翁樹崑)과도 교유를 하였다. 섭지선, 왕여한은 나이 든 옹방강에 대신하여 조선 문인들의 상대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옹수곤은 조선에서 찾아온 문인들 중에서도 추사(秋史) 김정희, 자하(紫霞) 신위, 정벽(貞碧) 유최관(柳最寬)을 가장 기억하여 자신의 호인 성원까지 합하여 자신의 거처를 ‘성추하벽지재(星秋霞碧之齋)’라고 이름을 써 붙일 정도였고 또 이것으로 인장까지 새겼다. 자하, 추사만 소동파를 흠모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가 죽은 이후 벽파가 득세하고 시파 세력이 쫒겨날 때에,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간 심노숭(沈魯崇)이라는 인물도 소동파 매니아의 하나였다. 심노숭은 소동파를 유배 생활의 전범으로 하여 정신적인 힘을 얻었다. 유배지에서 심노숭은 동파의 문장을 정독하면서 울분을 해소하고 자신과 동생 심노암(沈魯巖)을 소식과 소철 형제에 빗대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노숭은 소동파의 근신하고 반성하는 태도와 정신을 모방하고 내면화하기도 하였다. 자하의 동파에 대한 흠모는 [소재]라는 서재를 꾸며 소동파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현상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매년 12월 19일 소동파의 생일에는 동파제(東坡祭), 배파회(拜坡會)라고 하여 소동파의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고 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 적벽부를 흉내 내어 칠월 16일에는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옹방강, 소동파 흠모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백수산 불적사 유기> 지금 소동파의 진적(眞跡) [백수산 불적사 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이하 [유기])가 공개되고 있다. 서예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민 가는 파평 윤씨 후손으로부터 입수하였다고 한다. 파평 윤씨 윤원무(尹元茂)는 이언충(李彦冲, 1273~1338)의 아들 이광기(李光起)로부터 양도를 받았고, 이언충은 공신으로 책봉될 때에 충숙왕으로부터 하사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유기]는 1094년에 썼다. 소식이 말년에 혜주(惠州)에 유배 생활을 할 때에 그곳 지주(知州)인 첨범(詹範)의 초청으로 가상(柯常), 임변(林抃), 왕원(王原), 뇌선지(賴仙芝)와 함께 백수산 불적사에 놀러가서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폭포 아래에서 바람을 쏘이다가 고개에 올라가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온 것이다.
1095년(소성2, 송 철종2, 고려 헌종1) 3월 4일에 첨 사군이 나를 초청하여 백수산 불적사를 유람하였다. 탕천에서 목욕하고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서 바람을 쏘인 뒤 중령에 올라 폭포가 나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가마를 타고 산을 나와서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산을 구경하였다. 나그네들과 이야기도 하고 느지막하게 여포에서 쉬기도 하고 대숲 그늘 아래에서 지팡이를 끌고 걷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여지 열매가 연밥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나이드신 분이 여지를 가리키며 나에게 “이 열매는 먹을 수 있으니 공께서는 술을 가지고 다시 오시오”라고 하여 마음 속으로 기뻐서 그러겠다고 하였다. 글을 써서 날짜를 기록한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가상, 임변, 왕원, 뇌선지이다. 첨 사군은 이름이 범이고 나는 소식이다.
말미에는 ‘東坡居士 眉山 蘇軾 書 [東坡居士] [子瞻]’라고 관지(款識)를 하였다. 함께 간 사람 중에서 가상이라는 인물은 확인할 수 없으나, 임변은 같은 혜주의 박라 현령(博羅縣令)이었고, 왕원과 뇌선지는 소동파가 유배지에서 더불어 함께 지낸 젊은 벗들이었다. 셋째 아들 소과(蘇過)와 뇌선지, 수재 왕원, 승 담영, 행전, 도사 하종일과 함께 나부도원 및 서선정사에 놀러갔는데, 소과가 시를 짓자 그 시에 화운하여 첫째, 둘째 아들인 소매(蘇邁), 소태(蘇迨)에게 준 시이다. 이후 여지 밭을 지나다가 부로가 술을 가지고 와서 안주로 하라고 초청하자 이에 응한다는 짧은 줄거리이다. 이 문장은 [도연명의 귀전원거에 화운함(和歸園田居) 6수]의 서문 내용과 같다. 마지막 같이 간 사람들을 나열한 부분만 없다. 소동파는 공자가 제자들과 삼월 삼짓날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바람을 쏘이고 돌아오겠다는 증점의 취향 그리고 도연명의 전원 생활을 흠모하였다. 소동파가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화도연명시(和陶淵明詩)]는 책 한 권이 될 정도였다. [유기] 진적과는 별도의 종이에 조맹부의 아들인 조옹(趙雍, 1289~1369),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제발(題跋)이 있다. 조옹의 제발에서는 소식이 웬만해서는 글씨를 잘 써주지 않았다는 것, 몇 잔만 마셔도 취하여 코를 골며 잠을 자다가 깨서는 비바람처럼 글을 써서 신선처럼 살았다고 하고 그의 필법은 ‘빼어나고 굳세며 무궁한 전완의 묘(秀勁有無窮轉腕之妙)’가 있어 조옹 당대인 원대의 글씨와는 비교를 할 수 없다고 칭양하였다. 황공망은 소동파의 이 글씨가 마치 ‘화산의 세 봉우리가 별처럼 우뚝 선 것(華嶽三峯 卓立參昴)’과 같다고 칭양하였다. 다른 감상기로는 강리기(康里躨), 주원옹(周元翁)이 만송령(萬松嶺) 혜명선원(惠明禪院)에서 보았다는 기록, 하동(河東) 장원증(張源曾)이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원옹은 황정견과 동시대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배관기가 조옹이나 황공망의 배관기보다 오래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黃庭堅, [古風寄周元翁]) 소동파 진적 [유기]는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다음 황제인 휘종 선화(宣和, 1119~1125) 년간에 황실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찍힌 소장인 [선화(宣和)] [내부도서(內府圖書)] [내부도서지인(內府圖書之印)]으로 보아서 그렇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소장인 또는 감상인(鑑賞印)은 [위씨지보(危氏至寶)] [위소(危素)] 인이다. 특히 [위소] 인은 다른 소장인의 인주 색깔과 달리 깊은 색을 띄고 있어서 위소와 [유기] 진적과의 깊은 인연을 말해주는 듯하다. 위소(1303~1372)는 원 나라 말 명 나라 초기의 역사학자, 문학자로서 원 왕조에서는 송(宋), 요(遼), 금(金)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보물 제107호로 지정된 [고려 임주 대보광선사 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찬자(撰者)로 알려져 있다. 대보광선사비는 고려말 승려 원명국사 충감(冲鑑)의 탑비이다. 비문은 충감의 제자이자 당시 선원사(禪源寺) 주지였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위소에게 부탁해서 지은 것이다. 게굉(揭汯)이 썼으며, 주백기(周伯琦)가 전액을 썼다. 이외에 주목할 만한 소장인, 감상인으로는 [사씨 가전 한원 수장 서화 도장(史氏家傳翰院收藏書畫圖章)] 인이다. 사씨는 명초의 대수장가 사감(史鑑, 1433~1496)으로 추정된다. 그는 오강(吳江)의 대 수장가로서 그의 수장품은 당대의 서화가 겸 수장가인 심주(沈周)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수장인, 감상인을 살펴보건데, [유기] 진적은 선화 년간에 송 황실 내부에 들어갔다가 원대에는 위소가 수장을 하였고 명대에 들어와서는 사감 가의 수장품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추정해볼 때에 [유기] 진적은 조선 초중기 이후 어느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3-1 [유기] 소장인(앞부분) 네모 안이 [危氏至寶] 인
그림3-2 [유기] 소장인(뒷부분) 네모 안이 [危素] 인 19세기 이후 동파제, 배파회라는 소동파 열풍이 불 때에도 소동파의 [유기] 진적은 비장(秘藏)으로 숨을 죽이고 있다가, 해방 후 [소완재(蘇阮齋)] 유희강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소동파를 보배로 여긴 [보소재], [소재]를 재호(齋號)로 쓴 옹방강, 옹방강을 보배로 여겨 [보담재]라는 재호를 쓴 김정희, 역시 또 옹방강을 보배로 여겨서 [우일보담재]라는 재호를 쓴 신위를 거쳐, 옹방강과 김정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소완재 유희강의 진장(珍藏)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