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우리 이제 비석으로 만났구려! ② 게시기간 : 2020-10-06 07:00부터 2030-12-16 20:20까지 등록일 : 2020-10-05 10: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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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산의 비장(飛將) 동소산에서 의기를 세운 안규홍 의병은 곧장 익숙한 초로(樵路)를 타고 득량면과 조성면 사이 비둘기재에 매복하였다가 파청역(巴靑驛)에 주둔한 일본군 2명을 죽였다.1) 1908년 4월 ‘파청승첩’이었다. 그리고 동복 대원사로 물러났다가 운월치(雲月峙)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보성 노동면 봉화산으로 피했다가 8월 장흥군 장평면 진산(眞山) 산중에서 온종일 격전을 벌린 끝에 승리를 일궜다. ‘진산대첩’이었다. 어느덧 농민들은 환호하며 음식을 가져오고 의복을 마련해주었으며 그동안 냉담하였던 유생들도 감탄하고 칭송하였다. “비장(飛將)이 나타났다.” 또는 “날쌘 표범이다.” 당시 안규홍 의병의 명성은 높았다.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에 ‘머슴꾼 의병’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는데 다소 가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서 머슴으로 있는 사람 하나 있는데, 수십 년을 부지런히 일하고도 돈을 받지 않고 매우 신실하므로 주인이 사랑하며 이웃 동네가 칭찬하더니 작년 9월경에 졸연히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더니 근처 머슴꾼 백여 명을 모집하여 연설하기를 ‘우리가 남의 집의 고용이나 국민이기는 일반인데 나라일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히 살리오!’ 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호남 남일파와 합세하였다더라.” ‘남일파’는 호남 제일 의병이 되자던 함평 출신 심수택 의병으로 능주ㆍ장흥 등지까지 반경을 넓히며 종횡무진 하였다. 안규홍 의진 또한 각 면에 군자금을 기부해 달라는 통지를 보낼 만큼 당당하였고, 경성 부자에게 들어갈 소작료를 압수하고 일진회원을 처단하였으며 가택연금 중인 복내면 살던 부자 의병장 임창모(林昌模)을 구출하여 중군장으로 영입하였다. 임창모는 1907년 봄 능주 쌍봉산에서 결성된 양회일의 쌍산의소에 참여하였다가 화순 도마치 전투 현장에서 체포되어 신안 지도에서 유형을 살다가 특사로 풀려났지만 당시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2) 그리고 1909년 5월 18일, 복내면 장날 헌병분견소가 지척인데도 장터를 순찰하던 일본군과 척후병을 폭살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원봉(圓峯)승첩’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는 짧았다. 무섭게 조여드는 포위망, 야수적 학살 만행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때 5백여 명이나 되었던 의병진을 작게 나눠가며 보성 회천 바닷가로 빠져나가 득량만을 건너 배를 타고 고흥으로 갔다가 여자만을 넘어 들어와 순천 조계산 자락을 넘나들었다. 한때 의병을 해산하고 상경하라는 순종의 밀칙이 내렸다는 소식에 흔들리기도 하였다. 임창모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적군들이 조정하고 강제하여 나온 거짓 칙명이다.” 일단 안규홍 본진과 헤어진 임창모는 복내면 흑석산 조양 임씨 재실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아들 그리고 소휘천(蘇輝千) 등과 함께 현장에서 학살당하였다. 1909년 8월 21일이었다. 안규홍은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가다가는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만 끼치게 되니 나의 죄가 크지 않겠는가!” 나창운(羅昌運)ㆍ이관회(李貫會)ㆍ안택환(安宅煥)ㆍ임정현(任淨鉉)ㆍ송기휴(宋基休)ㆍ임창모ㆍ소휘천 등 검붉은 산하 잠들지 못한 동지들의 넋을 어찌 달랠까 하였을 것이다. 결국 맹주를 내려놓고 광양 백운산에 들어가 훗날을 기약하겠노라며 법화마을 모친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갔다가 자수 의병의 밀고로 붙잡혔다. 1909년 9월 8일이었다. 그리고 광주를 거쳐 대구형무소에서 1911년 5월 5일 염재보ㆍ정기찬ㆍ손덕호와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안규홍 32살, 염재보 42살, 정기찬 31살, 손덕호 44살이었다. 안규홍의 유해는 거적에 쌓여 대구형무소 야산에 묻혔다가, 문중에서 후사를 세우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순국 12년 만인 1923년이었다. 이때 양자가 「가장(家狀)」을 꾸리고 안종남(安鍾南)이 「전(傳)」을 지었다. 안종남은 유교 가치를 수호하고 향약 전통을 전수하던 복내면 진봉리 죽곡정사(竹谷精舍)의 부강장(副講丈)이었다. 이렇듯 아릿한 세월 법화마을 강습재를 이끌던 정시림은 우리 강산을 삼킨 일제가 선비의 자존을 꺾고자 ‘은사금’을 내리자 고흥 바닷가로 숨었는데 보성 헌병대가 잡아들여 거듭 강요하니 ‘죽지 못한 신민이 어찌 일왕의 은사금을 받으랴! 내 실오라기 목숨을 끊어가라’는 항의 서한을 보내고 그만 몸져누워 깨어나지 못하였다.3) 1912년 3월 29일 향년 75세였다. 한편 동소산 의병에게 군량과 군비를 모아주었던 고모네 큰 아들 박제현(1872∼1934)은 한참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 마을 밖을 나서지 않고 살다가 뒷산에 묻혔다. 안규홍의 유해가 안장될 때에도 부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부활의 노래 광복 2년, 1947년 12월 죽곡정사의 강장 안규용(安圭容)이 ‘의리가 이래서는 아니 된다.’며 동소산 의병을 추념하는 비석을 세우고자 보성 유림의 공론을 모았다. 이때 안규용은 머슴 살던 안규홍의 호를 ‘담산(澹山)’이라 하고 「순의사실(殉義事實)」을 짓고서 서울 도봉구 번동 살던 김영한(金甯漢)에게 비문을 의뢰하였다. 바로 최초 승첩의 현장과 가까운 득량면 예당리 덕산저수지 옆 ‘의사안공파청승첩비(義士安公巴靑勝捷碑)’인 것이다. 안규용(1873∼1959)은 일찍이 정시림의 강습재에서 학문을 익히고 송시열의 9세손으로 척사원로인 송병선(宋秉璿)을 스승으로 섬긴 이래로 평생을 죽곡정사를 무대로 유학의 가치와 의리를 강학하고 실천한 당대 학자로 당시 죽곡정사는 『주문지결(朱門旨訣)』 『이자학칙(李子學則)』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비롯하여 지난 선비의 흩어진 문헌을 편찬 간행하였던 전통 학문의 중심과 같았다. 『주문지결』은 성혼(成渾)이 초학자를 위하여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에서 긴요한 문장을 뽑아놓은 주자학 입문서이고, 『이자학칙』은 안규용이 전통의 자율적 강학 원칙과 방식을 준수 전파하기 위하여 이이(李珥)의 「학교규범(學校規範)」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 「은병정사약속(隱屛精舍約束)」 등을 묶었으며, 『향례합편』은 정조의 명을 받고 규장각이 ‘향음주례’와 ‘향사례’ ‘향약’ ‘가례’ 등을 집성한 조선 예서(禮書)의 결정판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서당 인가’를 받도록 강요하며 죽곡정사를 압박하자 지리산 문수계곡에 들어갔던 안규용은 광복이 되자 ‘죽지 않으니 오늘에야 사나운 짐승 망하는 꼴 보네. 지금 비록 잠시 통쾌하지만 감춰진 근심 끝이 없어라’ 하다가, 죽곡정사 벽면에 ‘하늘땅의 길은 만물을 살리는 마음 天地之道 生物爲心’ 여덟 글자를 적어놓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삼켰다.4) 선비의 자세를 적은 다음의 글은 사람다운 길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새김이 되었다. “선비에게는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없고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 귀하고 크다고 반듯이 선비가 아니며 천하고 작다고 선비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선비란 도덕과 인의를 밝히는 사람이다. 진실로 크게 꿰뚫어 보며 굳세게 뜻을 세우고 값지고 드문 뜻을 마음에 품는다면 우주 가운데 우뚝하게 설 수 있다.”5) 한편 안규용의 의뢰로 파청승첩비의 비문을 지은 김영한(1878∼1950)은 척화명신 김상헌 의 후예로 약관에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내다가 을사늑약 이후 ‘망국대부(亡國大夫)’를 자처하며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 세조의 찬탈에 분노한 사육신 그리고 을사늑약 때 자결로서 항의한 민영환 등 충의도덕을 추모 선양하는 많은 글을 지었던 문사였다. 그의 양부 김석진(金奭鎭, 1843∼1910) 또한 귀족원경ㆍ판돈령부사까지 올랐다가 일제가 남작을 내리자 더 이상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며 자정 순국하였다. 이렇듯 우리 전통학술과 생활방식이 구학(舊學)과 구습(舊習)으로 치부되던 시절을 살며 망국의 유민을 자처하였던 학인들은 차마 잊어서는 아니 되는 의열 충절을 기록함으로서 기억하는 자가 미래를 열어간다는 교훈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생전에 경륜을 펼치기는커녕 자식을 위하여 작은 재물조차 남기기 어려웠던 위정척사 구(舊)학인은 우리들의 여전하고 지금도 소중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문병란 시인은 1983년 12월 31일 탈고한 서사시 『동소산의 머슴새』를 이렇게 마감하였다. 역사가 피 흘리는 / 조국의 산하 / 두 동강난 땅의 / 동소산 기슭에 와서 / 아직도 못다 한 노래 / 또 다시 피를 토하는 새여 / 살아남은 소년 죄수 / 바우의 눈동자 속에서 / 우리 모두의 가슴 / 다시 씨 뿌리는 / 동소산의 기슭에서 / 무등산 봉우리 / 황토빛 무덤 속에서 /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에서 / 또 다시 부활하는 민중의 새 / 오, 안담살이 대장이여 / 동소산의 머슴새여.
처음 ‘파청승첩비’를 찾았을 때는 안내표시도 없고 샛길마저 옹색하여 서운하였는데, 요즈음은 입구를 단장하고 물레방아 돌고 정자까지 호젓한 작은 공원을 꾸며 놓았다. 다행이다. 또한 안규홍이 사후에 받은 호 담산(澹山)이 담살이의 음차라고만 여겼는데 최근 당신이 살았던 목마른 사슴 물 마시는 갈록음수(渴鹿飮水) 형국의 법화마을에 맑은 샘 정담(井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선 맑은 샘 마을에 살았다는 뜻을 아울러 담았겠다 싶어 반가웠다.
* 두 개의 비석 백범 은거지 쇠실마을 가는 길 ‘쇠실쉼터’ 뜰 한편에 ‘백범김구선생은거추모비(白凡金九先生隱居追慕碑)’가 있다. 쇠실마을 떠나며 건넨 「이별이 어려워라 離別難」을 적어놓았다. 그 옆에 또 하나의 비석, 주인공은 박문용(朴文鎔)이다. 박문용은 1882년 1월 15일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문인으로 광해군의 사부를 거치고 현감으로 은퇴하여 노구에 임진의병을 일으킨 박광전(朴光前)의 후예였다. 본관은 진원, 가학의 전통이 깊었다. 동국대학교 전신으로 1906년 5월 개교한 명진학교(明進學校)에 다니던 그해 겨울 기말시험에서 우등생으로 뽑혔고, 졸업 후 평안도를 거쳐 봉천ㆍ하얼빈ㆍ블라디보스토크를 돌아 연길의 한명의숙(韓明義塾)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11년 고향에 돌아왔다.6) 그때까지 소식을 몰라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한 고향사람들은 일본어ㆍ중국어ㆍ영어ㆍ러시아어까지 능통한지라 놀랍고 반가웠다. 박문용은 2년 정도 고흥군 소록도 넘어 거금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보성군 복내면 면장을 거쳐 겸백면 면장으로 옮겼다. 당시 신식 면장은 수령과 향청의 명령을 마을에 단순 전달하는 정도의 이전의 면임(面任)과 달리 세금 징수, 면 재정 운용 등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다. 1913년 12월 그간 면에서 보관하던 327원 6전의 공금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1934년 항주시절 임시정부의 세입예산이 특종수입을 제외하고 5594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보통 액수가 아니었다.7) 박문용은 박환(朴桓)으로 변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3ㆍ1운동 직후인 4월 18일 천진에서 결성된 ‘변치 말고 독립에 목숨을 바치자’는 불변단(不變團)의 부단장 겸 의사부장을 맡았고 그해 10월 30일 박은식이 기초하고 발표한 「대한민족대표독립선언서」 일명 ‘제2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김구ㆍ김철ㆍ명제세 등과 함께 30인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당시 ‘민족의 자력으로 독립할 수 없으니 열강에 호소하자’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임시정부가 큰 파문에 휩싸였을 때였다. 더구나 본국에서는 ‘일본의 제국의회에 조선대표를 파견하자’ 혹은 ‘조선의회를 설립하여 자치를 실현하자’는 참정권운동 혹은 자치운동이 고개를 내밀었다. ‘최후 1인까지 절대독립을 쟁취하자’는 3ㆍ1정신을 훼손하는 타협주의가 아닐 수 없었다. ‘제2독립선언’은 일제와 타협하거나 외세에 의탁하는 일체의 경향을 배격하며,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즉각적인 독립만이 민족의 유일한 요구’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할 것과 국내동포에게 재차 만세시위운동을 호소하며 다음의 ‘공약 3장’을 채택하였다. “질서를 엄수하여 난폭한 행동이 없도록 할 것.” “자위(自衛)의 행동이라도 부인, 어린이, 늙고 병든 자는 절대 해를 끼치지 말 것.” “전 국민 일치로 독립의 요구를 강하게 표하되 최후의 1인까지 할 것.” 1920년 1월 박문용은 임정과 국내의 연락을 담당하는 특파원을 자임하고 서울로 들어왔다. 충청도 청양 출신 한우석(韓禹錫)을 만나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 김철을 비롯하여 이동휘ㆍ이동녕ㆍ이시영ㆍ안창호 등 임정 요인을 소개하며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와 같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행동하자며 의기투합하였다. 한우석 또한 흔쾌하였다. “우리에게 없던 정부가 10년 만에 들어섰으니 반갑다. 보고 싶다.” 한우석(1890∼1950)은 민종식(閔宗植)의 호서의병의 소모관으로 1906년 홍주성을 점령하는데 앞장섰고, 전라도 태인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을 실질적으로 이끌다가 대마도에 유폐되어 돌아온 임병찬(林炳贊)이 결성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하고 또한 울산 출신 박상진(朴尙鎭)을 도와 광복회에서 활동하다가 압록강 건너 망명하여 당시는 무역에 종사하던 중이었다. 박문용은 상해에 갔다가 돌아온 한우석과 함께 광주로 가서 일곡동 사는 부자 노진영(盧軫永)을 직접 만나 군자금 6천원을 요구하여 그 중 1천원을 받아내서 압록강 너머에서 육혈포와 실탄 등을 사들이며 동지를 끌어들었다. 이들은 한국 시찰을 위하여 방한하는 미국 의원단이 경성역에 도착하는 8월 24일을 D-Day로 잡았다. 이때 미국 의원단 환영식장에서 정무총감 이하 이완용ㆍ송병준 같은 친일파 거물을 응징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던 중 8월 22일 한우석이 ‘결사대’를 같이 하기로 약조한 김상옥(金相玉)에게 무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압록강에서 반입된 무기의 향방을 추적하던 일경에게 체포되면서 그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박문용은 지난 날 ‘세금 횡령’까지 병합하여 7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4년 고문으로 망가진 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내 운명하였다. 1927년 7월 20일, 향년 46세였다. 한편 한우석은 8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의병에 가담한 사실이 탄로나 형이 가중되어 모두 19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그런데 한우석에게 무기를 받으려다 날쌔게 몸을 피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갔던 김상옥은 1923년 1월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동경으로 가는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여의치 않자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열흘 동안 일경 수백 명과 홀로 시가전을 벌리다가 마지막 한 발 총탄으로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향년 34세,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하고 야학에서 가난한 청소년을 가르치고 철물상회를 열고서는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에 열성이었었다. 박문용은 아스라이 잊혔다가 생질 조철환 옹이 정부기록보존소를 찾고 『동아일보』 등을 들추며 공적을 밝혀내자 서영진 기자가 『전남일보』 1979년 2월 28일에 대서특필하였다. “기미독립만세 60년 만에 밝혀진 ‘제2의 독립선언’ 주역” “비석 하나 세워지지 않은 그의 묘소, 쓸쓸하게 오막살이 사는 그의 아내” 이때 임씨 부인은 부군이 특파원으로 왔을 때, 서울로 올라가 ‘쫓기는 남편과 불안하게 지내며 뒷바라지 하던 시절이 행복하였다’고 회상하였다. 1980년 8월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자 1982년 봄 보성군에서 성금을 모으고 권용현(權龍鉉)의 비문을 받아 ‘의사박공기적비(義士朴公紀蹟碑)’를 세웠다. 권용현(1899∼1988)은 합천군 초계면 출신으로 부안 계화도에서 강학하던 척사유림 전우(田愚)에게 배웠는데 죽곡정사를 자주 방문한 인연이 있었다. 1990년 ‘백범은거추모비’가 세워지자 당시 조철환 옹은 감동하였다. “생전에 백범을 모시더니 이제 다시 비석으로 만나시게 되었구나!” 다시 찾은 쇠실마을, 백범이 낮에 숨었던 뒷산과 밤에 목욕하였다는 샘터까지 둘러보았다. 백범을 받아들인 후한 집 종손은 ‘물이 좋아 객지 나간 사람이 오면 항상 받아간다’고 한다. “백범표 샘물이네요.” “그럼 저 뒷산 매실로 담은 술은 백범표 매실주라?” “백범이 찾아와서 걸터앉아 있는 사진, 보성군에서 주문 엽서로 만들어 판매하면 좋지 않을까?” “들어오다 보면 굴다리가 너무 어두운데, 백범이 공부 가르치는 밝은 그림을 그려놓았으면 좋겠다.” 지난 세월의 간격이 그만큼 좁혀있었다. 아니, 기억하는 자들을 위한 미래가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1) 파청(巴靑)은 파청(波淸)이라고도 적는다.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제14권, ‘暴徒에 關한 件 報告’ 융희 3년(1909) 4월 3) 『월파집』 권3, 「抵日憲兵所」 4) 『회봉유고』 권1, 「倭亡」 5) 『회봉유고』 권5, 「士說」 6) 『황성신문』 광무 10년(1906) 12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사자료집성』 3권, 「在留韓人에 관한 사항문답」(局子街副領事의 報告) 1910년 3월 8일. 7) 국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 大韓民國臨時議政院會議錄』 「제27회 議會記事錄」(2), 1934년 10월.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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