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어머니께서 절역의 아이에게 머리카락을 부친 뜻은? 게시기간 : 2020-10-0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10-06 10: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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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지었다. 얼른 봐도 일단 작품의 길이가 길어 전체를 보이는데 사실 망설였다. 그렇다고 어느 부분을 뺄 수가 없어서 그냥 전체를 다 보인다. 굳이 한시의 형식면에서 논의한다면, 이 작품은 오언고체시에 해당한다. 유희춘이 한 편의 시를 짓는데, 오언고체시의 형식을 빌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 유희춘에게 부쳤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받은 유희춘은 마치 어머니를 마주 대한 듯이 착각하였다. 그래서 봉함을 뜯고 재배를 올림에 눈물이 하염없이 나와 턱까지 흘러 내렸다. 유희춘 자신이 어머니께 가지 못하니 반대로 어머니께서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멀리 떨어진 아들에게 부친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유희춘은 자신의 정수리에 난 머리카락을 뽑아 어머니께 답장처럼 부치려고 한다. 이때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뽑으니, 마치 창자를 뽑은 듯하였다. 그리고 그 뽑힌 머리카락 중에는 희끗한 것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아들이 노쇠해졌다 놀랄 어머니를 생각하여 일부러 뺐다.”
사실 이 시는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 갔을 때 어느 날 해남(海南)에 계신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부쳐오자 감정이 북받쳐 지었다. 유희춘은 1545년(명종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 때 사림으로서 관직에서 물러났고, 2년 뒤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때 제주도로 유배의 명이 내려졌다. 그런데 제주도가 고향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재조정되는데, 그 결과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간다. 종성은 겨울철이면 북풍한설이 계속 몰아치는 추운 곳으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태어난 유희춘으로서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두컴컴한 긴 터널을 가는 듯한 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시간들……. 유희춘은 그러한 기약 없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는데, 유배 현지인들을 교육시켜 교화시키고,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여 학문의 수준을 한껏 올렸다. 유희춘은 하염없는 유배 생활 중에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는 늘 궁금하였다. 특히, 어머니는 연세도 많으셔서 언제 세상을 뜰지 알 수 없으니, 더욱더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마치 편지처럼 부쳐왔으니, 그것을 받아든 유희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작품의 7,8구에서 “봉함을 뜯고 재배 올림에,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른다”라고 말한 것을 통해 그때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얼굴을 대신한다고 믿었다. 가령, 조선 중후기 남인(南人)의 우두머리로 알려진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예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허목에게는 나이 40세가 넘어 낳은 딸이 있었다. 이 딸은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유순하였고, 놀고 장난할 때에도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친척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런데 여덟 살이 된 해에 그만 세상을 뜬다. 허목은 입관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 관속에 넣었는데, 이때 슬퍼하면서 “이승과 저승으로 영원히 멀어졌으니, 이것으로 나의 얼굴을 대신한다.”라는 말을 하였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얼굴을 대신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희춘의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먼 유배지까지 부친 뜻도 허목이 막내딸의 관에 수염과 머리카락을 넣은 뜻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신체의 일부분인 머리카락을 부쳐 얼굴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희춘은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잘라 부친 것은 마치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깨물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작품 9구에 “손가락 깨물어도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囓指久未歸〕”라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증삼은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도 유달리 부모에 대한 효성심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해에 증삼이 공자와 함께 초나라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증삼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스승 공자께 하직하고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여 증삼이 어머니에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라고 묻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를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깨물었다.〔思爾齧指〕”라고 하였다. 즉,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난 증삼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자 그 마음이 증삼에게까지 전달되었고, 마음을 전달 받은 증삼은 갑자기 깜짝 놀랐던 것이다. 증삼의 효심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일화이다. 유희춘은 어머니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부쳤으나 증삼처럼 곧바로 달려갈 수 없어서 “손가락 깨물어도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라고 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유희춘은 유배 가기 전에도 어머니에 대해 애잔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유희춘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우선 말하자면, 전남 나주 출신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딸이다. 최부는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을 지은 사람으로, 특히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하고 대신들을 비판하다가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으며, 이후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하였다. 유희춘의 어머니는 또한 최부에게 학문을 수학했던 유계린(柳桂隣)과 혼례를 올려 유성춘(柳成春)과 유희춘을 낳았다. 그런데 유성춘은 유희춘의 나이 열 살 때 세상을 떴고, 유계린은 유희춘의 나이 열여섯 살 때 운명하였다. 다시 말해 유희춘의 어머니는 사화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고, 큰아들이 자신보다 앞서 죽었으며, 남편도 먼저 세상을 떴다. 이러한 불운을 겪었던 분인지라 유희춘 입장에서는 애잔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유희춘이 머나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으니 마음이 얼마나 심란했겠는가?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이 과연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항상 가졌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얼굴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을 잘라 유희춘에게 보냈을까. 유희춘도 자신의 정수리에 난 머리카락을 뽑아 어머니께 보내드리려 봉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노쇠해진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실까 두려워 희끗한 머리카락은 일부러 뺐다. 유희춘의 어머니를 향한 세심함이 엿보이는 구절로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다. 유희춘의 어머니는 결국 유희춘의 나이 46세 때 세상을 떴다. 이때 유희춘은 종성에서 한창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얼마나 슬퍼했을 것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도 생존해 계실 때 보내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통곡했을 것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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