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최초의 향약 시행 기록, 광주 부용정 게시기간 : 2020-10-10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10-08 11:1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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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자치 규약, 향약 광주 부용정은 조선시대 들어 처음 향약을 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16세기 초중반 사림파의 성장과 함께 향약 보급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1517년(중종 12)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은 「여씨향약」을 간행 반포하고, 이어서 『언해본여씨향약』을 내기도 한다. 1519년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와 한성 5부, 각 동 약정에게 보급하기도 하지만 사림파의 좌절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런데 공식적인 추진보다도 100여년 앞서 광주에서 시행하였고, 그 무대가 바로 부용정이라는 것. 정조 말년 경(1798~1800)에 편찬된 『광주목지』(규 10800)의 인물조 김문발(金文發, 1358~1418)항에 처음 등장한다. 김문발은 세종조에 은일로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젊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부용정을 건립하고 고을 사람들과 함께 ‘남전지제(藍田之制)’와 ‘백록지규(白鹿之規)’를 행하여 풍교를 장려하니, 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1) 김문발은 1418년 세상을 떠나므로 그 이전에 부용정에서 향약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약실시를 공식적으로 추진한 중종 초 보다 훨씬 앞서 광주에서 실시했다는 기록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전지제 백록동규 몇 가지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김문발의 졸기(1418년 4월 4일)를 간추리면 “김문발은 광주 사람으로서 전라도 원수를 따라가 왜구를 남원·보성에서 쳐서 공로가 있었다. 여러 번 승첩으로 탁용되어 경기·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수군 도절제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청렴하고 간묵하였다.”는 내용이다. 태종조의 행적이 뚜렷하다. 그리고 1879년에 편찬된 『광주읍지』 재학(才學)조에 “김문발은 태종 때 은일로 형조참판, 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일찍 관직에서 물러나 원지(園池)를 가꾸어 부용정이란 편액을 걸고 고을 사람들과 함께 ‘남전지제’와 ‘백록지규’를 행하여 풍교를 장려하니, 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1798년께 『광주목지』의 “세종조 은일 운운”은 태종대로 보아도 될 성 싶다. 『태종실록』의 졸기에 황해도관찰사, 1879년 『광주읍지』에 “태종대 은일”, “황해감사” 등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은 ‘남전지제(藍田之制)’와 ‘백록지규(白鹿之規)’. ‘남전지제’란 11세기 초의 중국 북송 때 향촌을 교화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으로 「여씨향약」을 말한다. 산시성[陝西省] 란톈현[藍田縣] 여씨 문중에서 도학으로 이름높던 여대충(大忠)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뒤에 주자(주희, 1130~1200)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주자증손여씨향약』이 만들어졌다. ‘백록지규’란 주자가 백록동에서 제정한 학규이다. 기본적으로 유교이념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향리의 미풍양속을 기하려는 교화적 목적을 지닌 자치규약이었다. 거기에 강학이 주가 되는 학규도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 향약 기록 우리나라에 여씨향약 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이 전래된 것은 성리학이 수용되었던 고려말 조선초라 생각되어지고, 중종조에 사림파의 향약 보급 운동으로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실정에 맞는 조항들이 들어가면서 정착되었을 것이고, 이를 ‘조선적 향약’이라고도 한다. 이 단계에서 두 가지를 살펴야 한다. 먼저, 향약이 내포하고 있는 기본적인 이념은 여씨향약 전래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오래된 습속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향약의 기본은,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의 민간협동체로서 ‘계(契)’가 있다. 고전 기록에 ‘향촌결계(鄕村結契)’라는 용어도 보인다. ‘촌계’라고도 한다. ‘계’는 삼한시대에까지 소급되는 공동행사의 하나로 상호부조라는 주된 목적 아래 취미 또는 생활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나 의례, 모임 등이 성행하였다. 이 같은 ‘촌계’의 전통이 규약화 된 전래 향약과 습합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종조 향약 보급운동 이전부터 지방에서 향약은 적지 않게 활성화되고 있었고, 그 맨 첫자리가 광주 칠석동 부용정 향약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칠석동 부용정 향약의 구체적인 기록이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향약의 기록은 처음 설행한 시기나 주도인, 규약, 조목, 명안, 운영문서 따위를 들 수 있는데, 전하지는 않는다. 김문발은 태종대(1401~1418 재위) 활동한 인물이지만, 당대보다 훨씬 뒤, 380여년이 지나서 정조 말년 경(1798~1800)의 『광주목지』에서 보인다. 이 광주 목지의 기록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기록을 보면, ➀젊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➁부용정을 건립하고, ➂고을 사람들과 함께 ➃‘남전지제(藍田之制)’와 ‘백록지규(白鹿之規)’를 행하여 풍교를 장려하니, ➄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부용정과 칠석 모정 김문발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은 기록상으로 보면 1411년(태종 11) 3월에서 1412년 12월 사이 1년 10개월간, 1418년(태종 18) 1월부터 4월 사이 3개월간이다. 1418년은 예순 한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1411년~1412년 사이가 가장 가깝다. 두 번째로 부용정의 건립이다. 이 부용정이 지금의 규모처럼 목조 건축물로서 지어 졌는가.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부용정이라 명명했는가를 풀어 보아야야 할 것이다. 창건기나 건립 상량문 등 부용정 시초에 대한 문화정보는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약간 후대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는 있겠다. 1568년의 부용정을 찾은 광주목사 송천 양응정(1519~1581)의 시 제목이 ‘제칠석모정(題漆石茅亭)이다. ‘칠석’이라는 소재지 땅이름과 ‘모정’이라는 건조물. 부용정이 건립되었다는 태종대로부터 150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모정(茅亭)’이라 한 것을 보면 ‘부용정’ 이름은 더 후대에 썼을 듯 싶다. 그리고 당시 정자는 지금 같은 규모의 목조 건물과는 달랐을 것도 같다. 세 번째는 ‘남전지제(藍田之制)와 백록지규(白鹿之規)를 행하여 풍교를 장려한다’는 내용이다. 여씨향약이나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전래와 함께 퍼진 공동체 운영에 대한 향약의 제반 규정이 ‘남전지제’와 ‘ 백록지규’로 표기되었을 법 하다. 그런데 그 행간에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의 전통이 당연히 녹아들어 있을 게다. 이 같은 마을 자치적인 상부상조의 전통과 ‘남전지제’가 결합하여 규약과 약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표현은 ‘남전지제’로 했을지라도. 이 향약 설행의 결과로 ‘풍교가 장려되었을 것’이다. 네 번째는 ‘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칠석동 부용정의 향약이 이름 그대로 고을[鄕] 전체가 참여하는 ‘향약(鄕約)’인가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쉬이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향약’에서 ‘향(鄕)’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향촌(鄕村)’ 또는 ‘촌락(村落)’의 의미와 ‘군현(郡縣)’ 또는 ‘고을[邑]’의 의미이다. 앞의 ‘향촌’의 의미라면 ‘동약(洞約)’이나 ‘리약(里約)’이라 할 수 있겠고, 뒤의 ‘고을’의 의미라면 글자 그대로 ‘향약(鄕約)’이라 하겠다. 전라도 향풍 진작, 광주향약 따라서 상부상조의 일반적인 의미의 ‘향약’과 그 자치규약의 범위를 지칭하는 ‘동약’ 의미로서의 ‘향약’ 표기와는 구분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보면 ‘광주의 향약은’이라는 기록은, 전래의 습속과 행간까지를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칠석동 부용정에서 김문발이 처음 실시한 ‘칠석동 동약’은 여씨향약의 규약과 마을 전래의 상부상조 전통을 습합하여 명문화 했고, 뒤에 ‘광주 향약’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광주 향약’은 ‘칠석동 동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부용정에서 처음 실시된 칠석동동약이 기반이 된 이선제(1390~1453)의 광주향약으로 향풍이 순화되어 강등된 광주목의 복호가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 박순(1523~1589)과 기대승(1527~1572)에 의해 더욱 완비되었고 나아가 전라도 여러 고을의 향풍진작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남원도호부 읍지인 『용성지』(규 174021)의 다음 기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직 광주고을의 향풍만이 가장 올바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 까지 이의가 없다. 이는 참판 박광옥(1526~1593), 기고봉(기대승, 1527~1572), 박사암(박순, 1523~1589) 등이 의논하여 엄히 약속하고 영구히 전하도록 사대부의 주론에 따랐었기 때문이다. [중략] 비록 대란을 당하여 기강이 해이되었다 해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의 순천 장성 창평 등 고을도 역시 광주 조약에 의거하여 모두 그 효과를 보았다.2)
1) 金文發 世宗朝 以隱逸 官刑曹參判 早年退休 建芙蓉亭 與鄕人 行藍田之制 白鹿之規 以勵風敎 光州之鄕約自此始
2) 獨光州一邑 鄕風最正 至今無異議 若朴參判光玉 因奇高峰 朴思菴之通論 嚴立約束 傳之永久 使士大夫主論故也 [中略] 雖屢經大亂 紀綱不壞 非徒光邑爲然 隣邑如順天長城昌平等官 亦依光州條約者 皆見其效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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