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구례 지리산 화엄사와 연기법사 게시기간 : 2020-10-1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10-12 10: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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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의 불교계는 이론불교가 성숙되면서 법상종 사상과 더불어 화엄종 사상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화엄종이 의상과 그의 많은 후계자들에 의한 저술활동과 화엄 10찰의 건립활동 등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여 당시 불교계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전국적으론 여러 사찰에 퍼지게 되어 그 사찰을 <의상화엄전교 10찰義湘華嚴傳敎十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화엄 10찰은 ① 중악 공산 미리사 ② 남악 지리산 화엄사 ③ 북악 부석사 ④ 강주 가야산 해인사 ⑤ 웅주 가야협 보원사 ⑥ 계룡산 갑사 ⑦ 양주 금정산 범어사 ⑧ 비슬산 옥천사 ⑨ 전주 모산 국신사 ⑩ 한주 부아산 청담사인데, 의상이 이 모든 사찰을 직접 전교한 사찰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찰에 따라 그 창건연대가 의상(625~702)이 생존했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 10찰 가운데 <지리산 화엄사>가 들어 있어 주목해야 될 듯 싶다. 화엄사는 8세기 중엽 황룡사 소속 승려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여겨진다. 종래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구구한 학설이 있어왔고, 그 창건주인 연기 또한 매우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라는 스님이 화엄사를 세웠다고 했다. 또한 인조 14년(1636)에 쓰여진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을 비롯한 사적기 등은 신라 진흥왕 5년(544)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고 했다. 심지어 연기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연을 타고 인도로부터 와서 화엄사를 지었기 때문에 연기라고 한다는 설화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선덕왕 11년(642)에 자장(慈藏)이 중창하고, 장육전(丈六殿) 및 화엄석경(華嚴石經)은 의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역에 속했던 화엄사가 어떻게 신라 승려에 의해 창건되고 증축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의상 이후에 번역된 『80권본 화엄경』을 의상이 장육전에 석각(石刻) 화엄경(華嚴經)으로 둘렀다고 하는 문제도 생긴다. 그리고 양식상으로 현존 석조물이 모두 8세기 중반으로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점 등으로 『화엄사사적』등 문헌기록에 대한 의문과 사료 신빙성 문제는 일찍부터 논란거리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과 문제점은 1978년에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많이 풀려지게 되었다. 2축으로 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주본(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周本)』이 그것이다. 화엄사의 창건조사로 전해지는 연기는 신라 경덕왕대의 실존인물이라는 점과 그가 화엄경 사경(80권본)을 발원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 화엄경 사경의 발문에 따르면, 황룡사의 승려 연기가 경덕왕 13년(754) 8월 1일에 화엄경 사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6개월 14일만인 그 이듬해 2월 14일(부처님 열반일 전일)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경의 발문 끝에는 사경 조성에 관여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에 의하면 사경조성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무를 담당한 지작인·경필자(紙作人·經筆者)의 거주지가 무진주와 완산주, 즉 전라도 지방이다. 이런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사경은 연기가 창건한 화엄사에서 조성되어 화엄사의 탑 속에 사리 대신 봉안되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에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반출되었다고 하므로, 아마 이것은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속에 봉안되었지 않았나 하고 추정해 본다.
1. 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주본, 연기는 화엄경 사경을 왜 조성하였을까? 그가 사경을 조성한 이유는 첫째 은혜를 주신 아버님의 원을 위한 것이며, 둘째는 일체의 중생을 모두 성불케 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연기가 화엄경 사경을 조성한 이유는 두 가지로 적혀 있지만, 일체 중생의 성불은 의례적인 표현이고, 보다 절실한 발원은 아버지의 소원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화엄사에 경덕왕대의 건축물로 추정되는 유명한 이형석탑 <화엄사4사자3층석탑>이 있는데 그 석탑의 상층기단에는 4마리의 사자가 기둥구실을 하고 있고 그 중앙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이 연기법사의 어머니라 하며, 그 아래 석등을 이고 끓어앉아 차그릇을 들고 공양올리는 모습의 승려상은 연기조사라고 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연기조사의 효성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탑이 있는 언덕을 효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비록 이 전설에는 어머니로 되어 있으나, 어떻든 연기조사가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이야기는 이 사경의 원문에 비추어 화엄사를 사경의 장소로 생각케 하며, 봉안한 곳도 화엄사4사자3층석탑이 아니겠는가 하는 바이다. 어쩌면 이 석탑의 승려상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 화엄경 사경 조성에 관여한 사람들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거의 전라도 지방 출신이다. 이들은 사경의 일을 직접 담당한 기술자들이었다. 지작인(紙作人)과 경필사(經筆師)는 모두 전라도 지방 출신이고, 경심장(經心匠), 불보상상필사(佛菩薩像筆師), 경제필사(經題筆師)는 왕경인(王京人)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사경은 무진주, 완산주 지방의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좀 더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은 왕(경인王京人), 즉 경주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고 이해된다. 한편 화엄사에는 각황전(覺皇殿)이 있는데, 이것의 원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부처님의 몸을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하므로,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장육의 금색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寺傳>에 의하면 문무왕 10년(670) 의상대사가 3층 4면 7간의 장육전을 건립하여 사방 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근세 화엄사의 대강백이었던 진진응(陳震應) 스님의 조사에 따르면, 이 석경은 정강왕(886~887)에서 경순왕(927~935)에 이르는 사이에 조성된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이와같은 거대한 불사가 과연 가능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석경의 내용은 義熙本 華嚴經(60권본)과 貞元本 華嚴經(40권본)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시일을 두고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이와 같이 화엄사는 화엄경 사경과 화엄경 석경의 조성사업을 통해 화엄불국 연화장세계(華嚴佛國 蓮華藏世界를 이루어 서로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며 또 포괄된 하나하나에 제가끔의 개성을 갖게 하는 원융무애한 경지인 화엄의 세계를 이상으로 한 연화장세계의 대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8세기 중엽 황룡사 출신의 연기는 지리산에 화엄사를 창건했으며, 또 754년에 『화엄경(華嚴經)』을 사경(寫經)하기도 했다. 고려 중기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 연기의 저서로 『화엄경개종결의(華嚴經開宗決疑)』 30권, 『화엄경요결(華嚴經要訣)』 12권(혹은 6권), 『화엄경진류환원낙도(華嚴經眞流還源樂圖)』 1권, 『대승기신론주강(大乘起信論珠綱)』 3권(혹은 4권), 『대승기신론사번취요(大乘起信論捨繁取要)』 1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저서는 오늘날 하나도 전해지는 것이 없지만, 그가 당시 뛰어난 화엄종 승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의천은 또한 화엄사 연기조사의 진영(眞影)에 예참(禮參)하고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大覺國師文集』권17에 의하면, 偉論과 雄經에 두루 통하고 (偉論雄經莫不通)
일생의 弘護에 많은 功있네 (一生弘護深功) 3천명 義學이 등을 나누어 켠 뒤로 (三千義學分燈後) 圓敎의 宗風이 海東에 가득하네 (圓敎宗風滿海東) 이 영찬(影讚)과 그의 저술목록으로 보아 그가 『기신론(起信論)』과 『화엄경(華嚴經)』에 능통한 학승이었음에 분명하다. 또한 그는 원교종풍(圓敎宗風, 화엄교학의 종지)이 해동에 가득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공의 공이라고 의천은 찬양하고 있다. 연기의 문하에 3천여 명의 학승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의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는 아직 한 명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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