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백범의 전라도 길, 잠행과 보은① 게시기간 : 2020-08-18 16: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8-18 09: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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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실 밭에서 시작한 길 나는 한동안 오뉴월 복사꽃 피고 모심을 즈음이면 김여근 교수를 따라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뒷산으로 매실을 따러 가곤 하였다. 친구가 일렀다. “백범이 마을에 왔는데 그때 공부를 가르쳐서 이 골짜기 동네에서 일제 때도 전문학교 이상 다닌 사람이 많이 나왔다.” “언제 왔단 말인가?” 『백범일지』를 들췄다. 1896년 3월 일본군인을 죽이고 인천감옥소에 사형수로 갇혔다가 탈옥하여 마곡사로 들어가기까지 여섯 달가량 남도를 떠돌았는데, 그때 쇠실마을에서 달포 가량을 숨어 지냈었다. ‘안동 김씨 문중 마을 후한 집’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 다시 찾았다. “백범이 우리 고장에도 살았구나.” 1999년 봄,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노영기가 『백범김구전집』 편찬을 거들고 있다는 근황을 알려왔을 때, 매실이 좋았던 마을이 ‘백범을 살린 성지’로 되살아났다. 백범의 전라도 길이 궁금하였다. 서거 50주기에 맞춰 출범을 앞두고 있던 ‘광주전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 함께 ‘백범의 전라도 길: 잠행과 보은’에 나섰다. 함평ㆍ해남ㆍ보성으로 길을 잡았다. * 동학을 하다가 성리학을 익히다 김창암(金昌巖)은 1876년 7월 황해도 해주 팔봉산 자락 가난한 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인조반정 일등공신이었다가 효종의 역적이 되며 뿔뿔이 흩어졌던 김자점(金自點)의 방계 후손이었다. ‘상놈’으로 멸시당한 것이 분해서 양반이 되려고 향시에 나갔다가 부패한 세상 실력으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고 포기하였다. 그래도 배우려는 열망만은 펄펄하였다. 풍수와 관상학을 익히고 병법에도 몰두하였다. ‘한울님 모시고 도를 행하며 존비귀천(尊卑貴賤)을 없애자’는 교리가 좋아 동학을 공부하면서 ‘창수(昌洙)’로 개명하였다. 많은 평민과 산포수를 끌어들이며 ‘애기 접주’ 소리를 들었다. 1893년 18살 때였다. 이듬해 가을에는 황해도 ‘도유(道儒)’ 15인과 함께 충청도 보은을 찾아 최시형(崔時亨)에게서 ‘접주’ 첩지를 받았다. 전봉준ㆍ김개남 등의 남접이 재차 기포하고 일본과 조정이 군대를 남으로 내려보낼 때였다. 당시 최시형은 “호랑이가 밀고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 하였다. 총동원령을 내리며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나온다. ‘팔봉산 접주’ 김창수도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점령하였다가 일본군이 출병하자 구월산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동학당을 토벌하고자 ‘의려(義旅)’를 일으킨 안진사와 ‘불가침’ 맹약을 맺었다.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러나 홍역으로 고생하고 ‘구월산 접주’에게 병권을 빼앗기고 ‘친애하던 영장’마저 잃었다. 더구나 관군과 일본군에 쫓기는 신세, 신천군 청계동을 찾아 안진사에게 의탁하고 부모까지 모셔왔다. 안진사는 두주불사 호걸이었고, 청계동은 『수호지』의 양산박 같았다. 호방하고 활달한 장남은 총포를 좋아하여 연일 사냥을 나갔는데, 바로 세 살 아래 안중근이었다. 여기에서 고석규(高錫奎, 1840∼1922)를 스승 삼았다. 안진사가 ‘의려의 모사’로 초빙하였다가 아들 교육을 위하여 들인 ‘독(獨)선생’이었다. 자는 능선(能善), 호는 후조(後凋), 해주 비동(飛洞)에 살았다. 일찍이 양평 벽계(檗溪)의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춘천 가정(柯亭)의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문하를 출입하였다. 유중교는 스승 이항로의 유언에 따라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사형으로 섬겼지만, 심설(心說)이 달랐다. 이항로와 김평묵의 ‘심즉리(心卽理)’에 대하여 유중교는 ‘심즉기(心卽氣)’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문인들 사이에 일대 파란이 일어났으니, 이를테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유중교에 비판적이었고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동조하였다. 그때 이들 사이 서신을 전달하고 중재한 당사자가 고석규였다. 학설은 달라도 대의는 다를 수 없고, 학설로 정의(情意)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이었을까? 스승의 탄식은 깊었다. “고관대작은 외세에 영합하려고만 하고 산림학자는 한탄하며 혀를 찰 뿐, 구국의 경륜이 없다.” 스승은 주류 성리학, 위정척사 입장에서 결코 동의하기 어려웠던 천지개벽 동학의 한때 접주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을 생각까지 하며 살갑게 대우하였다. 새삼 ‘의리’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며 『화서아언(華西雅言)』과 『주서백선(朱書百選)』등을 익히도록 하였다. 『화서아언』은 김평묵ㆍ유중교가 발췌 편집하였던 이항로의 강학 교재였으며, 『주서백선』은 정조가 편찬 간행한 주자의 편지글이었다. 하루는 송나라 선승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선시를 외워주었다.
평소 아무 욕심 없이 지내지만 행동할 때는 단호하고 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 도망자의 오열 청계동에서 안진사가 호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참빗장수’ 김형진(金亨鎭)을 만났다. 전라도 남원에서 살았다는데 같은 안동 김씨이라서 금방 의기투합하였다. 두 사람은 나라 밖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하여 평양ㆍ함흥ㆍ북청ㆍ갑산ㆍ혜산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다가 평안도 벽동사람 김이언 등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서 강계로 진군하려고 하였지만 여의치 않아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1895년 11월이었다. 그 사이 스승과 안진사는 틀어져 있었다. 안진사가 단발하며 천주교로 개종하자, 스승은 절교를 선언하고 해주 본가로 돌아갔고 김창수도 청계동을 떠났다. 김창수는 황해도 안악군에서 사복 차림으로 정탐하던 일본인을 응징하였다. 1896년 3월 ‘치하포 의거’였다. 해주감옥을 거쳐 인천감옥에 갇혔다. 목숨이 경각인데도 당당하였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도 너희 일본의 임금을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겠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이 막 개통된 전화로 사형집행을 유예하면서 목숨을 건졌다. 이때 날마다 『대학』을 외우며 『세계지지(世界地誌)』 『태서신사(泰西新史)』 등을 섭렵하며 세계정세에 눈을 떴다. 동료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고 억울한 사정을 대서(代書)도 해주었다. 어느덧 신망이 높았고, 강화도 부자는 재산까지 쏟아가며 구명에 나서주었다. 그래도 언제 교수대에 끌려갈지 모를 일이었다. 1898년 3월 탈옥하였다. 서울ㆍ수원ㆍ아산을 지나 강경포구를 넘어, 전라도로 접어들었다. 김형진을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들었던 고향 동네, 남원군 산외면 이동(耳洞)을 찾았다. 지리산 북녘 끝자락 함양이 더 가까운 두메산골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전하는 말이 놀라웠다. “김형진이 이 동네에서 대대로 살기는 하였으나 몇 해 전에 동학에 가입했다가 식솔을 이끌고 도망간 후로는 다시 소식을 모른다.” 김창수는 섭섭하였다. “자기는 나의 일생을 빠짐없이 알았으면서 자기 내력은 숨기고 비밀로 하였다.” 매형이 전주 남문 안에서 한약방을 한다는 말을 떠올라서 찾았다. 매형은 냉담하고 불친절하였다. “김형진 말씀이오? 김형진은 분명 내 처남이지만, 내게 어려운 짐만 지우고 자기는 벌써 황천객이 되었소.” 이제 만날 길이 없구나! 무료하게 장터를 돌았는데 포목을 사고파는 청년이 김형진과 흡사하였다. 한참을 기다리다 물었다. 이때 광경이 『백범일지』에 나온다. “당신 김서방 아니시오?” “예, 그렇지라오마는 당신은 뉘시오이까?” “노형이 김형진씨 계씨(季氏)가 아니오?” 그 사람이 머뭇머뭇하고 말대답을 못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나는 당신의 면모를 보고 김형진씨 계씨임을 짐작하였소. 나는 황해도 해주에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伯氏)에게 혹시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그 청년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말을 잇지 못하다가 흐느끼며 슬피 울었다. “과연 그랬습니까? 내 형 생전에 당신께 관한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별세하실 때에도 창수를 생전에 다시 못보고 죽는 것이 한이 된다고 하였지라오. 제 집으로 가십시다.” 금구 원평 오두막집을 따라가서 영전에 절을 올렸다. ‘독립유공자 공훈자료’에 의하면 김창수와 헤어진 김형진(1861∼1898)은 황해도 산간지역 포수를 중심으로 동학을 재건하며 ‘서울을 점령하고 정씨 왕조를 세우자’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받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 남도의 인심을 만나고 호국현장을 답사하다 남도 가는 길, 대나무는 장관이었다. 김제와 광주를 지나 함평으로 들어갔다. 경기전 참봉을 지낸 이진사가 받아주었다. 일곱 살 연상의 이동범(李東範), 머잖아 만경군수까지 지냈대서 함평에서는 ‘만경댁’으로 통했던 삼천 석 부자였다. 다락 올리고 토굴이 있던 육각 지붕 일곱 칸 띳집 육모정(六茅亭)에 머물렀다. 낮에는 토굴로 내려가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지냈다. 이진사는 부리는 식솔이 많았음에도 굳이 둘째 아들에게 심부름을 도맡겼다. 도망자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요놈 참 잘 생겼다’ 하였다. 1920년대 함평 청년운동을 주도하며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던 이재혁(李載赫)이었다. 육모정에서 보름 남짓 편안하였다. 지게꾼 차림으로 개항이 되며 짐꾼 일꾼이 넘쳐났던 목포로 이동하였다. 인천감옥에서 같이 있었던 양봉구를 찾았다. 양봉구가 전해주는 탈옥 이후의 상황이 끔찍하였다. 함께 도망친 조덕근은 다시 잡혀 지독한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눈 하나가 빠졌으며, 그때 간수는 아편중독에 걸려 바로 죽었다. 당시 목포는 우리나라 최초로 부두노동자가 파업투쟁을 일으켜서 ‘일본패(日本牌)’가 없는 지게꾼은 일거리를 얻기 어려웠고 신분이 쉽게 탄로 날 수 있었다. 양봉구가 여비를 쥐어주었다. “순검들이 인천과 목포를 서로 내왕하여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되니 떠나라.” 바닷가에 숨어들었다. 해남 현산면 읍호리 이진사 집에서 신세 지고 백포리 윤진사 집에 투숙하였다. 한밤에 주인이 일꾼에게 매를 때렸다. “너 이놈, 양반이 작정하여 준 품삯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대로 올려 받느냐?” 당혹스럽게 물었다. “양반이 작정한 품삯은 얼마이고 상놈이 마음대로 올려 받은 것은 얼마나 되오?” 양반은 태연하였다. “내가 금년에는 동네 품삯을, 년은 두 푼, 놈은 세 푼씩 정하였는데, 저놈이 어느 댁 일을 하고 한 푼 더 받았기 때문에 다스리는 것이오.” 양반이 정한 품삯보다 많이 받았다고 매를 때린다는 것이다. 도망자는 사정하였다. “노상의 행인들이 주막에서 먹는 음식 값도 한 끼에 최하가 5, 6푼인데, 하루 품삯이 밥 한 상 값의 반에도 못 미치면 혼자 살림도 유지해 나가기 어렵거든 하물며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어찌 생활을 하겠소?” 그러나 주인의 셈법은 달랐다.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 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전부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의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일꾼의 품삯은 일꾼 식구들이 먹는 밥값을 제외하고 책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겠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의식주가 풍족하면 양반에게 공손하지 않을 것’이란 말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도망자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임금투쟁이라도 선동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해남 현산면 관두포에서 배를 타고 고금도로 들어갔다. 고금도에는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열세 척 남은 전선으로 열 배 넘은 일본수군을 대파하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일본과의 결전을 앞두고 수군을 재건하였던 통제영 유적이 남아 있었다. 충청도 아산 현충사에서도 ‘충무공의 기념비를 우러러 구경한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도망자의 충의호국 현장 답사였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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