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백범의 전라도 길, 잠행과 보은② 게시기간 : 2020-08-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20 11:4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
|||||||||||||||||||||
* 꿈같은 여름휴가를 보내고 김창수는 뭍으로 나와 강진ㆍ장흥을 거쳐 보성군으로 들어섰다. ‘안동 김씨가 많이 사는 마을’을 물었다. 일가를 찾았던 것이다. 기러기재[雁峙]에서 들어가는 득량면 쇠실마을이었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첫날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른 집에 묵었다가 이튿날에 후한 집이 어디냐를 물어서 김광언씨를 찾았다.” 주인은 도망자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사랑채에 머물게 하였다. 쇠실마을은 깊숙하여 기러기재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마을 뒷산 구릉에 오르면 동구가 훤하다. 낮에는 구릉에 올라가 동구를 살피고, 저녁에는 사람들과 계곡에서 목욕하고 사랑채에서 덕담하며 글을 가르치고 『동국사기』도 읽어주었다. 사람들은 김창수를 따랐고 서로 허물없었다. 훗날 마을 노인의 전언, “우리 할아버지는 백범과 교우하느라 널어놓은 보리가 비가 와서 떠내려가는데도 내버려 둬서 할머니가 성화를 부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40여 일, 꿈같은 여름휴가였다. 떠날 때가 되었다. 동갑이던 선씨(宣氏)는 바느질 솜씨가 좋은 부인이 만든 필낭(筆囊)을 선물하였다. 어떤 일꾼은 따라나서려고 하였다. “다음에 자리 잡고 부를 테니 기다려라, 내가 큰 욕을 얻어먹는다.” 아쉬움은 컸다. 정표로 남긴 『동국사기』 뒷장에 「이별이 어렵구나 離別難」을 풀었다.
그리고 적었다. “후일 보거들랑 혹여 제가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이를 남겨 정을 드러내고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종인(宗人) 김두호(金斗昊).” 김창수는 쇠실마을에서 김두호였다. 이후 화순 동복과 담양 대덕, 승주를 거쳐 하동 쌍계사에서 유숙하고, 임실과 금산 등지로 빠져나가 계룡산 갑사에서 어떤 사람을 따라 마곡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가깝게 원종(圓宗)이란 법명으로 살았다. 1899년 가을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900년 겨울 부친상을 치렀다. ‘성정이 호방하고 음주는 무량하여 가끔 양반들을 통타해서 1년이면 몇 차례나 해주 관아에 갇혀 치도곤을 당하여 만년에는 거의 반신불수나 지냈었다.’ 모친은 그때마다 입버릇처럼 타이르곤 했다. “너희 집 풍파가 모두 술로 생겼으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만은 안 보겠다.” 부친상을 마치면서 기독교에 입문하여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선생 공부’ 즉 사범강습도 받았다. 단연 황해도 신교육운동의 기수가 되어 서울을 왕래하며 신민회에도 가담하였다. 실력을 쌓고 기회를 잡아 일제와 전쟁해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비밀결사였다. 그러던 중 1910년 12월 안중근의 동갑내기 사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백정 같은 비천한 사람이 깨어나는 날을 소망한다는 뜻으로 백정범부(白丁凡夫)를 줄인 ‘백범’으로 자호하고 김구(金九)로 개명하였다. * 다시 찾은 남도 백범은 광복되고 석 달 지나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동포에 무한한 슬픔’을 느끼면서도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들의 활발 명랑한 기상’에서 희망을 찾았다. 1946년 9월 14일 명동성당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비상국민회의 의장 홍진(洪震, 1877∼1946)을 영결한 이튿날, 삼남 시찰에 나섰다. 부산ㆍ김해ㆍ진해ㆍ창원ㆍ마산ㆍ진주ㆍ통영을 거쳐 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와서 순천ㆍ보성ㆍ강진ㆍ목포ㆍ무안ㆍ함평ㆍ나주ㆍ광주를 지나 김제ㆍ전주ㆍ익산ㆍ군산ㆍ강경을 거쳐 상경하였다. 새나라 건설의 포부를 밝히는 길, 환영은 뜨거웠고, 강연회는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득의의 여정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살펴주었던 소중한 인연, 호국과 충의의 현장을 찾으며, ‘모두 잊지 못할 역사가 맺혀 있는 곳’임을 토로하였다. 이때 보성 쇠실마을을 찾았다. 지난 3월 시국이 정돈되는 대로 방문하겠다는 편지가 있다. 마을을 떠나며 정표로 건넨 『동국사기』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일곱 살 때 선생님 글공부하시던 좌석에서 놀았던 기억’을 자랑하였다. 그런데 ‘후한 집’ 주인 김광언은 해방 직전 고인이 되었다. “내가 48년 전 유숙하며 글을 보던 김광언씨의 가옥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환영하니, 불귀의 객이 된 김광언씨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옛날 내가 식사하던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음식을 대접하고자 한다고 하여, 마루 위에 병풍을 두르고 정결한 자리에 편히 앉으니, 눈앞에 보이는 산천은 예전 그대로이나 옛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백범일지』에 나온다. 필낭을 선물한 선씨(宣氏)도 이미 저세상 사람, 바느질 잘한 부인과 아들을 보성읍에서 만나 인삼으로 답례하였다. 무안에서 나주로 가는 길.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연도에서 나와 함평을 먼저 들려야 한다고 요청하여 예정에 없던 함평초등학교에서 연설하였다. 이때 이진사의 둘째 아들 이재혁이 만세 삼창을 선창하였다. 그리고 저물 무렵 나주에 도착하여 이진사 댁부터 물었다. 나주로 착각한 것이다. 한독당 사람이 말하였다. “이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라 함평이며 만세 삼창한 사람이 이진사의 둘째입니다.” 그만큼 세월은 길었음이었다. 얼마 후 경교장(京橋莊)으로 찾아온 한독당의 함평 지부 사람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냈고 두 아들을 만나서 ‘그때 착각한 사실을 솔직히 사과하였다.’ 1946년 9월 24일,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 열린 ‘김구선생 환영기념 강연회’의 인파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여러 곳에서 받았던 선물이나 금품을 광주시에 기부하였고, 광주시는 전재민(戰災民)이 천막 치고 살던 백화마을에 보냈다. 이후에도 호남을 찾았다. 1948년 9월 30일 열차를 타고 송정역에 내려서 광주에 들어와 이튿날 삼균학사(三均學舍) 개소식에 참석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에 대하여 연설하고 전남방직을 방문하였으며, 관음사에서 미소 양군 철수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광주여중 환영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0월 2일과 다음 날 무등산 증심사 오르는 길 오방정과 춘설헌에서 최흥종 목사와 허백련 화백을 만났다. 광주의 민족운동을 이끌고 무등정신을 품었던 당대 지도자였다. 이때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휘호로 건넸다.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이자! 『도덕경』의 한 구절인데, 지금 광주 YMCA 이사장실에 걸려있다. 누가 보냈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아는 테러단체 백의사 출신 포병장교로서 서북청년단 청년부장과 미군 방첩대 요원으로 복무하였던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기 두 달 전에도 군산ㆍ옥구ㆍ전주를 방문하였다. * 백범이 꿈꾸던 나라 우리가 기행 가던 날, 쇠실마을 ‘후한 집’을 지키던 손부 할머니는 백범이 왔던 날이 음력 8월 20일이었다며 또렷이 기억하였다. “군인 경찰이 수두룩했어. 요 마루에 걸터앉아 김구씨 양반이 ‘콩잎으로 죽을 쑤어주면 맛있었어요. 그때 잘 먹었습니다’고 했다오.” ‘김구씨 양반’, 친근하다. 그때 사진이 있다. 병풍을 친 마루에 앉았는데 한 가운데에 앉지 않고 부엌 편으로 비켜 앉았다. 기행에서 돌아오고 며칠, 쇠실마을 ‘후한 집’ 증손 김태기 교수가 전화하였다. “참으로 이해가 힘들어요. 우리는 이십 년 된 하숙집도 못 찾겠는데 말이죠. 아무리 고마웠다고 50년 전의 일을 생각하며 어찌 다시 올 수가 있지요? 요즈음은 얼마 전 고마운 일도 잊고 사는데.…” 실로 그러하다. 실제 백범은 해방 공간 가파른 시국에서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유적을 찾으며 충효열을 추모하였으니, 충청도 의병장 김복한(金福漢)과 최익현(崔益鉉)의 사당을 참배하고, 강원도 춘천의 유인석(柳麟錫) 묘소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개성에서는 선죽교의 상흔을 잊지 않았고, 통영시의 제승당(制勝堂)에서는 한 켠에 버리진 현판을 다시 내걸고 한산도를 탐방하였다. 진주 남강에서도 논개의 의열(義烈)을 기렸으며, 제주도 방문 때에는 삼성전(三聖殿)에 ‘고부량(高夫梁)’ 삼성 시조를 경배를 올렸다. 또한 이봉창ㆍ윤봉길ㆍ백정기 삼열사의 유골을 봉환하고 효창원에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나 감격해 하였다. 그때 유골을 봉환하였던 박열(朴烈, 1902∼1974)은 흑도회(黑濤會)ㆍ불령사(不逞社) 등에서 활동하였던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천황과 황실 요인을 폭살하려고 하였다가 무기징역을 살다가 풀려났었다. 이렇듯 역사에 대하여 경건하였으니 개인적 인연도 가볍게 여길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전주에서는 김형진의 아들과 조카를 만나 감회를 나누었고, 스님으로 살았던 마곡사도 찾았다. 탈옥을 도왔던 강경 살았던 ‘감옥 친구’ 공종열이 자살하였다는 소식에 아찔하였으며, 여러 번 수소문하였어도 행방조차 알 수 없었던 목포의 양봉구는 더욱 그립고 안타까웠다. 백범은 꿈꾸는 나라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화국가론’은 즉문즉설이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부터 민족독립운동의 현장, 그리고 해방공간 가파른 역정에서의 참다운 사람들의 패배와 좌절의 현장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역량을 확인하고 그러한 바탕에서 내일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여정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범의 전라도 길, 잠행과 보은’ 또한 지난 인연과 의리를 반추하는 기억의 순례이며 새로운 빛을 찾고 싶은 관국지광(觀國之光), 역사운동이었다. 지금 쇠실마을 집 앞에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란 표석이 세워졌다. ‘광주전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의 안종일 회장이 ‘아무런 흔적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 하며 몇 분의 뜻을 모으고 또한 많은 사재를 들였다. 임정에서 활동하였던 집안 형님 안후덕(安厚德)과 백범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하던 터라 백범의 의리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게 된 감회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이 바르기를 바란다면 그른 것을 들춰내기보다는 바른 것을 찾아 드러내는 일을 먼저 하여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