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6ㆍ15선언,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소환하다 게시기간 : 2020-08-2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21 13:2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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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6월, 제2회 백범기행 ‘백범 서거 50주기 추념’ 제1회 백범기행은 고희(古稀), 산수(傘壽)의 어르신부터 지난겨울 조선대 박물관의 ‘초등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내 고장 알기 역사체험’에 참가하였던 초등학생과 학부모까지 대형버스 3대가 움직였다. 근현대 식민과 해방 공간의 연구가 깊고 『백범일지 역주본』을 출간한 도진순 교수가 현장강의를 위하여 기꺼이 달려왔고, 케이블TV ‘Q채널’은 중계차까지 보냈다. 실로 가슴 벅찼다. 출발부터 오랑가랑 빗방울은 해남 대흥사 입구 초등학교 교정에서 도시락 나눌 즈음에 거세지더니만 해남 현산면 백포리는 어긋나버린 황톳길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얼굴 찌푸리지 않았다. 광경의 감동은 맑았고 여정의 매혹은 진했다. 2000년 6월 17일의 두 번째 백범기행은 ‘한말 국권회복운동과 청년 김구’를 주제로 삼았다. 전처럼 남도를 돌지 않고 보성이 배출한 《독립신문》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박사와 단군을 섬기며 민족의 정수를 수호하자는 대종교(大倧敎)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의 생가 마을을 찾고, 머슴의병장 안규홍(安圭洪)의 사적을 찾고 백범 은거지에서 초여름 더위를 식히며 호젓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의 보성 인연을 상상하며 쿵쾅하였다. 백범이 보성에 숨었을 즈음 ‘필립 제이슨’으로 돌아왔던 서 박사는 다시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갔고, 도사교는 대종교를 중광하기 훨씬 전 과거 공부하며 신세를 졌던 개화파 거두 김윤식(金允植)이 제주도로 유배가자 따라가 함께 살았으니 어깨너머라도 스쳤을 리는 없으리라! 그러나 서 박사와 도사교의 생가가 멀지 않는 문덕면 산중 법화마을에서 머슴살이 나무꾼으로 살았던 의병장은 그들이 태어나고 살던 집 앞을 지나다녔지 않았을까? 그리고 혹여 백범이 숨었던 마을 뒷산까지 나무하러 왔을지 모른다.… 자료집을 꾸미던 중 벌교 출신 작곡가 채동선을 새삼 알았다. 갓 배달된 삼성문화재단의 격월간지 『문화와 나』(2000년 5ㆍ6월호)에서 김용환의 「채동선: 토속적 서정으로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가인」을 만난 것이다. 김용환은 독일에 유학하여 학위를 받고 『윤이상 연구Ⅰ․Ⅱ』를 출간하였는데, 자료집에 요약하여 싣고자 ‘양해를 구하였더니, 전화에 반가움이 실려 왔다.’ 고마웠다. 그런 중에 보성의 조철환 옹이 서류 보자기를 내놓았다. 그중에 번쩍 띄는 구절, “1913년 겸백면 면장으로 있다가 받아놓은 세금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 삼일운동 직후 천진에서 출현한 독립단체 ‘불변단(不變團)’의 부단장으로 1919년 10월 30일 상해에서 발표된 「제2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임시정부 교통부의 전라남도 특파원을 자임하였던 박문용(朴文鎔)이었다. 보성 겸백면 출신으로 추모비가 쇠실마을 입구 쉼터공원에 있었다. 찾기로 하였다. 기행이 낼모레로 다가왔는데, 우리는 놀라운 사건을 목도하였다.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고 순안공항에서 김대중ㆍ김정일 두 지도자가 포옹하였던 것이다. 6ㆍ15선언의 감동은 1948년 4월 남북협상의 주역, 김구ㆍ김규식ㆍ김두봉ㆍ김일성을 소환하였다. 더구나 김규식은 서재필에게 배우고 후원을 받았으며, 김두봉은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에서 순교할 때 현장을 지켰던 대종교 신봉자였다. 우리는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을 더듬으며 분단과 전쟁의 비극과 상흔을 되새김하였다. 더구나 여정은 『태백산맥』의 첫 무대 벌교를 들리게 되어 있다. * 김구ㆍ김규식ㆍ김두봉, 만나고 헤어지고 김구가 ‘치하포 의거’로 인천감옥에 있을 때, 어린 시절 언더우드 고아원에 맡겨지며 영어를 배웠던 김규식(金奎植)은 한성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신문 기자가 되었다가 서재필의 권유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896년 16살 때였다. 미국 대학에서 대한제국의 무능을 비판하고,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는 유창한 영어 연설로 벌써 유명해졌다. 1904년 24살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배재학당과 연희전문 전신 한국기독대학 교수와 YMCA 활동가로 있다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구가 안악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 있을 때였다. 한편 어린 시절 부산 기장에서 완고한 부친에게 한학을 익히다가 1908년 16살 단신 상경하였던 김두봉(金枓奉)은 배재학당에 진학하였음에도 기독교 아닌 대종교에 심취하였고, 주시경(周時經)의 국어강습소에서 한글을 연구하고 최남선의 광문회에 출입하였다. 세상 떠난 주시경을 뜻을 이어 『조선말본』을 간행하고 황해도 구월산에서 나철을 시봉하며 그의 순교 현장을 지켰으니 1916년 28살 때였다. 이때 가출옥한 김구는 황해도에서 조심스레 농민계몽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상해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나 임정의 진로를 놓고는 달랐다. 김규식과 김두봉은 현 임정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자고 하였는데, 김구는 임정의 ‘문호파수(門戶把守)’ 즉 사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김규식은 상해를 떠나 천진의 북양대학, 성도의 사천대학 영문학 교수를 지내면서 김구와 한참 멀어졌다. 반면 김두봉은 상해에 머물면서 인성학교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조선말’을 되뇌며 열성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김구와 사별한 최준례(崔遵禮)를 위해 ‘한글’ 묘비를 지었으니, 정의는 유지한 셈이다. 이들은 중경(重慶)에 다시 모였다. 김구가 한인애국단의 이봉창ㆍ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를 떠나 항주ㆍ남경ㆍ무한(武漢)ㆍ장사(長沙)ㆍ광주(廣州)ㆍ유주(柳州) 등을 거쳐 중경에 들어섰을 때였다. 여기에서 민족혁명당의 김규식ㆍ김두봉ㆍ장건상ㆍ김원봉 등이 임정에 합류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정의 여당, 민족혁명당은 야당 격이었다. 그렇게 2년, 민족혁명당과 중경 임정이 국민당 정부와 밀착한 것이 못마땅하였던 김두봉은 중국공산당의 근거며 조선의용군이 활동하던 연안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헤어진 것이다. 이들은 다시 만나고자 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의정원이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각 혁명 정당과 사회주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연합 일치하여 생산한 전민족 통일전선정부’임을 결의하자, 임정은 연안의 김두봉에게 ‘서로의 연락과 통일을 위하여 연안으로 가리라’고 알렸고, 김두봉 또한 ‘민족적 입장에서 환영하리라’ 회신하며 ‘지역과 파벌을 묻지 않고 압록강에서 회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실제 장건상은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을 만나 통일전선에 합의하고 김두봉이 중경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깨어보니 일제가 항복하였다.’ 임정은 또한 김일성과 연락하고자 이충모(李忠模)를 파견하였다. 이충모는 1920년대 출현한 여러 사상단체를 정우회(正友會)로 묶어내며 민족유일당 신간회 출범에 기여한 경력이 있었다. 임정의 신임장을 받고 중경을 출발한 이충모는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서 ‘동북 방면으로 가는 통로’를 탐색하다가 일본 항복 소식을 들었다. 당시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미군과 광복군 국내진입에 합의까지 하였던 김구는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애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이들은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38선 남북을 점령하고 서너 달 지나고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애초부터 임시정부나 독립동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구ㆍ김규식은 거국적 환영이라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조선의용군 4개 대대를 이끌고 철도가 끊기고 차량도 구할 수 없던 화북과 요동을 석 달 넘게 도보로 행군하며 신의주가 눈앞이었지만 무장해제를 당하고 추방되었다. 이듬해가 돼서야 평양에서 연안의 동지와 조선신민당을 창당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북조선공산당이 조선신민당을 흡수 합병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올랐지만, 소련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깊숙이 지원을 받았던 북조선인민위원장 김일성을 넘볼 수 없었다. * 김구와 김규식, 길은 엇갈리고… 김구와 김규식은 수시 통신하고 자주 합석하였지만 길은 쉽게 엇갈렸다. 무엇보다 김구가 임정 법통을 고수하였다면 김규식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김구는 미군정을 잠시 다녀갈 손님을 여겼지만 김규식은 주인을 좌지우지하는 상수로 받아들였다. 귀국 한 달 넘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이 알려지며 김구가 선언하였을 때였다. “임시정부는 삼일운동의 여망으로 생겨나고 애국단과 광복군으로 일제와 정면 대결하였으며 또한 민족혁명당 등 좌익과도 합작을 이루었다. 임시정부 법통을 무시하고 신탁통치 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식민통치이다!” 임시정부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이때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김규식 또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내 반탁대열을 벗어났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을 신중하게 검토한 직후였다.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고 일제 통치의 참상을 청산하기 위하여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는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민주정부 구성 초안을 작성한다. 셋째,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민주정부와 민주주의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최대 5년 이내의 협력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작성하여 임시민주정부와 협의를 거쳐 4개국에 제출한다. 김규식은 신탁통치안을 국제적 원조를 통한 과도적 후견제로 받아들이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와 협력하고자 하였다. 근로인민당 여운형, 조선신민당의 백남운(白南雲), 조선공산당이 박헌영, 한국민주당의 원세훈(元世勳),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 중경 임정 민족혁명당 계열 장건상(張建相)ㆍ김원봉(金元鳳) 등도 같았다, 이들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좌파와 중간파 우익을 망라하였다. 김규식은 민전에 불참하고 미군정 자문기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약칭 민주의원에서 김구와 함께 부의장을 맡았다. 의장은 이승만이었다. 김규식은 김구ㆍ이승만에게 미소공위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한 치 물러섬이 없었던 두 사람은 반탁을 위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김구는 미군정과 정면충돌하며 한풀 꺾인 상태였다. 이승만의 셈법은 섬뜩하였다. “삼상회의 결정을 수락하는 것은 신탁통치 찬성이요, 이것은 즉시 독립하자는 국민 여망을 배반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결정 중의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위 구성을 생략하고 찬탁은 공산당의 매국이요, 반탁이야말로 미국과 함께 하는 독립, 애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1946년 6월 정읍발언이었다. 이때 김규식은 이승만과 결별하였으나 김구는 그렇지 않고 ‘형님, 아우’ 하였다. 1946년 해방 1주년은 ‘미소공위 재개와 인민공화국 수립’과 ‘반공반소(反共反蘇)와 미소공위 분쇄’가 충돌하였던 유혈의 아수라였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고 가까스로 좌우합작 7원칙을 도출하였다. 당시 여론도 호응하였다. 1946년 9월 10일 미군정의 ‘미래의 한국통치구조에 대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자본주의 13%,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모름 7%였다. 그러나 김구는 냉담하였고, 이승만과 함께 반탁에 매달렸다. 이렇듯 김구는 이승만과 나란히 앉았고, 김규식은 여운형을 마주 보았던 것이다. 그해 겨울 김규식은 민선 45인, 관선 45인으로 구성된 ‘남한 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안재홍은 미군정청 한국인기관을 총괄하는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이때 38선 이북에서도 최고정권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선포되었다. 남과 북 각각의 정부가 작동한 것이다. * 분단의 길, 남북협상 1947년 봄여름 서울과 평양을 오갔던 제2차 미소공위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7월 19일 한낮 여운형이 암살되자 김규식은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 진영의 한 용장’을 잃은 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 포기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다. 유엔이 미국의 ‘총선거와 미소 양군의 철수 감시할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을 총회에서 결의하였을 때였다. 소련이 반대하면 38선 이북 선거는 불가능한 만큼 남북 지도자가 만나 총선거와 미소 양군 철수문제를 토론하고 유엔에 보고하여 승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김구 또한 유엔 결의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과는 결이 달랐다.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초래할 것’을 경고하는 한편 또 다시 임정 법통을 앞세웠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유엔임시위원단과의 교섭을 맡아야 한다.” 그러던 중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되자 궁지에 몰렸다. 범인으로 체포된 현직 경찰과 교사 등이 ‘한독당 당원이며 김구를 총재로 추대한 대한학생총연맹 간부와 맹원’이었고, 신문과정에서 암살 동기를 ‘한때의 공산당 이론가’ ‘학병을 강요한 변절’ ‘미소공위 참가와 찬탁 주장’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김구를 암살의 실질적 배후로 몰아가며 그들만의 ‘대표단’으로 유엔임시위원단을 상대하며 ‘가능한 지역 내의 선거’를 준비하였다. 김구는 분노하였다. ‘독립촉성은 정략주의의 소산’이라며 이승만에게 진저리를 쳤고, 한민당을 ‘민족반역자 집단’ ‘우익이 아니라 우익을 더럽히는 군더더기’라고 공격하였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을 성명하고 김규식과 함께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였고 평양 또한 호응하였다.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김구는 적극적이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은 합작할 수 없지만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못할 이유가 없다.” 김규식은 ‘독재정치 배격, 사유재산 승인,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미소양군 철수,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불가’ 등 5개항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김일성의 서신을 받고서야 결심을 굳혔다. 김구는 4월 19일, 김규식은 4월 21일 평양에 들어갔다.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서 잠깐 인사말을 하였지만 공식 참가하지 않았다. 김규식의 5개항을 토의하기 위해 소집된 ‘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즉 ‘15인 요인회담’에도 소극적이었다. 모든 행사가 소련의 각본,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면서 ‘남한 단독정부 절대 반대’ ‘미소 양군 철수’를 벗어난 다른 의제가 상정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요인회담 마지막 날인 4월 30일에야 김두봉의 초청 형식으로 김일성과 회동할 수 있었다. 이른바 ‘4김 회동’ 여기에서도 김일성은 ‘남한 단독선거 반대’에 상응하는 ‘북한 단독정부 수립 중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때 김일성은 ‘조만식의 석방과 월남’은 소련 주둔군의 관할로 미뤘고, ‘북한 전력의 남한 송전과 연백 수리조합 방류’을 약속하였지만 이내 뒤집혔다. 당시 근로인민당 대표로 남북협상에 갔던 장건상에 따르면, 당시 김두봉은 상해 시절이나 민족혁명당 시절의 ‘조선적인 것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은 국수주의자’ ‘고집불통 꼴 샌님’이 아니었다. 항상 ‘민주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외치며 ‘우리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연창하며 ‘민족의 절세 애국자이며 영웅’으로 찬양하였던 것이다. 장건상은 대표자연석회의에서 ‘근로인민당은 공산주의로는 살 수 없다’고 발언하고, 앞서 월북한 정백(鄭栢)에게 ‘김일성이 무에 그렇게 큰 영웅이라고 저러느냐?’ 하였다가,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도 보름 지나 겨우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김두봉이 ‘많이 애쓴 덕택이었다.’ 정백은 한때 ‘서울청년회’ ‘상해파’에 가담하였던 왕성한 공산주의자로서 해방 직후 박헌영에 앞서 조선공산당을 재건을 선포하였다가 배척당하고 여운형ㆍ장건상과 같이 좌우합작위원회와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였었다. 이렇듯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국토가 갈리며 산천의 초목마저 검은 한숨에 잠길 때, 당시 서울에 있었던 과도정부 최고의정관 서재필은 무엇을 하였으며 어떤 생각이었을까? 어느덧 기행단을 실은 버스는 주암호가 열리는 풍광 좋은 길목의 서재필기념공원에 닿았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던 모화관 터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을 똑같은 크기로 우뚝 복원해놓았다. 서재필이 태어난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 可川마을 입구에 있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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