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추노(推奴), 그리고 비첩(婢妾)의 정조 게시기간 : 2020-08-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2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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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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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영향으로 이제 추노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국민들이 잘 안다. 그런데 추노가 무엇인지를 꼭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사료를 읽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강한 근육질의 노와 추노꾼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오히려 낯설다. 송강 정철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와 메모 단편들을 모아 장첩한 [송강선조유필(松江先祖遺筆)]이 담양의 가사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젊은 송강 정철이 성주 목사로 나가 있는 매형에게 자신의 노를 잡아서 혼줄을 내달라는 편지도 있는가 하면 임란이 발발하자 사면이 되어 강계에서 평양까지 간 노정을 기록한 메모, 강계 유배 중 [통감(通鑑)]을 반복해서 읽고 기록한 서산(書算)까지 다양하다. 여기에서는 송강이 노비를 추심하는 편지 한 건, 비첩 향복에 관련된 메모 편지 한 건을 읽고 음미함으로서 당시 조선 사회의 양반과 노비, 주인과 비첩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젊은 송강의 노비 추심> [송강선조유필]의 첫 장에는 언제 누구에게 보냈는지 모를 송강의 편지 한 통이 있다. [그림1] 정철이 최홍도에게 보낸 간찰
[(수결) 謹封]
車仁智之來 伏承/下書 因審/衙候平安 仰喜不已 澈病親臥日多而起日少/ 氣息奄奄 常自憫嘿 心肝煎熬 以此忽忽若羈/旅怵迫之人 萬事不掛念頭 如何如何/ 下諾板子 春來如副宿望 則平生感戴 庸有/極乎 伏望/十分精擇 大濟大濟 此中順年奴 本以詐譎無/狀 凡百使喚 一切拒逆 怨形於辭 面勃於/前 常以侍病之家 難於隨怒箠打 容/忍而已 頃授數等事 過數旬始問經理/與否 則對曰全未也 於此試欲警覺/ 令奴曳入 因脫去不現 稱澈之言 到處/濫簡 其欲橫行於嶺外列邑 可知也/ 非但此也 聘母主臨洛時 與有一婢子相奸/ 結約共逃 信書絡繹云 年奴/歸現星山之日 卽/遺失一婢之秋 伏望登時 擬囚于牢裏/ 猛杖八九十餘度 押送于京 則益□[愉]快喜/ 口不可道 伏望/毋泛曲施 萬萬生光 伏惟下鑒 謹此上白是 [(수결) 근봉] 차인지가 와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살피건대 관아의 일 보시는 것이 평안하시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철이 저는 병든 어버이가 누워계시는 날은 많고 일어나 계시는 날은 적으며 숨이 곧 넘어갈 듯하여 항상 걱정스럽고 답답하며 심장과 간이 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걱정입니다. 마치 나그네처럼 두렵고 절박하여 뒤숭숭한 사람이 되어 만사가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허락해주신 판자는 이번 봄 이후의 숙원에 부응하는 것이니 평생토록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충분히 잘 골라서 크게 도와주십시오. 여기는 종 순년이가 원래 사악하고 간휼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서 여러 가지 시키는 일을 모두 거역하고, 말에는 원망하는 모습이 보이고 눈앞에서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항상 병든 부모를 모시는 집에서는 화나는 대로 때릴 수도 없어서 참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에 몇 가지 일을 주고 몇 십 일이 지나 경리 여부를 물으니 전혀 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경각심을 주려고 종을 시켜 잡아들였더니 도망하여 가버리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말을 칭탁해서 도처에 외람된 편지를 보내니 그가 영남의 여러 고을에 횡행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장모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에 한 여종과 상간하고는 함께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고 서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종 순년이가 성산에 돌아가서 나타나는 날은 바로 여종 하나를 잃어버리는 날입니다. 바라건대 그가 나타나면 일단 감옥에 가두어 두고 80, 90여 대의 곤장을 세게 쳐서 서울로 압송해주시면 통쾌한 것이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범연히 듣지 마시고 꼭 시행해주시면 크게 빛이 날 것입니다. 살펴주십시오. 삼가 이로서 아룁니다. 첫 번 째 단락은 차인지라고 하는 사람 편을 통하여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그가 관직 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여 상대방의 소식을 확인하고 있으며, 그 이후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부모가 아픈 날이 많아 숨이 거의 넘어갈 정도여서 정철 자신으로서는 걱정스럽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 상대방이 관재(棺材)로 쓸 판자를 보내겠다고 한 모양인지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있다. 두 번 째 단락부터는 상전인 자신에 대해서 공손하지 않은 자세로 일관하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종[奴] 순년을 징치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순년이는 주인이 몇 가지 일을 맡기고 경리를 하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잡아들여서 문초를 하니 도망가 버리고 전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한 종이다. 더군다나 정철의 이름을 칭탁하여 영남 도처에 횡행하고 다니고 또 자신의 장모가 서울에 왔을 때 같이 와서는 다른 여종과 간통을 하고 그 여종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로 도망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종이 나타나면 잡아서 구속을 하고 80, 90대의 곤장을 때려서 혼줄을 내고 서울로 압송해달라는 부탁이다. 이 편지를 받는 상대방은 누구일까? 마지막에 ‘상사리[上白是]’라고 맺고 있다. ‘상사리’는 ‘아룀’의 극존칭 표현으로, 보통 부모 이상의 같은 일가친척에게 쓰는 편지의 마무리 말이다. 여기서 정철은 병든 어버이를 모시고 있으므로 본인의 부모는 아니다. 그렇다면 장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장인은 문화 유씨 유강항(柳强項)이다. 그러나 유강항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편지의 상대방이 될 수 없다. 순년이가 도망한 곳은 성산(星山)이다. 그러므로 성주 목사일 가능성이 많다. 정철 일족 중에서 성주 목사를 한 사람은 손위 매부인 최홍도(崔弘渡)가 있다. 최홍도는 1563년 3월에 성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1563년 3월 21일, 22일조에 나온다. 정철이 28세 때로, 그는 바로 1년 전에 문과에 합격하고 이 해에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 정철의 부모는 이처럼 숨이 넘어갈 것처럼 노쇠해서 관재를 마련하고 장례를 준비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작고한 것은 그로부터 7년, 10년이 지난 후였다. 정철의 손위 매부 최홍도는 실록에 아주 나쁜 사람의 표본으로 나온다.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당시의 실세인 윤원형(尹元衡)의 첩 난정(蘭貞)의 아들을 적서(嫡壻)로 맞이하여 권세를 빙자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의 기롱을 받고 탄핵을 당하였다. 1564년 최홍도가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을 때의 사평(史評)이다.
최홍도는 형편없는 비부(鄙夫)이다. 벼슬하기 전에는 벼슬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벼슬을 얻고서는 잃을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딸을 윤원형의 첩에게서 난 아들에게 시집보내고서는 스스로 호랑이의 위엄을 잠시 빌은 여우로 착각하고서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며 자기의 욕심을 한껏 부렸다. 지난번에는 성주(星州)가 피폐한 것을 싫어하여 노모(老母)를 봉양할 수 없다는 핑계로 국왕을 속이고 부임하는 것을 회피하더니, 동래 부사로 승진 제수되자 노모를 잊기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하였다. 홍도 같은 사람은 종기를 빨아주고 치질을 핥는 등 못하는 짓이 없이 할 자이니 말할 것도 못된다.
노비는 거주나 사환의 형태에 따라서 외거노비, 솔거노비로 구분을 하지만 외거노비도 언제든지 주인의 소환에 의해 가내사환노비로 바뀔 수가 있다. 순년은 매우 똑똑한 외거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켰지만 제대로 경리를 하지를 않았다. 또 장모가 서울에 다닐 때에는 시종을 하고 따라오기도 하였는데, 순년이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여종과 간통을 하고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시골로 도망을 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전정후독(前貞後瀆)’ 송강의 비첩 향복과 강아> 송강 정철은 관기(官妓)나 비첩(婢妾)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관기 강아(江娥) 이야기이다. 강아는 원래 남원의 관기 진옥(眞玉)이었다. 송강의 총애를 받아 이름을 강아라고 바꿨다. 정철의 수청을 들어 총애를 받던 강아는 일 년도 못되어 송강이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고 강아는 시골에 남아서 수절을 지킨다. 10년 후 동서 당쟁의 와중에서 정철은 실각하여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유배 소식을 들은 강아는 송강을 찾아 강계까지 갔지만 임란이 터지고 송강은 사면되어 다시 국왕 선조를 호종하고 강아와 헤어지게 된다. 임란 중에 양호체찰사, 사은사의 바쁜 몸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반대파의 비판으로 실직에서 물러나 강화에서 운명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강아는 달려와 시묘살이를 하다가 죽게 되고 송강의 무덤 옆에 강아의 무덤이 만들어진다. 후손들은 자신들이 사는 진천으로 송강의 묘를 옮기자 그곳에는 다시 강아의 무덤만 홀로 남게 되었다. 강아의 설화는 강아가 평양으로 들어가 적장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명군과 내통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임란 시기에 흔한 스토리를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고양시 송강마을에 강아의 무덤이 남아있지만 송강의 자료에서 강아 이야기를 찾을 수는 없다. ‘자미화를 노래함[詠紫薇花]’이라는 시가 강아를 두고 읊었다지만 그것도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송강의 친필첩인 [송강선조유필]에는 비첩에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그림2] 송강이 향복을 언급한 편지
香卜於昔日陪奉我時/ 非徒其誠可嘉 其/貞亮之操尤可/喜 故尋常中每/憶之 汝所知也 今玆/相値 自言已汚於/業同云 此雖出於/前貞後瀆 而業/同之泛濫 從前如/此 極可痛憤 業/奴速送鄕家爲/可// 張崙亦侵之然耶
향복이가 옛날에 나를 모실 때에 그 정성이 가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정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기뻤다. 그래서 보통 때에도 매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도 아는 바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서는 스스로 이미 업동에게 더럽혀졌다고 말했다. 이는 비록 ‘앞에서는 정조를 지켰지만 나중에는 더럽혀졌다[前貞後瀆]’고 하는 것이다. 업동이가 범람한 것은 전부터도 그랬으니 매우 통분할 일이다. 종 업동이는 빨리 시골집에 보내는 게 좋겠다. 장륜이도 침범했겠지? 이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우습고 서글픈 편지이다. 편지 받는 사람에게 ‘너[汝]’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둘째 아들 종명(宗溟)이나 셋째 아들 진명(振溟)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여종 향복이 자신을 모셨고 헤어진 후에도 오래 정조를 지켰고 정철 자신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 둘이 만났을 때에는 스스로 자기가 업동이라는 종에게 더렵혀진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송강은 향복이에게서 업동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그를 시골집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향복이가 업동이를 마음대로 시골집에 보낼 수 있는 힘은 없을 것이므로 아마도 아들로 추정된다. 게다가 송강은 또다른 미심쩍은 녀석 장륜이에 대해서도 질문을 한다. “장륜이도 범했겠지?” 장륜이는 다른 편지에도 등장한다. 시골집은 창평의 지곡일 텐데 편지를 받는 아들과 향복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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