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서재필과 가내마을 게시기간 : 2020-08-2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8-27 13: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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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내마을 사람들: 외조부와 생부 서재필이 태어난 가내마을은 외조부 이기대(李箕大)가 살림을 일으키고 향약을 실시하였던 마을이었다. 이기대(1792∼1858)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종족과 화목할 것, 이웃을 돕고 농사와 길쌈을 부지런할 것’ 등의 약속을 세우고, 가난한 벗과 친척의 혼사와 장례를 힘껏 돕고 흉년의 굶주림을 구제하여 덕망이 높았다. 송광사 임경당(臨鏡堂)에서의 감회가 전한다.1)
일가 친족의 ‘회사(會社)’ 즉 동회에 갔다가 조계산 풍광에 호젓하였음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많았다. 가업을 일으켰으되 깊은 공부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산방의 시렁을 책으로 가득 채우면서 항상 되뇌었다. “자손에게 황금 가득한 상자를 물려주기보다는 시렁 가득한 책을 남겨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기대는 1849년 이른 봄 다섯 째 사위를 장성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보내 산방 기문을 받았다. 기문은 건물의 내력과 주인의 뜻을 밝히는 기념사와 같다. 기정진(1798∼1879)은 기운은 이치를 벗어날 수 없고 이치가 기운의 주인이라는 ‘리주기복(理主氣僕)’의 ‘유리론(唯理論)’을 제창한 당대 석학이었다. 이치가 관통하더라도 현상의 판국은 기운이 작용이라는 ‘리통기국(理通氣局)’의 이기일원(理氣一元) 주기론(主氣論)과는 결이 다른 원리주의 성리철학이었다. 서기(西器)를 물리치고 동도(東道)를 지키자는 위정척사사상을 밑받침하게 된다. 기정진은 성인의 글을 배우고자 가천에 감춰둔 집이라는 뜻으로 ‘가은당(可隱堂)’이라 이름 짓고, 주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사위에 대한 인상으로 대신하였다.2) “주인을 만나지 못했지만, 별채에 들인 사위 서군(徐君)이 괜찮은 가인(可人)이라 주인을 만난 듯하다.” 이때 ‘서군’이 당시 열아홉 살 서광언(徐光彦)으로 서재필을 낳기 15년 전이었다. 논산에서 생장하였던 서광언(1830∼1884)은 가내마을에 장가들고 공부하면서 손윗동서 이최선(李最善)과도 자주 어울렸다. 담양 장전에 살았던 이최선(1825∼1883)은 기정진이 가장 일찍 받아들인 제자였던 만큼, 서광언 또한 기정진에게 배움을 물었을 것인데, 그때 산방 기문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기대가 세상 떠나자 외아들 이지용(李志容)이 가업을 받았다. 이지용(1825∼1891)은 일찍이 이웃 마을 안수록(安壽祿)과 동복 야사 출신 하백원(河百源)에게 배웠다. 안수록과 하백원은 송시열의 5대손인 산림학자 송환기(宋煥箕)의 문인으로 전라감사의 천거로 벼슬에 나서기도 하였다. 안수록(1776∼1857)은 성혼의 제자로 인조반정 이후 서인 공론을 이끌었던 산림학자 안방준의 후예였고, 하백원(1781∼1844)은 자명종ㆍ수차 등의 실용 기구와 「동국지도」와 「만국지도」를 제작하고 ‘농ㆍ공ㆍ상도 학문’임을 주장한 실용, 실사를 중시하던 실학인이었다. 1863년 이지용은 부친이 ‘노사에게 보내 노사와 같은 학자로 키우리라’고 소망하였던 열여덟 살 아들 이교문(李敎文)을 데리고 기정진을 방문하였다. 기정진은 지난 번 기문이 소홀하였음을 사과하며 옛 주인을 추모하였다.3) “서책은 천지간의 으뜸 공기(公器)인데, 장서가들은 사사롭게 쌓아두고 두 겹 벽장이 촘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잘못이다. 옛 글을 읽는 선비를 저버릴망정 좀벌레에게 빚지려고 하지 않아 안타까운데, 가은 어른은 누가 읽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제 아들과 대화하다보니 새삼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 가은당이 많은 학자가 책을 빌리고 공부하던 공공도서관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제시를 적었다. 제시는 흔히 기둥을 장식하는 주련으로 쓰인다.
가내마을에는 가은당 외에도 서책을 간수하는 두 채가 더 있었으니 동편의 천상재(川上齋)와 서쪽의 일감헌(一鑑軒)이었다. 기정진이 이기대를 위해 지은 묘지(墓誌)에 나온다.4) “가은옹(可隱翁)이 집을 짓고 곡식을 쌓아두고 독서하러 오는 사람을 맞이하였다.” 천상재와 일감헌은 독서인을 위해 식사까지 제공하는 기숙학사였던 셈이다. 여기에서 서재필의 생부 서광언, 가내마을 주인이던 외숙 이지용, 외종숙 이병용(李秉容) 등이 공부하고 진사가 되었다. 서재필보다 열일곱 살 많은 외종형 이교문도 한창 글을 읽었다. * 과도정부 최고의정관, ‘남북협상 정신은 옳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양력) 태어나서 서책 가득한 시렁 아래에서 놀고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네 살에 벌써 『동몽선습』을 줄줄 외웠다. 그리고 7살에 서울로 올라갔다. 당숙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며 김성근(金聲根, 1835∼1919)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김성근은 양부의 처남 즉 ‘양가(養家)’ 외숙으로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여기서 양외숙 의 일가인 열세 살 연상 김옥균을 만났다. 김옥균은 열 살 소년이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자 탄복하며 ‘후일의 동지’로 점찍었다. 1882년 20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육군학교에서 근대 병학을 익혔고, 1884년 겨울 신식군인을 훈련하는 조련국 사장관(士官長)으로서 정변의 전위대로 활약하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삼일천하,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갔다. 당시 생부와 생모, 형제 그리고 부인 광산 김씨는 자결하고 참형을 당하고 두 살 아들은 굶어죽었다. 1895년 12월 미국시민 ‘필립 제이슨 Philip Jaisohn’으로 돌아와서 내각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을 맡았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세계는 군주국만이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공화국이 있고, 정치체제는 독재 전제가 아니라 ‘입헌법치’가 대세이며, 언론과 사상의 자유야말로 천부인권임을 알렸다. 또한 배재학당의 ‘협성회(協成會)’에서 이승만ㆍ김규식 등을 지도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친로정권의 국부 이양, 이권 할양을 비판하였으며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에게는 ‘이곳은 조선 땅이 아니오니 속히 환궁하시라’ 하였다. 실로 득의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미국시민, 외신(外臣)을 자처하며 국왕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안경을 벗지 않는 등, ‘이방인’ ‘돈키호테’로 낙인찍혔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의 소환공작에 말려들어 ‘장모가 깊은 병이 들었다는 거짓 전보’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8년 5월, 망명 아닌 추방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의료기구 사업에도 진출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3ㆍ1운동 이후 다시 조국을 위해 나섰다. ‘한국인의 친구 Friend of Korean’를 조직하고 『독립 The Independent』을 발행하였으며 미국 대통령과 면담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렸다. 1921년과 1925년, 워싱턴과 호놀룰루에 열린 군축협상 범태평양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어느덧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까지 나빠지자 작은 메디아 시로 들어가 조용히 의사로 살았다. 어느덧 한국말도 잊어갔다. 그래도 여전한 동양계 미국인의 ‘롤 모델’이었다. 서재필은 1947년 7월 1일 인천항에 내렸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최고고문이며 과도정부 최고의정관으로 초빙된 것이다. 김규식ㆍ여운형과 동승해서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귀국 일성, ‘우리말도 거의 잊었고 한국 사정은 잘 모른다.’ 반세기만의 두 번째 귀환, 84살이었다. 물론 정치 생각은 없었다. 처음 귀국 교섭을 처음 받았을 때에 하지 사령관에게도 이미 밝혔다. “나는 연로했고, 원래 지위와 권세에는 아무런 뜻이 없으며 오로지 동포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고 싶다.” 실제 할 일이 없었다. 해방 2주년 기념식과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 참석하고 교황청 사절을 맞이하고 입법의원에 간혹 출석하였을 뿐. 그러면서 서울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하여 국민을 만났다. 첫 방송은 ‘시민의 특권과 책임’, 그런데 우리말 아닌 영어였다. 사람들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간혹 ‘이승만과 김규식의 스승이라던데…’ 하였을 것이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오자, ‘첫째 정직하고 둘째 자기를 버리고 국민을 위하여 일하고 셋째 항상 전진하는 진취성 있는 노력인’을 뽑는 선거를 희망한다는 원론 수준의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보수적이고 이조시대의 왕정을 원하는 사람이 돼서는 아니 된다’며 에둘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김규식을 내심 지지한 것이다. 실제 김구ㆍ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제안하자 수긍하였다. “양 김씨의 정신은 극히 좋다. 남북협상이 잘 되어 통일되기를 바란다. 통일만 된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그러면서 단독선거가 순조롭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는데, 우익의 힐난은 거칠었다. “군정을 연장하려고 한국에 돌아온 것인가!” 정작 5ㆍ10선거가 끝나자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연희전문대학 교수를 지낸 정일형(鄭一亨),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白麟濟). 경무부 수사국장으로서 친일 경찰 척결을 주장하고 무투표당선을 노린 이승만의 동대문구에 입후보하였다가 등록이 취소된 흥사단 출신 최능진(崔能鎭) 등이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이다. 정일형은 공개서한까지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고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 그러한 인격자가 한 분 계시니 바로 서박사이십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선반대파의 정계진출 공작’으로 몰아가며 미국 국적 문제를 꺼내들었다. 단정을 반대한 김구ㆍ김규식의 이중성과 서재필의 최대 약점을 건드림으로서 불출마선언을 이끌어내겠다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이었다. 실제 그렇게 되었다. 김구ㆍ김규식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이 단정에 간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사실무근’이라고 성명하고, 서재필 또한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미국시민으로 남겠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이승만에게 ‘남북협상세력을 포용할 것’을 권유하던 날, 비서 임창영에 따르면 조선호텔 숙소에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나는 외로운 사람이다. 가정생활도 그러했고 사회생활도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인천항에서 기선에 오르기 전, 기자가 ‘통일독립국을 수립하는 방법’을 묻자, 밝혔다.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국민의 권리를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 정부에 맹종하지 말고, 국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듬해 새해 라디오 신년인사에서 평화와 단결과 자유를 호소하였다. 조국동포에 보내는 마지막 육성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88세의 일기를 마쳤다. 1994년 4월, 메디아의 유해가 국립묘지로 안장되었으니 세 번째의 영원한 귀환이었다. * 가내마을의 탄식 서재필이 과도정부 최고의정관으로 귀국하고 얼마 후 문중에서 환영회를 개최하겠다고 하자 짜증을 냈다. “갑신년에 망명할 때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였는데 조카와 친족들이 이처럼 많단 말인가.” 그래도 외가는 잊지 않았음인가? 그간 힘들게 가내마을을 지켰던 외가 종손(宗孫) 이용순(李龍淳)을 불러서 당부하였다.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수신제가하며 가업에 충실해야 한다.” 서재필이 서울 양외숙 댁에 기숙하였을 때는 풍족하고 화목하였다. 1876년 무서운 흉년에 사람들이 굶주릴 때 가내마을 친외숙 이지용은 많은 곡식을 풀어 일가와 마을 사람을 구제하였다. 그래서 이듬해 일가친척이 모이는 화수회(花樹會)는 이지용을 칭찬하는 시회를 겸하였다.5) 당시 서울 양외숙 김성근과 장전 마을 셋째 이숙(姨叔)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으로 있던 이준선(李駿善)도 축시를 보냈고, 기정진 또한 이들이 묶은 시첩에 가내마을의 선행과 덕업을 찬양하는 서문을 건넸다. 이때 여전히 가내마을 살던 생부 서광언은 “지난해 누가 올가을을 생각할 수 있었으리? 서로 축하하니 혜택이 흘러넘치리.…” 하였고, 넷째 이숙(姨叔) 이최선은 “지난 해 산양(山陽)에 활불(活佛)이 나타나, 좋은 일로 그 자손에 복이 흘러넘치겠지.…” 하였다. 산양은 보성인데, 생불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만큼 가내마을은 흉년을 이겨낼 만큼 상부상조하고 여유로웠다. 이지용 또한 천거를 받아 의금부 도사를 거쳐 석성현감까지 지냈다. 그러나 1891년 이지용이 별세하고 외종형 이교문이 살림을 맡으면서 곤란해졌다. 이교문(1846∼1914)은 기정진 학당에서 영남과 호남의 동문과 공부할 때는 활달하고 상쾌하였다.6) “버들 꽃 시냇가 바람 없이 맑으니, 여러 벗 글 읽는 소리는 새들의 좋은 노래 같네. 한 번 만나 사귄 영남과 호남의 벗들이여, 이제 석 잔 술을 돌릴 때라네.…” 휴식 중에 서로 흉금을 터놓고 상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만나면서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하였다. 서울에 갔다가 종로를 활개 치는 일본인을 만났을 때 감회가 다음과 같았다.7) “하늘과 땅 사이 도(道)는 한 가지, 우리 취향은 난초 향에 맡겨야겠네. 입는 옷을 고치려면 굴원을 본떠야 하고, 갓 먼지를 털고 벼슬 나가려해도 뜻 맞은 벗이 있어야지. 푸른 산 소나무 아래 집을 짓고, 의당 고향의 물길에서 낚시나 하리라. 덧없는 삶 무에가 꺼려서 오래 취하지 않으리? 술기운 떨어져 혹여 잠깐이라도 깨어나지 않으리라.” 나라가 망해가자, 노사에게 같이 배웠던 이웃 법화 마을 정시림(鄭時林)을 만나 억울함을 토로하였다.8) “패국에 별다른 계책 없음을 알고, 가까스로 잠깐이나마 닳고 헤진 책 뒤적이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린 때를 만나서, 누구를 의지해야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까?” 1906년 여름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격문을 보내오자 울컥하였다.9) “백발노인 병사를 일으키니 정녕 두려워라, 일편단심 절의를 세워 죽을 날을 맹세하다니. 오늘에야 면암 어른 뜻을 알았으니, 항상 가슴에 수만 병사를 품고 계셨구려.” 그러나 어찌하지 못하였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 순국하였다는 소식에 통곡하고, 서둘러 장례에 맞춰 제문을 올리고 곡하였을 뿐.… 능주 양회일과 창평 고광순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 고종이 황위를 넘기고 군대까지 해산되었던 1907년 겨울, 제야의 심사는 아련하였다.10) “호랑이 승냥이 날고뛰어 나라가 온전한 데가 없으니, 의리와 이욕을 판별하는 사람 몇이나 될꼬? 백만 생령의 새해 축원은 원수를 쓸어 없애고 임금과 부모에 보답하는 것이리라.” 이교문은 가내마을 뒷산 망일봉 아래에 살다가 ‘종사가 회복되지 못하여 무궁한 한’이라며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9세. 평소에 노사의 손자로 함께 공부하였던 기우만(奇宇萬, 1846∼1914)에게 토로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남기신 재산을 없앴으니 죄책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 시국이 날로 급박하여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곤경에 빠져 있으니, 차라리 가난하게 살며 즐겁게 지내고 싶다.” 그간 재산을 어딘가에 보내고 나누었던 것이다. 더구나 옛집은 동복과 보성 일대 의병을 토벌하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가내마을을 지켰던 외종질 이일(李鎰, 1868∼1927)의 탄식은 깊었다. “강하는 아름다우나 오두막집도 건사하기 힘들고, 천지는 넓으나 홀몸도 은신하기 어렵다.” 1) 『可隱實記』 권1, 「松廣寺臨鏡堂板上韻」
2) 『蘆沙集』 권22, 「可隱堂記」; 『可隱實記』 부록 권1에는 ‘기유맹춘(己酉孟春)’이라 하였다. 3) 『노사집』 권2, 「寄題可隱堂」. 『가은실기』 부록에는 ‘계해재제(癸亥再題)’ 4) 『노사집』 권26, 「可隱李翁墓誌銘」 5) 『小松遺稿』 부록 권1, 「花樹會詩軸」; 『노사집』 권20, 「星州李氏花樹會詩軸序」 6) 『日峰遺稿』 권1, 「下沙講堂」 “楊花澗畔靜無風 好鳥懷音與子同 嶺湖一面皆交際 盃酌三巡適此中 黙亦何嫌時後語 遠惟未隔意相通…” 7) 『日峰遺稿』 권1, 「倭人橫行鐘路有感」 “天地中間道一端 吾人臭味托於蘭 裁修可倣靈均服 彈起何須貢禹冠 捿在碧山松下屋 歸宜流水月中竿 浮生磊落惟長醉 無或時醒酒力殘” 8) 『일봉유고』 권2, 「七月白種逢鄭月波時林共拈」 “…自知敗局無奇策 勤向殘編惜寸暉 時見頑雲能蔽日 賴誰能復舊邦畿” 9) 『일봉유고』 권4, 「崔勉菴倡義檄文來到」 “…白首說兵眞可畏 丹心立節最深期 聊知今日勉翁志 常有胸中數萬郞” 10) 『일봉유고』 권4, 「丁未除夕」 “…橫連豺虎無全國 判斷熊魚有幾人 百萬生靈來世祝 盡殲讎敵報君親”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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